Tuesday, March 28, 2023

김누리의 라이피즘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하기 위한 사상적 예방주사 | 사회주의자

김누리의 라이피즘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하기 위한 사상적 예방주사 | 사회주의자

김누리의 라이피즘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하기 위한 사상적 예방주사
글쓴이: 민현기
-2022년 2월 9일




필자는 작년 10월 14일 『사회주의자』 창간 5주년 기념 토론회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방해하는 요인들”에 토론자로 참여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토론회와 관련하여서는 황종원,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방해하는 요인들을 철저히 제거, 극복하자!—『사회주의자』 창간 5주년 기념 토론회 후기」를 참고할 것).


한편 몇몇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 또한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방해하는 주체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중앙대학교 김누리 교수는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재난과 모순이 자본주의의 질서에 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야수자본주의”를 통제하고 (독일식의) 사회적 시장경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구호로 “라이피즘(LIFEISM)”이라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제시하며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방해하고 있다. 이러한 진보적 지식인들은 학계의 권위를 기반으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제시하고, 많은 진보세력들이 이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필자의 토론문에서 인용)

이 인용문 가운데 등장하는 김누리 교수(이하 존칭은 생략)는 중앙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2019년 3월 4일 방영된 JTBC의 TV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질문 있습니다」에 출연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지식인이다. 방송 출연 이후 김누리는 2020년 3월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2021년 10월 『우리에겐 절망할 권리가 없다』와 같은 저서들을 출판하기도 하였으며, 강연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시간」, SBS의 「포스트 코로나—뉴노멀을 말하다」 등 여러 강연·강좌·연설 등에서 최근까지 활발하게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김누리에 대해 최근 몇몇 진보세력들이 환호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가령 이은탁 데모당 당수는 1월 2일 페이스북에 KBS1 TV 프로그램 「이슈 픽 쌤과 함께」에서의 김누리의 강연을 “압권”이라며 호평했으며, 나도원 노동당 대표는 1월 10일 페이스북을 통해 「노동당 기획강연 ‘체제전환’ 김누리편: “한국 정치 무엇이 문제인가”」를 소개하며 김누리 교수의 강연을 시원하다고 평가했다. 이외에도 김누리를 우호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인물들을 진보세력 내에서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필자가 말했듯이, 김누리가 제시하는 ‘라이피즘’은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로 인해 고통 받는 민중의 삶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다. 이미 문제의 근본적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은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김누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로는 자본주의를 문제 삼는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시키고 민중의 불만이 자본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공격으로 향하는 것을 막는 사상적 ‘예방주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진보세력들이 김누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김누리의 라이피즘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자본주의를 극복할 대안이 될 수 없는지 구체적으로 비판해보고자 한다.

김누리의 대안, ‘라이피즘’이란 무엇인가

김누리의 글에 따르면, 라이피즘은 자본주의를 세 가지 차원에서의 안티라이프(anti-life) 체제로 인식한다. 즉, 자본주의는 (1) 개인적 차원에서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왜곡하여(상품 질서가 인간을 지배) 인간의 삶(life)을 파괴하고, (2) 사회적 차원에서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왜곡하여(인간에 의한 인간 착취) 인간의 생존(life)을 파괴하며, (3) 생태적 차원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왜곡하여(자연에 대한 무한 파괴) 인간의 생명(life)을 파괴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나는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대안으로 라이피즘(lifism)을 제안한다. 라이피즘은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안티라이프(anti-life) 체제라는 데 주목한다. 즉, 라이피즘이란 자본주의가 개인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삶(life)을 파괴하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생존(life)을 파괴하며, 생태적 차원에서는 인간의 생명(life)을 파괴하는 체제라는 사실에 착안하여, 인간을 소외하고 사회를 와해시키며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일련의 사상적, 실천적 활동을 뜻한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의 삶과 생존과 생명을 존중하고, 그 바탕이자 전제인 생태를 중시하는 사람을 라이피스트(lifist)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피스트는 인간, 사회, 자연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하고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라이피즘은 이러한 안티라이프(anti-life)적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시장 중심 사회에서 인간 중심 사회로, 경쟁 사회에서 연대 사회로,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복지국가로, 인간의 자연 지배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생으로, 메리토크라시(능력주의)에서 디그노크라시(존엄주의)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설명된다.

동시에 김누리는 다른 글에서 이른바 ‘야수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통하여 자본주의는 효율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활동성과 효율성을 가지고 있지만, 통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놔두면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라는 야수에 올라타서 ‘잘 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경제체제로 ‘사회적 시장경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즉, 라이피즘이 제안하는 구체적 경제형태는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것이다.(폴리뉴스, 「김누리 중앙대학교 교수② “한국은 약육강식의 정글자본주의…공공성 중심 사회적 시장경제로 가야”」, 2020. 7. 31.).

그렇다면 김누리는 이러한 라이피즘—사회적 시장경제—을 위한 실천적 행동으로 무엇을 제시하는가? 최근 김누리의 강연이나 연설을 찾아보면, 김누리는 능력주의를 근본 문제로 설정하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교육혁명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교육혁명이란 68혁명 이후 독일[서독]의 70년대 교육 개혁을 모방하는 것으로, 교육에서 경쟁을 추방하고 학생 스스로 비판하는 능력을 기르는 ‘비판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누리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재, 특히 한국에는 여러 모순과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거대한 불평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한국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한 문제들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과 생존 그리고 생명을 파괴하는 야수적 속성을 갖기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하지만 지난 세기 자본주의의 효율성은 이미 증명되었으며 사회주의적 계획경제는 실패한 것으로 대안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야수성을 잘 길들여야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적 시장경제를 통해 자본주의를 잘 길들여야 한다. 동시에 삶, 생존, 생명을 존중하고 연대와 존엄을 지향하는 라이피즘을 기치로 자본주의의 야수성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이러한 문제 해결이 자꾸 실패하는 이유는, 한국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능력주의이기 때문이다. 능력을 기준으로 경쟁하는 것은 야만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이를 교육혁명을 통해 해결해야한다. 독일의 1970년대 교육 개혁은 교육에서 경쟁을 배척했다. 그러했기 때문에 현재 독일이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나라가 될 수 있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라이피즘을 통해 자본주의의 야수성을 길들이고 인간의 삶과 생존과 생명을 존중하고 생태를 중시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김누리의 주장대로 교육혁명과 사회적 시장경제를 통한 라이피즘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대안이 되어 오늘날 민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답은 “아니오”이다. 이제부터 왜 김누리의 라이피즘이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는지 서술하려 한다. 이를 위해 먼저 김누리가 말하는 ‘교육혁명’에 대해서, 그 다음으로 ‘사회적 시장경제’에서 대해 비판하고, 김누리의 주장이 실제로 어떠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폭로하도록 하겠다.

자본주의 토대는 그대로 둔 채 독일을 모방하는 상부구조 개혁뿐인 교육혁명

최근 김누리의 교육혁명에 대한 초점은 ‘능력주의’에 맞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능력주의’(Meritocracy)라는 개념은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사회 개혁가인 마이클 영(Mechael Young, 1915-2002)의 풍자소설 『능력주의의 부상』(1958)에서부터 나왔으며, 최근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원제: The Tyranny of Merit, 김누리는 이를 “능력주의는 폭군이다”라고 번역한다)이 출판되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능력주의 담론과 마이클 샌델에 대해서는 이미 본 매체의 기사인 「문제는 ‘능력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다」(박남일)에서 자세히 비판하고 있다.


비록 샌델의 말은 아름답지만, 그 말이 능력주의를 무너뜨리는 실천적 수단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요컨대 샌델의 메시지를 실천하려면 우리는 능력주의로 성공한 엘리트들에게 부디 겸손해달라고 사정해야 하며, ‘성적 경쟁’으로 치러지는 명문대 입시를 ‘행운 경쟁’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또 시민적 공동선에 기여하는 사람은 경제적 보수가 낮더라도 사회적 인정만 받으면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어죽을 지경이어도 평등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 스스로 공부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샌델이 내놓은 대안들은 현실성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에서 필자가 박남일의 샌델 비판을 인용한 것은, 김누리 스스로 마이클 샌델이 자신의 문제의식과 “너무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산고등학교 배움과 성장의 날 김누리 강연). 김누리는 샌델의 핵심 메세지를 “오늘날 미국을 이렇게까지 처참한 야만 사회로 만든 그 근원에 있는 게 바로 능력주의다”라고 요약하며, 특히 “미국보다 더 미국적인”, “작은 미국” 대한민국에서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김누리는 독일을 미국 모델에 대한 ‘대안 모델’이자, 미국에 대한 ‘안티테제’로 인식한다(『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김누리는 이 문제의 해답을 독일에서 찾는다.

김누리의 설명에 따르면, 독일이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정치제도와 복지 체계, 사회의식을 갖춘 대안 모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68혁명 여파로 이루어진 70년대 교육 개혁에 있다. 그리고 68혁명 이후 70년대 독일의 교육 개혁의 기본 원리는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테오도르 아도르노)라고 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김누리는 독일의 교육 개혁이 미국적 능력주의와 경쟁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 대안이며 이를 모방하는 ‘교육혁명’이 한국에서 필요하다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김누리의 주장은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먼저, 김누리가 말하고 있는 것과 달리 실제 독일 교육에서 경쟁이 배제된 것도 아니다. 독일은 초등학교 4학년 졸업 때부터 성적에 따라 김나지움에 들어가거나 직업교육을 받는다. 김누리가 말하는 바 “아비투어[Abitur, 김나지움 졸업시험]에 붙은 학생은 누구나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를 원하는 때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김나지움 이전에 일찌감치 경쟁에 의한 배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 교육을 모방하는 것이 능력주의와 경쟁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말하는 것은 틀렸다.

그리고 김누리의 주장에서 더 큰 문제점은 교육을 바꾼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누리는 스스로가 독일의 교육 개혁이 유럽의 68혁명으로부터 비롯했음을 말하면서도, 교육혁명을 위한 반체제적 사회혁명이 필요함을 무시한다. 한 국가의 교육이란 곧 그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상부 구조로 기능한다. 입시지옥과 무한경쟁이라는 오늘날 한국 교육의 현실 또한 한국의 자본가 지배계급의 요구에 따라 구축된 것이다. 그런데 김누리의 주장은 한국의 교육체제를 만든 토대는 그대로 놔두고, 상부구조인 교육을 바꾸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이는 관념론적 방식일 뿐이며,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지배체제를 유지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사회적 계획경제는 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독일식 신자유주의이다.

이제 ‘사회적 시장경제’를 살펴보자. 김누리는 앞서 말했듯 자본주의를 효율적 체제이지만 인간을 잡아먹는 ‘야수성’을 지닌 양면적 체제로 인식한다. 그리고 사회적 시장경제의 ‘사회적’이라는 말이 국가가 자본주의의 야수성을 통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독일 기민당의 사회적 시장경제는 조세제도를 중요시하며, 자유시장경제에 의해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는 실업 문제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고 실업수당·재교육·재취업까지 정부가 책임지는 경제체제이며, 한국도 이러한 경제체제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김누리의 주장이다.

하지만 사회적 시장경제는 태생부터 시장의 자유와 경쟁을 수호하기 위한 사명감으로 탄생한 경제모델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론의 창시자로는 독일의 신자유주의학파 학자들인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 알프레드 뮐러-아르막(alfred Müller-Armack), 루드비히 에어하르트(Ludwig Erhard) 등이 있다. 여기에는 독일의 전후 재건이 배경으로 깔려있다. 당시에는 이미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으로 인한 위기가 심화된 상태였다. 오이켄은 자본주의는 시장과 경쟁의 가격기구에 의해 완전고용 및 생산·분배·소비의 최적점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당시의 불황이 최적균형을 가져올 수 있는 경쟁질서가 부재하거나 국가의 개입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경쟁질서는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정책을 통해 구성되고 조절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의 결론으로 도출된 것이 중립적 국가에 의한 ‘경쟁적 질서의 확립’이고, 이것의 표현이 ‘사회적 시장경제’인 것이다.

사회적 시장경제는 ‘사회적 정의’가 침해되지 않는 한에서 기업의 자유를 허용하는 경제체제 정도도 아닌, ‘기업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 한에서 사회적 정의를 용인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사회적 시장경제는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적 형태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독일식 신자유주의’ 그 자체로, 복지국가나 케인즈주의보다도 못한 매우 우익적 경제사상임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를 비판한다고 하는 김누리는 이러한 ‘독일식 신자유주의’를 우리가 따라야 할 대안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시키는 예방주사로써 라이피즘

이제까지 김누리의 라이피즘이 제시하는 능력주의를 배제하는 ‘교육혁명’과 야수 자본주의를 통제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해 비판했다. 김누리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많은 강연들에서 독일의 ‘백만 난민의 기적’(2015년 유럽 시리아 난민 문제 당시 독일이 100만 명이 넘는 난민들에게 국경을 개방한 것)을 독일의 ‘사회적 정의’와 ‘인간 존엄을 중시하는 시민 의식’의 사례로 언급한다. 하지만 이 또한 독일 자본가 계급이 독일의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의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우리는 저임금 부문의 수많은 일자리가 난민들에게 제공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부문은 자격증이 하나도 필요 없다. 그리고 독일이나 다른 유럽 국가의 노동력으로는 충분히 자리를 채울 수 없다는 게 분명하다. 노령 인구가 많고, 고용주가 임시고용을 선호할 뿐 아니라 일하기 힘든 조건이어서 이직률이 높기 때문이다. 난민들이 없었다면 이런 기업들이 어떻게 값싸고 일할 동기를 갖춘 신규 노동력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결론은 독일에 도착한 난민들의 상당 부분이 값싼 단순 노동력으로 독일 노동시장에 쉽게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김누리가 제시하는 독일 모델들은 자본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기는커녕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하고 지속시키는 것들일 뿐이다. 이는 라이피즘이 자본주의를 극복할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김누리의 주장은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아름다운 말들로 치장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것은 모두 독일식 자본주의, 그것도 독일에서 매우 우파적인 자본주의로 귀결된다. 이는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는 현실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가자,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듯하면서 실제로는 ‘도로 자본주의’로 민중의 불만을 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김누리의 라이피즘의 실제 역할이다.

이것은 또한 김누리가 라이피즘이 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훨씬 더 시의적이고,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다고 말하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한겨레신문에 실린 2020년 7월 5일자 글에서 그것을 다섯 가지의 근거를 들어 설명한다.


라이피즘은 전통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져 온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보다 훨씬 더 시의적이고, 강력한 호소력을 지닌 개념이다. 그 이유는 다섯 가지다. 첫째, 라이피즘은 자본주의의 ‘안티라이프’ 성격을 직격한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과 생존과 생명에 적대적인 체제임을 가장 확실하게 폭로한다. 둘째, 라이피즘은 이데올로기적 유산에서 자유롭다. 20세기를 각인해온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넘어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정파를 아우를 수 있다. 자본주의의 인간 소외에 맞서는 자율주의자든, 자본주의의 사회적 착취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자든, 자본주의의 자연 파괴에 저항하는 생태주의자든 모두 라이피스트의 우산 아래 모일 수 있다. 셋째, 라이피즘은 현대사회의 최대 현안이자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는 생태 문제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강조할 수 있다. 넷째, 라이피즘은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정위함으로써 근대 휴머니즘 전통의 현대적 적자임을 주장할 수 있다. 다섯째, 라이피즘은 자본주의가 파괴하는 삶, 생존, 생명의 영역을 총체적으로 겨눈다는 점에서 주로 사회적 착취와 불평등을 문제 삼는 사회주의보다 포괄적이고 진취적인 개념이다. 이상의 이유로 나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이념으로 라이피즘을 제안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근거들 역시 모두 잘못이다. 첫째 라이피즘이 겨냥하는 자본주의의 ‘안티라이프’ 성격이라는 것 자체가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어떠한 점이 문제인지를 흐리게 만든다. 둘째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고 모든 정파를 아우른다는 것은 사실 제대로 된 이념도, 사상도, 관점도 없다는 뜻이다. 확실한 이념적·사상적 관점을 가지고 투쟁하지 않으면서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고 떠드는 것은 듣기 좋을 말을 하는 것에 불과하고, 사실상 이념적・사상적으로 경박한 태도라 할 수밖에 없다. 셋째 오늘날 생태 문제의 근본적 원인은 자본주의이며, 그 책임은 자본가 계급에게 있다. 그런데 앞에서와 같이 자본주의를 제대로 극복할 수 없고 자본가 계급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라이피즘은 생태 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대안이 될 수 없다. 나아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천착해보면, 여기에서도 김누리의 결정적 역할이 드러난다. 그는 “자본주의를 극복할 새로운 이념”과 같은 그럴듯한 말을 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유포하여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인 사회주의 운동의 발전을 막고 있다. 이것 역시 자본주의 체제를 지속시키는 사상적 예방주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보’란 탈을 쓰고 실상은 자본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예방주사를 경계하지 않고, 심지어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서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 민중의 삶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고, 민중의 대안세력으로서 사회주의 세력이 성장하는 것 역시 지체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김누리의 주장을 아무런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유포하는 일부 진보세력들은 크게 반성해야 한다.

김누리가 나와서 이러한 주장을 유포하고 있는 것 자체는 그만큼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기일수록 이런 지배계급의 예방주사에 현혹되지 않는 제대로 된 사회주의 운동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자본주의를 극복할 분명하고 명확한 대안은 사회주의임을 당당히 외치며 투쟁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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