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February 22, 2026

임정빈 - 손민석 - 자본 이전의 세계 - 서평 + 서평평평

자본 이전의 세계 -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
손민석 지음 / 바오출판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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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에 공부하느라 난도질하면서 메모, 표시를 할 정도로 열심히 읽었다. 재미있는 독서 경험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책값 이상은 충분히 했다)



별점을 4개 주려다가 결말이 실망스러워서 3점을 주게 됐다모든 글은 저자의 배경과 관련있다고 생각하며 서평도 마찬가지라고 보기 때문에 관련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겠다손민석 씨는 나랑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매우 많이 다르다. 1991년생이라고 들었는데그렇다면 아마 나보다 한 학번 위일 거다. 10년 넘게 마르크스를 공부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손민석 씨가 다루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전들 다수도 내가 논문을 쓰면서 많이 다루었던 텍스트들이다나는 특히 석사논문을 쓸 때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원전들을 중심으로 비판적 문헌 검토를 진행했는데그때 당시의 텍스트들과 많은 부분에서 겹친다가족사유재산국가의 기원 텍스트에 대해 관심두는 부분도 정말 흡사해서 많이 놀랐다.

이상의 점들이 공통점이고 차이점들을 열거하자면 우선 정치적인 차이가 있다나는 공산주의자고 이것이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 사회적으로 내 정체성을 가늠하는 1차적인 규정이다이에 비하면 손민석 씨는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닌 듯하다손민석 씨는 자신이 우파로 전향하더라도 마르크스를 버릴 수가 없다고 하는데(그러면 우익 마르크스주의인가?), 그 입장 자체는 존중할 수 있지만 그 존중과 별개로 다른 사람들이 손민석 씨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인정하는 게 온당한지는 별개의 문제다마르크스와 완전히 동기화가 되었다는 손민석 씨는 이런 말을 하면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나는 손민석 씨의 그 입장 자체는 존중할 수 있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자신한테 마르크스주의자가 맞냐고 할 때 손민석 씨가 그것을 터무니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에 대해선 스스로 좀 더 자기객관화가 된 상태에서 그 상황을 조망해보는 게 어떨지 조심스레 말을 건네본다이 문단은 손민석 씨를 설득하기 위한 게 아니라 서평을 읽을 독자한테 하는 말이므로 참고삼아 하는 것이라는 점도 양해바란다.

자본 이전의 세계는 임금노예제를 넘어 임금농노제로 가는 방향을 제시하는데 나는 이 또한 의의는 있다고 본다다만 내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또한 얘기하자면 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이라면서 공산주의를 말하지 않고 임금농노제를 얘기하는가나는 이 지점에서 이 책을 읽지 않고 반공주의자들이 폄하하는 게 부당하며다른 한편에서 이 책이 체제에 그렇게 위협적이지도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사실 임금농노제 개념이 어휘상으로는 매우 새롭기는 하지만 개혁주의의 또 다른 이름 아닌가혹자의 비판대로 임금농노제와 자본주의가 결합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100%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그런데 무엇보다 마르크스는 임금 제도의 철폐를 주장한 사람 아닌가(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의의는 있다고 본다비판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런 사람도 있어야 하고 학문적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학문의 다양성과 발전은 밀접한 관계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만 더 첨언하면 누군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할 때 어디까지 마르크스주의자로 볼 것이냐는 정치적인 문제기도 하다학문적으로 마르크스주의는 150여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손민석 씨도 온당하게 그 안에 포함될 수 있다고 본다하지만 내가 학문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것과 정치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대표적으로 사민주의자가 마르크스를 아무리 인용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자냐 아니냐(강신준 교수 같은 경우), 이건 논쟁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그걸 손민석 씨가 인정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겠다면 더 해줄 말은 없다만 대략 3가지로 나뉠 것 같다정치적으로도 학문적으로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경우사민주의 경향(비공산주의)도 마르크스주의일 수 있다는 경우그리고 소수겠지만 정치적으로는 수용할 수 없지만 학문적으로는 수용할 수 있다는 나 같은 경우다정치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는 건 나로선 당연한데 안 그러면 어떻게 공산주의-레닌주의-혁명정당 노선을 유지하겠나학문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제나 나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며 이론적인 확장 가능성에 제약을 두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손민석 씨가 이 정도에도 분통이 터진다면 미안한 얘기지만 난 더 해줄 말이 없다그리고 이 분야에서 진지하게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사람은 공산주의자 아니면 거의 없다앞으로도 계속 억울한 감정을 갖고 살아갈 게 아니라면 좀 더 상황은 냉정하게 인식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 지점에서 내 별점이 왜 4점에서 3점으로 내려왔는지를 설명해야겠다마지막 장을 인용해보자.

 

이제 자본에게 남은 길은임금노예제적인 특질로부터 벗어나 생산자를 직접적으로 장악하지 않고 생산수단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장악하여 생산을 조직하는 새로운 생산조직 기제즉 임금농노제로 이행하는 것밖에 없다. ... 이제 자본제는 임금노예제를 임금농노제로 이행시킴으로써 대경영생산양식에 기초한 공동체적 소유를 고차원적으로 재현하는 조건을 형성해야 한다. ... 자본이 유통과정에서 생산과정으로의 침투를 반복하는 사회적 기제라면 그에 대한 저항은 유통과정이 아니라 자본이 가장 뒤늦게 장악하는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자의 자율성과 독립성의 확보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생산과정 내에서의 집단 노동에 기초한 집단경영의 성립달리 표현하면 경영하는 노동자의 형성에 기초하여 확복한 생산과정에서의 생산자의 독립성과 자립성이 자본의 침투를 제한하며 그것을 극복할 계기를 제공해줄 것이다지금의 논리적 분석에서는 이 이상 언급할 수가 없다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레닌의 글로 갈음하고자 한다. “‘혁명의 경험을 쌓는 것이 그것에 대해 쓰는 것보다 더 즐겁고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

자본 이전의 세계는 이렇게 끝난다. “자본에게 남은 길” 표현이 좀 그렇다그래도 좀 더 공정하게 말하면 자본을 ... 극복할 계기를 언급하고 있으니, ‘나도 혁명을 논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룩셈부르크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며 사회주의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비판이 이 문장들에도 적용되지 않을까물론 이 얘기에도 손민석 씨가 억울해할 수 있을텐데나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읽는 게 그렇게 이상한 일일까적어도 룩셈부르크는 그렇게 안 읽을 것 같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실망했다는 이야기를 계속하자면손민석 씨는 지금 레닌 같은 그런 혁명가가 아니다레닌은 진짜로 혁명을 하면서 체제를 만들어간 사람이고왜 글쟁이가 글쓰다가 마지막에 혁명하는 게 더 유익하다는 말로 끝내는 건가얼마나 대단한 활동을 해서 바쁘길래... 577쪽까지 읽은 독자니까 이 정도 불평은 말하겠다. ‘임금농노제를 논리적으로 도출한 건 좋은데 이게 구체적으로 뭔지 상이 잘 안 잡힌다문제는 손민석 씨 본인도 그래 보인다는 거다그리고 이런 모호함에 기반해서 손민석 씨 결론에 대해선 앞으로도 협동조합주의나 노사협조주의 같은 것이 아니냐는 식의 질문이 계속 제기될 것이다난 솔직히 뭔지 잘 모르겠고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자의 자율성과 독립성의 확보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 같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긴 책을 썼다는 것도 실망한 지점이다어쩌면 저자는 자본제 하에서의 투쟁 자체보다는 근대화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실망한 점을 얘기했으니 별점 4개를 주려 했을 정도로 좋았던 점도 얘기하자면 본원적 소유 개념은 정말 좋았다크게 인정한다생산수단만 조명한 게 아니라 생활수단에 대해 조명한 것도 좋았다인용문을 보니 확실히 인정해야겠다또 2차적 소유와 본원적 소유 간의 관계 설정도 괜찮다(아직 내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는데정말 괜찮은지 확신까진 없다). 봉건제와 농노제를 개념 구분한 것도 중요한 탈출구였다본원적 소유와 연관지어서 본원적 축적을 설명한 것도 크게 칭찬할 만한 부분이다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관계를 다루면서 역사 전개를 논리적으로 설명한 대목도 백미였다나머지 민사재판권 관련한 분석 등도 탁월했다내가 느끼기엔 이 책의 핵심 기여점들인데내가 자세히 설명하긴 그렇고 직접 읽어보고 느껴보기를 권한다다만 이 책의 각 시대 구분 개념이 페리 앤더슨 같은 학자들의 논의나 공납제 논의 등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가에 대해선 아직 유보적이다책 한 권 읽었으니 아직 생소해서 그럴 수도 있으니 이 점에 대해선 나도 차차 소화해가면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려 한다(다만 내 스스로는 아직 손민석 씨 논의를 내 논의에 어떻게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을지 잘 찾지 못했다). 나머지 내가 언급하지 않고 비판도 하지 않는 부분들은 대체로 동의한다고 보면 된다손민석 씨는 우리 사회의 보물 중 하나일 정도로 역량있는 지식인이다내가 다른 대목에서 아무리 비판을 하더라도 이 평가는 진심이다나는 원래 언제 어디서든 기본적으로 거짓말을 안()하고 완곡어법도 쓰지 않으며 긍정적인 의미로든 부정적인 의미로든 과장을 못한다(그럴 만한 사회성도 없다).

다음으로 손민석 씨는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는 모양이지만 기본적으로 학계에 진입하지 않고 대중성 있는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할 생각인 듯하다그렇다고 사회운동에 열심인 운동권도 현재는 아닌 듯해 보인다내가 가보지 않았고 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21세기 현재에 해당 방향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유의미성을 획득하고 족적을 남길지는 잘 모르겠다폄하하는 게 아니라 정말 잘 모르겠어서 하는 말이다나는 sns를 많이 하는 것도 귀찮아서 못하겠던데 참 양질의 글도 많이 올린다나는 사회학 박사를 최근에 마치고 수료생 시절부터 시간 강사를 하면서 생업을 하고 있다대학원에서 주로 공부한 건 비판적 실재론(과학철학이자 방법론이자 메타이론)이었다공부 배경을 밝히는 건 서평 내용에서도 관련 부분을 다룰 것이기 때문이다하여튼 이런 지점에서까지도 정말 다르다손민석 씨가 관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논문은 본인이 쓰고 싶으면 쓰는 거고(그런데 논문 쓸 거면 단정짓는 말투는 정말 고쳐야 한다나도 논문 문체가 익숙하지 않은 편이지만 학술적 글쓰기의 통상적 기준에 비춰볼 때 손민석 씨의 단정짓는 어투는 학계에서 수용되기 꽤 힘들 정도다연구소 등 연구 공동체에 관심이 있다면 인적 인프라를 연결해서 발표 자리 등을 제공할 용의도 있다.

손민석 씨가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는 건 내 짐작이지만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는 배경이 자리해있지 않나 싶다이 점도 나와는 정말 다른 부분인데 조선인들은 일본에게 근대화가 뒤처졌고 식민지화가 됐다는 식민지 콤플렉스 내지는 근대화 콤플렉스가 있다근대화가 늦었고 식민지가 됐다는 건 역사적 사실이다한반도의 지식인들에게 관련한 콤플렉스는 꽤 강력한 것이었다일반 대중들이라고 크게 다르겠나그런데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서구중심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국내의 대중들 상대로 서구 지식 장사를 하는 것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해결하며 출세할 수 있었다손민석 씨는 그런 식의 유럽중심주의와는 다르다손민석 씨가 마르크스를 익히고 아시아적(비유럽적생산양식 등에 천착하며 근대화의 아시아적(비유럽적경로에 관심을 두는 건 나름대로의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경향의 발로그 연장선상이라고 본다근대에 대한 숭배적인 근대주의도 있지 않나 싶다그래서 아시아도한국도 근대화적 경로가 있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다(많은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우파로 전향한 것도 그들이 사실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근대화를 갈망했었기 때문이다그러니 북한이 근대화를 잘 못했고따라서 나라를 잘 못 키웠고박정희가 산업화를 했으니 박정희를 따라가고 그런 식이다박정희에서 일본으로 바꿔도 말이 된다여기서 자세히 쓰지는 않겠지만 뉴라이트에 대한 내 생각이다그래서 손민석 씨가 뉴라이트 열전을 쓰면 어떤 내용을 쓸지내 생각과 얼마나 같거나 다를지 관심이 크다).

내 넘겨짚기기 때문에 아니면 말고식이지만 혹시 모르니 한번 생각해보기 바란다자신의 연구 관심이 어디에서 시작됐기에 마르크스주의를 밀고 있는지사회과학에서 근대 사회가 자본제임을 규명하고 그로써 큰 족적을 남긴 건 마르크스다따라서 좋든 싫든 근대화를 다룬다면 이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그 점에서는 베버조차 마르크스의 자장 아래 연구한 셈이다그런데 나는 애초부터 민족주의에도 관심이 없고 식민지화나 근대화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콤플렉스도 전혀 없다관심이 없다나는 그런 거를 진심으로 내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만큼 남들이나 주변 환경에 동화되는 사람이 아니다사실 요즘 세대들은 대부분 식민지ㆍ근대화 콤플렉스가 없다고 본다이미 선진국에서 살았는데 굳이그런 점에서 손민석 씨는 식민지-근대화 콤플렉스 지식인의 마지막 후예이자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한국의 자장 아래서 자신의 이채를 발하는 독특한 지식인이라는 생각이 든다그 안에서 고유한 매력 또한 발산할 수 있을 테다말 그대로 아니면 말고긴 한데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뭐 내가 틀렸다면 내가 어떻게 오독(오해)했는지를 손민석 씨가 열렬하게 설명해줄 텐데그걸 보고 나나 남들이 모두 납득할지는 잘 모르겠긴 하다하여튼 만약에 내 추측이 어느 정도 맞다면 나와 손민석이 다른 건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근대화 얘기를 좀 더 해보자많은 사람들이 근대화를 암묵적으로 좋은 것으로 전제한다여기에 대해 가장 크게 이견을 제기한 마르크스주의자는 내 생각에 아마도 채만수다채만수는 근대화를 좋다나쁘다의 가치 판단이 가능한 영역으로 보지 않는다근대화는 자본주의화고 자본주의화는 긍정적/부정적이라는 이분법적 판단이 아니라 변증법적 사고를 요하는 사회 현상이다또한 자본주의화가 굉장히 고통스러운 과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이는 역사적으로도 상당한 실례들이 있고 손민석 씨 본인도 본원적 축적을 설명하며 꽤 상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므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다다만 손민석 씨는 이를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화가 좋은가나쁜가 혹은 가치 판단이 가능한 영역인가 등에 대한 얘기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왜일까나는 여기에 목적론적 역사관이 있다고 본다(여기 대한 손민석 씨 입장이 sns에 있던데도중에 그걸 확인하고서 글을 계속 썼다그러니 끝까지 읽어보기 바란다).

이 대목에서 헤겔 철학의 영향이 짙게 드러나는데손민석 씨는 인류의 역사를 개인의 자유의 발전(전개-과정)으로 본다이것 자체가 헤겔식 사고와 매우 닮아있다마르크스주의에서는 헤겔주의와 반()헤겔주의가 지속적으로 대립해왔는데나는 후자에 속한다내가 비판적 실재론을 통해 정립한 입장은 마르크스는 헤겔과 대립되는 새로운 과학철학의 프로토타입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의 사회 이론을 개진할 때 당대의 최신 과학철학이기도 하였던 헤겔 철학의 용어를 빌려서 설명했다는 것이다이 입장은 매우 논쟁적인 사안이고 서평에서 해소할 수 있는 논제도 아니다비판적 실재론은 1970년대에 로이 바스카에 의해 제안되어서 현재는 주류 (사회)과학철학으로 자리매김했는데마르크스의 과학철학을 재해석하고 현대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서 출발했다여기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관심있는 분들은 관련 동향들을 알아보고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큰 지적 자극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내가 보기에 헤겔 철학의 한계점 그리고 마르크스 철학과 다른 점은 헤겔 철학에는 관계론이 부재하거나 거의 없다는 점이다쉽게 말하면 헤겔은 자꾸 내적 모순으로 설명하려고 한다그런데 관계론에 따르면 다르다관건은 내적 모순과 함께 외부의 기제가 함께 작동하는 양상을 포괄해 설명하는 것이다유럽에서 자본주의가 어떻게 발흥했는가를 설명할 때손민석도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을 언급한다그런데 이런 식의 사례를 손민석은 역사적’ 접근이라고 보고 논리적’ 접근과 비교하면서 역사적 접근이 논리적 접근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한다결국 논리적으로 따지면 내적 모순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건데 이것 자체가 헤겔주의의 특징이다(일례로상품-화폐-자본의 전개를 헤겔주의가 아닌 비판적 실재론 관점에 의해 논리적으로 구성한 논의로 https://www.youtube.com/watch?v=nP5gwykZxF8&t=753s 을 참고하라).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자생적으로 이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이론적 노력이 기울여져 왔는데대표적인 사례가 레닌과 트로츠키의 불균등-결합 발전 개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다만 레닌과 트로츠키도 당대의 단계론적 인식을 완전히 벗어난 적은 없는데 여기서 자세히 쓸 게 아니니 언급만 해둔다).

마르크스가 헤겔 철학을 뒤집었다는 건 그저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뒤집은 정도가 아니라 변증법적 방법 자체를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대표적으로 헤겔의 추상에서 구체로 전개하는 방식과 마르크스의 추상화 활용 방식을 비교해보자마르크스의 서술 방식은 무조건 추상에서 구체로 논지가 전개되지 않는다대표적으로 공장법에 관해서 얘기할 때 마르크스는 현실의 아주 구체적인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전개한다이게 학계에서는 헤겔주의자들이 미스터리로 흔히 지목하는 대표적인 부분이다그런데 비판적 실재론으로 해석하면 문제가 없다추상화로 포착한 기제를 잘 설명하려면 당연히 그 기제의 발현까지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자본론 곳곳에도 추상에서 구체라는 순서대로면 한참 나중에 나와야 할 것 같은 부분들이 언급되는 일이 부지기수다그런데 자본 이전의 세계 저자는 정말 추상에서 구체로만 가는 서술 방식을 고집한다다 읽어야 전체가 파악되고 한번 더 읽으면서 음미해야 잘 이해할 수 있는 구조다손민석 씨가 오해받는 이유 중 하나도 나는 이 서술 방식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각설하고 근대화로 돌아가서 나는 손민석 씨가 암묵적으로 근대화를 목적론적 역사 인식에 따른 전자본제 사회의 다음 단계로 설정함으로써 전자본제 인민들이 달성해야 할 목표처럼 다루고 있다고 본다하지만 전자본제 인민들이 자본제를 원했을까자본제가 뭔지도 몰랐을 거다그리고 그 과정이 고통스러운데 왜 해야 하나어느 나라가 먼저 자본제가 되어 제국주의적 침략을 하면 고통스럽기는 하겠지만그것과 자본제가 인민들의 역사적 목표처럼 설정되는 건 다른 문제다예컨대 원시인들은 농업 혁명을 원했을까? 1850년까지 농민이 원시인에 비해 건강수명영양행복 등 측면에서 더 열악했는데수천 년 후에는 후손들이 번성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농사를 지었을까다른 집단에 비해 농업이 도입되지 않아서 결국 농경으로 인구가 늘어난 사회에 의해 쫓겨났다면그게 농업이라는 목표를 이뤄야 할 이유가 될까이런 건 마치 외래종한테 침범당하기 싫었으면 토착종이 알아서 뿔도 잘 진화시켰어야지하는 얘기랑 다를 바가 없다. “이 땅에 근대화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이 서평을 쓰고 나서 손민석 씨의 최근 sns 글을 보니 아시아는 근대화하기 위해서 식민지화가 필연이었다고 하고 있다정말 근대화주의자 그 자체 아닌가)

다음은 한형식 씨가 마르크스 철학 연습 책에 쓴 일부 대목을 발췌한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목표가 역사 이전에 미리 존재하고인류 역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으로 공산주의를 향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생각은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관념론적 주장이다.” 여기서 공산주의를 자본제로 바꾸면 손민석 씨가 자본 이전의 세계에서 전개한 서술 방식과 무엇이 다를까내가 오독했을 수도 있다또 목적론적 역사관은 일종의 딱지처럼 작용하기도 하기 때문에 불편한 감정이 들 수 있는 부분인데나는 이 책이 목적론적 역사관을 전제하지 않고 있다고 여길 만한 결정적인 지점은 못 느꼈다자본제라는 역사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여러 경로가 있다는 얘기는 단선론적 역사관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뿐이지목적론적 역사관에 기반해서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역사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과 목적론적 역사관을 승인하는 것은 명백히 다른 얘기다.

진화론 얘기를 했으니 이걸로 비유하자면 진화론은 목적론이 아니다역사 법칙이 있다는 당연한 주장과 목적론도 당연히 다른 것이다법칙에 무슨 목적이 있나또한 여기서 목적이란 문자 그대로 목표 설정을 포함하는 것이다창조론은 명백하게 목적론이다진화론자는 보통 유물론자인데 유물론자도 목적론을 가질 수 있다. ‘자본 이전의 세계’ 저자가 목적론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걸까아니면 서술상의 뉘앙스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일까어떤 진화론자가 목적론자인지는 창조론과 달리 따져봐야 할 문제기 때문에 나는 내가 오독했을 여지도 열어두지만단순히 헤겔 변증법적인 서술상의 뉘앙스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 아닌 듯하다그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자신의 역사관이 목적론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방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여기까지 쓰고 저자의 sns를 보니 그냥 목적론과 진화론도 혼동하고 있고 역사 법칙과 목적론도 혼동하면서 그걸 헤겔 철학으로 옹호하고 있다역사의 의미를 운운하는데 의미는 인간이 부여하는 것이다실재하는 역사 (법칙)과 인간의 사유 속의 역사 (법칙)은 존재론적으로 구분되는데 저자는 이걸 섞고 있다.

역사의 의미를 찾는 것과 목적론적 역사관은 다른 것인데양자도 혼동하고 있다역사의 의미역사적 의의 이런 걸 찾는다고 해서 목적론을 승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이건 마치 유신론자들이 신이 없으면 이 세상의 의미가 없다인생의 의미도 없다 이러면서 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진보사관과 목적론적 역사관도 다른 것이다생산력 발전을 축으로 진보사관을 주장할 수 있다다시 진화론 얘기를 하면 인간의 출현에서 의의를 찾고인간이 자연을 변형시키는 특별한 동물이고 인류 문명에 의의를 둔다고 해서 진화론에 목적론적 함의를 부여해야 하나사이비 과학 중에 인간이 진화의 최종 형태(도착지)라고 보는 목적론을 품는 사람 중에는 인간의 유전자만 분석하면 모든 생물의 유전자를 알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실제로 있는 사이비 과학 주장이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손민석의 목적론에 대한 입장이나 역사관을 아주 형편없는 것으로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그런 태도도 위험하다비유하자면 비진화론이나 창조론보다 목적론이 가미된 진화론이 낫듯이역사에 법칙이 없다는 역사관 혹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세계관보다는 손민석 같은 입장이 더 나을 수 있다(참고로 마르크스의 진화론에 대한 관점도 현대 진화론에서 보면 비판 지점이 있다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나오는 내용이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를 위한 하나의 열쇠이다반대로 하등 동물의 종류에서 나타나는 고등 동물의 징후는그 고등 동물 자체가 이미 알려져 있을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 이런 비유가 나오는데 비유가 가리켰던 사회과학적 내용이 옳은 것과는 별개로 현대 진화론 관점에서 보면 이건 진화론에 대한 오해를 반영한다. 1.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한 게 아니라 원숭이와 공통 조상을 가진 것이다. 2. 사실 복잡한 동물보다 단순한 동물이복잡한 동물에 대한 해부학적 단서를 잘 준다예컨대 쥐를 통해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유추하는 실험을 하지역으로 인간을 통해 쥐를 파악하기는 어렵다그리고 다윈조차 알보다 나비가 고등하다는 등의 얘기를 했는데 현대 진화론은 알->애벌레->번데기->나비->알 같은 순환론적 형식을 빌려 다윈의 명제를 뒤집었다엥겔스도 자연변증법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부시맨은 선천적으로 수학을 잘 못한다고 뻘소리 한 적 있다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해당 문장들은 다 초고 상태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목적론은 오류다중력의 법칙이나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에 목적이 없듯이 역사 법칙에 목적론이 가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물론 내적 목적론(헤겔 식의 내적 목적론과 다르다)과 외적 목적론은 다르고 흔히 얘기하는 건 후자인데내적 목적론은 인간이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거기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다대부분의 목적론자들은 문제가 없는 내적 목적론과 문제가 있는 외적 목적론을 왔다갔다 한다이렇게까지 얘기해도 안 받아들이면 어쩔 수 없다유신론자들도 절대 입장 안 바뀌더라.

하여튼 이 정도의 입장 차이가 있으면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상태니 더 거론 안 하겠다독자들이 각자 알아서 판단하겠지그럼에도 손민석 씨가 입이 근질거리고 단순한 감상 등이 아닌 반론을 하고 싶다면 비판적 실재론을 읽고 공부해라거기 관련한 답들이 있다이런 거 말고도 내가 보기엔 일일이 거론하진 않겠지만 공부해보면 교정될 게 상당히 많다. ‘공부하고 오라는 식으로 기분 나쁘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내가 손민석 씨 책을 다 읽고(물론 한번 읽었다고 완벽히 파악할 수 있는 책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그만큼 깊이가 있다긴 서평을 쓰는 노력을 기울이듯이 손민석도 마찬가지의 일을 능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정도는 해야 어느 정도 상호간에 예의일 수 있으므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다그리고 진심으로 소득이 있는 독서 여정이 될 거다물론 용의만 있다면 나도 얼마든지 소스를 제공할 생각이 있다죽이는 비판적 실재론자들 알고 있다(헤겔 철학 자체야 손민석 씨가 더 잘 알테니 내가 상대를 너무 단순화해서 비판한다고 반론할 수는 있을 텐데손민석 씨 본인이 sns에서 비판적 실재론 잘 모른다고 밝혀놓고서 철학책 던지라고 한 걸 스스로 생각했으면 좋겠다철학책 던지라면서 헤겔은 또 왜 허구한날 얘기하나).

방법과 방법론 관해서도 저자는 방법과 방법론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sns 글을 보면서 그걸 더 확실하게 알았는데사실 방법과 방법론을 정교하게 구분하는 논의는 방법론을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면 하는 걸 거의 못 봤다. method와 methodology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방법에 대한 이론이 방법론이다양자를 혼동하는 것은 20세기 중반까지 풍미한 실증주의 입장의 결과다(아직도 연구 현장에서는 암묵적으로 실증주의를 전제한 채 진행되는 연구가 많지만 1960년대 이후 실증주의는 주류 과학철학에서 파산했다). 저자가 방법론 파트에서 설명하고 있는 방법론이 방법인가방법론인가내가 보기엔 저자는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을 것 같다저자의 방법은 기본적으로 문헌 검토다자동적 객체(실재하는 객체)도 거의 다루지 않고 다뤄질 때도 기존의 문헌에 나타난 게 반영되는 식이다따라서 타동적 객체(사유 속의 객체)를 논리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주되게 사용하며 그것을 상당히 치밀하게 전개한 노작이다다만 그에 따른 약점이라면 자동적 객체에 대한 설명이 약하다저자 스스로가 제한한 연구 범위뿐만 아니라 방법론과도 관련된 지점으로 보인다내가 어쩔 수 없이 과학철학 용어들을 남발했는데 관련해서 참고해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쓴 거고 이 얘긴 더 이상 안 하겠다(비슷한 사안인데 역사유물론과 역사 이론도 다른 것이다역사유물론은 유물론의 일종이다역사유물론이 옳다는 당연한 명제가 역사유물론의 이름 아래 행해진 역사 이론이 모두 옳다는 도그마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https://community.dbpia.co.kr/ko/article/209 참고).

사실 이 정도만 전체적인 얘기를 쓰고 나머지 지엽적인 비판 지점들을 정리한 후 서평을 끝내도 좋을텐데 손민석 씨가 요구하는 비평(비판)의 수준이 높으므로 내 연구 작업과 관련한 얘기를 하는 것으로 손민석 씨의 논의와 대비해보겠다손민석 씨는 많은 지점에서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는데나는 비판적 실재론에 따른 방법론적 전체주의(파시즘이랑 다른 논의니까 헷갈리는 사람 없기를)로 대비되며 또한 석사논문에서 전개한 사회학적 사회생물학 및 그에 기반한 마르크스 인구학이 내 연구 테마다. 19세기에는 인구학이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았고 마르크스도 경제학과 인구학의 구분없이 (정치)경제학이란 말로 맬서스 등도 다 엮어서 비판하고 있다경제학과 인구학의 분리 이후 인구학 분야는 마르크스주의 내에서 상대적으로 덜 탐구되었으나 마르크스 경제학만큼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으며 사회과학적으로도 기여할 수 있다는 게 내 입장이다그리고 손민석 씨는 자신의 부계제적 일부일처제가 중요한 개념이며 이 부분이 비판되어야 제대로 된 비판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니실제로 내 연구 작업에서 일부를 가져와 대립시켜 보겠다는 뜻이다.

우선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 개념에 대해서 간단하게 짚고 시작하면 가부장제는 사전적 의미로도 남성 연장자가 가족 내에서 우대받는 제도의 의미를 갖는다가부장제는 나이주의 차별을 포함한다는 의미에서 성차별과 다르다. 1970년대 이후 서구 페미니즘에서는 이 같은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자본 이전의 세계는 장자와 차자 얘기부터 시작해서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런 논의는 전혀 없고 일반론적인 가부장제 개념을 명확한 정의없이 재사용하고 있다적자서자장자차자 차별이 성선택과 자식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가족의 재생산 욕구로 설명이 되나혈연선택론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장자한테는 유전자가 더 많이 가나이건 저자가 전혀 설명하지 않은 것이다(내친김에 말하면 소유와 점유도 먼저 사전적 정의를 언급하고 나서 자기 얘기를 하면 좋을 텐데 자기 논리로만 설명하고 있다논의가 너무 독자적이다학문의 진보는 기존 논의에 추가해서 나아가는 게 기본이라는 점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소유권은 사용권수익권처분권을 포함해서 대상에 대한 총체적인 소유권을 지니며 점유권에서는 처분권이 제외되어 있다중층적 소유는 농노도 자식한테 대물림할 수 있었다는 점 등에서 처분권이 인정되며 자본주의적 소유의 총체적 소유권과는 대비된다저자가 더 잘 알겠지만 이런 논의가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기존 논의의 기본 전제가 되고 있다추가하면 소유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기도 하다는 것이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밝히는 내용이다사유지이므로 출입하지 말라는 얘기를 떠올리면 된다물론 저자야 나보다 훨씬 더 연구해서 풍부한 배경 지식을 통해 더 깊은 이해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계속 기본을 건너뛰는 게 책 전체에 걸쳐 있다이와 연관해서 자본은 자기 증식하는 가치라는 게 마르크스의 정의인데 왜 그건 언급하지 않고 에두르면서 사회적 기제 같은 긴 설명을 늘어놓을까가독성이 떨어지는 대목들이다).

일부일처제 개념도 별로 정교하게 사용하고 있지 않다내가 엥겔스의 가사국기를 좋아하면서도 불만인 점 중 하나가 엥겔스 당대에 정착된 일부일처제를 고대 가족에 대해서부터 쓰고 있다는 거다아내한테는 일부일처제지만 남편한테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란 식의 서술도 문제가 있다가족 제도는 그리고 결혼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독점 그리고 그를 위한 전방위적인 예속이 핵심이지 일부일처제가 아니다이따가 더 자세히 쓰겠지만 일부일처제는 근대적 현상이다그 전에는 여러 아내를 거느릴 능력이 있으면 다처인 거고 없으면 일처거나 혹은 처가 없는 거다일부일처제 용어를 무분별하게 쓰고 그걸 본받아서 부계제적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면 곤란하다(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성적 자유도 엥겔스는 미래 세대의 몫이라면서도 일부일처를 낭만화하면서 설명한다그냥 엥겔스도 당대 사회문화의 영향을 받은 거지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대목이라고 본다).

여기부터는 내 연구 작업에서 빌려온 대목을 상기한 사정에 따라 일부 풀어서 얘기해보려고 한다우선 나는 가부장제를 발생학적으로 신분제 사회에서의 지배 계급 내의 인구 관리 기법 중 하나라고 본다나는 전자본제 사회를 신분제 사회라고 보는 게 기본적 규정이라고 생각한다구체적으로는 노예제/농노제 등의 얘기를 할 수 있겠고 저자의 논의를 그런 식으로 활용할 수도 있겠으나 아직까지 나는 그런 논의가 필요 없었고 앞으로 어떻게 활용할지는 잘 모르겠다(서두에서 얘기한 게 그거다).

신분제든 자본제든 경제의 근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두고 보는 게 그 사회를 분석할 때의 1차적인 규정이다여기서부턴 잠깐 내가 수업할 때 쓰는 교재 내용(그래서 존댓말이다)을 복사 붙여넣기하고 적절히 추가하면서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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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근본 문제어떤 사회든지 사회적으로 필요한 총생산물이 있고그것을 생산하기 위한 총노동이 있다. (-> 생산관계)

 

예컨대 10만 명이 있다면 10만 명이 먹을 식량주거 등이 필요합니다이 필요는 어느 정도 유동적이지만 1만 명치의 식량만 필요하다거나, 1000만 명치의 식량이 필요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10만 명의 노동력을 통해 각각의 필요한 생산물들을 생산하고 분배해야 하죠즉 10만 명 중 4만 명은 10만 명이 먹을 식량을 만들고, 3만 명은 옷을 만들고, 3만 명은 집을 만들고 서로의 생산물을 분배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죠. 1명이 의식주 등을 다 만들고 혼자 알아서 살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그렇게 혼자서 자급자족하며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겠죠.

농업사회는 낮은 식량생산성 때문에 대부분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해야 합니다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있죠농업이 나라와 사회의 근본이라는 뜻입니다비단 식량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대부분의 인구가 농업(식량 생산)에 종사해야 하는 사회라면 농업의 중요성이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배 계급들은 그런 농민들을 착취하면서 여가를 즐깁니다대부분의 평민농민들은 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해뜰 때부터 해질 때가 허리가 굽어지도록 농사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지배 계급은 그러지 않아도 되죠농사 외의 다른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그런데 이 과정에서 지배 계급을 기생적이라고 무조건 욕할 수만은 없습니다이 지배 계급들은 과학예술철학기술정치 등을 발달시키는 일을 하게 되거든요즉 피지배 계급들이 지배 계급의 생활을 부양해주기 때문에지배 계급은 문명을 발달시키고 생산력의 발전을 도모하는 과정의 핵심적인 일을 수행할 수 있게 됩니다.

... 신분제의 성격을 말하자면 신분제는 경제의 근본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하는 전근대 계급 사회의 시스템이었습니다대대로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기 때문에 나름의 노하우도 발달시킬 수 있었죠. ...

지배 계급이 없으면 문명을 발달시킬 인구 집단이 없기 때문에지배 계급은 없어서는 안 됩니다그런데 지배 계급이 아예 없어서도 안 되지만지배 계급이 너무 많아서도 안 됩니다왜냐하면만약 어떤 신분제 사회가 평민은 만 명밖에 안 되고 귀족은 100만 명이나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그런 사회가 과연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당연히 무너질 겁니다참고로 프랑스 대혁명기 1신분(성직자)과 2신분(귀족)은 전체 인구의 1%대였다고 합니다이런 식이어야 사회가 유지됩니다만약 왕족이 너무 많아지면 백성들의 삶이 궁핍에 빠지겠죠이에 따라서 역성혁명이 일어나 새로운 왕조가 생겨나고새로운 소수의 왕족들로 재출발합니다고려와 조선 간의 관계조선이 고려 왕족을 몰살시킨 것도 사회과학적으로 본다면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의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성계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반란을 일으킨 건 아닐 수 있겠지만사회적으로는 이성계가 그런 일을 수행했던 겁니다실제로 고려는 태초부터 정략결혼을 주되게 활용하면서 생긴 너무 많은 왕족들로 인해 잦은 불안정을 겪었습니다저는 이성계의 학살에 가까운 몰살을 도덕적으로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사회과학적 입장에 따라 고려-조선 간의 관계 및 사회 변동을 해석하자면 이런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지배 계급이 너무 많아지지 않게 하려면 어떡해야 할까요우선 가장 기본적으로지배 계급이 자신의 특권을 자기 자식에게만 물려주는 것입니다. ... 이것이 씨족과 구분되며 씨족을 해체시킨 가족이 발생한 계기입니다물론 개인적으로 보면 자기 자식한테 재산을 물려주고 싶은 이기적 욕망의 발전이고 실제로도 그러하긴 하지만(방법론적 개인주의),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특권층이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하는 작업이 덩달아 수행됐던 것입니다(방법론적 전체주의즉 방법론적 전체주의는 개인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양자를 종합한다). 이렇게 개인적 차원을 벗어나서 사회 전체를 망라하는 관점이 바로 사회과학적인 시각입니다이외에도 신분제 사회는 지배 계급 내의 인구를 제한하는 인구관리기법을 발달시키게 됩니다.

 

1. 자식 금지성직자스님환관

 

지배 계급이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지배 계급의 인구를 제한하는 가장 원천적인 방법입니다역사적으로 천주교는 이 방법이 굉장히 오래 행해진 사례 중 하나에 속합니다성경에는 원래 성직자가 자식을 못 갖게 하는 교리가 없습니다그래서 성경을 믿는 다른 종파에서는예컨대 목사가 자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거죠성직자의 자식을 금지하는 교리는 1123년에 회의를 거쳐 만들어진 것입니다그 이유는 당시 성직자들이 자기 자식한테 부유한 교회를 물려주려고 인민들을 착취했기 때문이죠오늘날에도 한국의 대형 교회를 보면 목사들이 자기 자식한테 교회를 물려주는 경우가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곤 하죠그런 일들이 옛날에도 발생했던 겁니다이런 일이 지속되면 천주교를 믿는 사회는 오래 유지되기 어렵겠죠성직자 개개인은 자신이 신에게 더 충성하고 시간을 쓰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을 수 있겠지만개인의 그런 믿음과 별개로 사회적 차원에서는 인구가 통제되고 있었던 겁니다.

스님도 마찬가지죠오늘날 스님은 무소유해탈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과거에는 달랐습니다고려 시대에는 묘청의 난이라는 유명한 스님의 사례가 있죠이를 봐도 알 수 있듯 스님은 성직자처럼 지배 계급이기도 했습니다그런 점에서 천주교와 불교는 유사한 점들이 있죠이들 종교는 신분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지는 단골 집단이지만대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기가 어려운 사람들입니다적어도 경제학적으로 봤을 때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죠그렇지만 종교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위안을 주고집단을 통합하는 강력한 신화를 제공합니다또한 성직자와 스님은 교리를 통해 나름대로는 욕심을 통제하였고 다른 지배 계급들에게도 권하였습니다다만 이들은 부동산(不動産은 움직이지 않는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즉 토지와 건물에 대해서는 큰 욕심을 부렸죠그건 신분제 사회에서 주된 권력이 토지에서 나오고건물은 상징적 역할도 겸하기 때문입니다즉 성욕식욕부동산 외의 물욕은 강하게 작용할 경우 천주교와 불교의 생존에 악영향을 끼칩니다그러나 부동산만은 강하게 쥐면 쥘수록 통상적으로 천주교와 불교의 생존즉 자신들의 생존에 좋은 거죠특히 이 지점이 평민들의 삶과 모순적으로 대치되곤 합니다(저자는 가신들의 존재에 주목하던데 그것도 중요한 관점이라고는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종교는 체제를 안정화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대로인간은 왕이든 귀족이든 평민이든 선천적인 능력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설령 어떤 뛰어난 왕이 있다 해도 몇 세대를 거치면 그 자손은 평균적인 재능을 지닌 상태의 인간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그러니 왕과 귀족은 평민들과 질적으로 다르다는 온갖 신화가 만들어지고 종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입니다만약 그런 조작이 없다면 허구한 날 반란이 일어나서 나라가 너무 혼란스러워지겠죠한편 사회적 동물 중에는 개미벌처럼 거의 선천적으로 기능이 분화된 동물도 있습니다이들에게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고도 할 수 있죠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 같은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그에 비하면 인간은 굉장히 여러 형태의 사회가 성립될 수 있는상대적으로 자유도가 높은 사회적 동물이죠.

성직자스님과 달리 환관은 아예 물리적으로 거세를 해서 자식을 못 만들게 한 무지막지한 사례입니다여러분들께서는 아마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을 거세하는 이유는 왕의 소유인 후궁을 임신시킬까봐 왕이 질투해서라는 설명을 들어보셨을 겁니다그런데 이 설명이 틀렸다고까지는 말하기 어렵지만사회과학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너무 개인의 감정에 치중한 설명입니다(-> 방법론적 개인주의). 사회과학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만약 환관이 생식 능력이 있어 후궁을 임신시키면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왕족이 늘어나 버리죠왕족이 늘어나면 그 왕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문제그리고 환관이 자기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서 왕위 다툼을 벌이는 문제 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모두 사회적 문제의 소지가 되죠이런 문제들을 원천 봉쇄하는 방법이 바로 환관을 고자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2. 동성애 권유고대 그리스

 

고대 그리스아테네 같은 도시국가는 동성애를 찬양하는 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사실 동성애는 17세기까지 전세계 많은 지역에서 금기시되지 않고 만연했던 문화입니다그중에서도 고대 그리스는 아주 유명한 사례니 이를 중심으로 살펴 보겠습니다이들은 동성애를 얼마나 찬양했냐면 이성애보다 우위에 있는 것으로 여기곤 했습니다플라톤은 동성애를 가장 고귀한 사랑으로 서술하기도 했죠스승-제자가 동성애 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흔했으며 교육적인 의미와 연결되어 장려되기도 하였습니다그렇다면 고대 그리스는 왜 그렇게까지 동성애를 찬양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문제를 인구 조절 문제와 연관지어 설명했습니다(베벨도 여성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하며 이를 인정한다). 도시국가는 그 규모상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동성애를 권장한다는 것이죠무슨 말이냐 하면동성애는 임신ㆍ출산의 위험이 없다는 것입니다(하지만 결혼은 상속자를 구하기 위한 것이므로 남자와 여자가 한다동성혼 법제화 운동은 연애결혼결혼의 낭만화가 일어난 후에야 사회적 운동으로 대두되는 것이다). 권력을 쥐어진 지배 계급 남성의 성욕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인류 사회를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 성욕을 1번의 경우에서처럼 사회적으로 강력하게 금지하는 방법도 있지만성욕의 밸브를 다른 데로 돌려버리는 방법도 있습니다이성애에서 동성애로 말입니다.

...

 

3. 가부장제장자가 아닌 아들서자사생아(혼외자)를 차별

 

가부장제란 무엇일까요한자를 살펴보겠습니다家父長制(집 가), 父 (아버지 부), (어른 장/길 장), (제도 제)입니다여기서 은 연장자(年長者)의 장()과 같습니다한자어 풀이와 사전을 참고하면우선 가부장제란 남성 연장자가 가족 내에서 우대받는 제도”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정의내려 볼 수 있겠습니다장자상속맏아들 우선을 반영하는 기본적 정의입니다제가 이 절 제목에 썼듯이가부장제의 권력자인 아버지는 자기가 낳은 자식인데도 자식들 사이에 차별을 둡니다이것은 생물학ㆍ진화론으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습니다왜냐하면 맏아들이라고 해서 아버지의 유전자가 더 많이 담겨있고다른 자식들이라고 해서 덜 담겨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따라서 가부장제가 왜 각 자식들을 차별하는지그 이유를 찬찬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여자가 왕이 된다고 생각해봅시다그리고 남자 후궁들을 들인다고 생각해보죠당연한 얘기지만인간이 성욕이 강한 것은 (설혹 성차가 있다 하더라도기본 사항이기 떄문에 여왕이 남자 후궁들을 들인다는 가정은 비현실적인 것이 전혀 아닙니다그런데 여러 남자 후궁이 있는 상황에서 여왕이 임신했을 때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그런데 이게 신분제 사회에서는 굉장히 문제가 됩니다신분제 사회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아는 게 중요합니다설령 가부장적인 부계 사회라고 해도어머니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은 건 전혀 아닙니다처인지 첩인지양갓집 규수인지 등이 당연히 중요하죠신분제 사회는 그 사람의 신분(간단히 말하면 부모가 누구인지)을 통해 그 사람에게 어떤 자원을 얼만큼 할당할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여자는 임신ㆍ출산을 하니 자연히 자식의 어머니가 누군지 알 수 있으므로아버지와 어머니를 동시에 알기 위해선 남자가 여자를 성적으로 독점하는 제도결혼 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이와 달리 여왕이 남자 후궁들을 들인다면 누가 자식의 아버지인지 알 수 없어 후궁들 모두 외척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엥겔스가 가사국기에서 성차별이 지배계급 내에서 더 심하게 작동한다고 하는 거다)

일처다부제가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여자가 왕이 되기 어려운 이유는 여자가 선천적으로 무능해서가 아닙니다즉 여성이 지능이 떨어지거나감정적이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인 것이죠신분제 사회에서는 구조적으로 지배 계급 내일수록 여성을 차별합니다반대로 평민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평등했습니다균분상속이라고 하지요조선시대 후기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도 아들 딸 구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상속하는 경우가 평민들 사이에 많았습니다물론 지배 계급이 딸(여성)을 차별하니 그 영향을 받아서 차별하는 경우 등이 있었지만지배 계급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성과 남성이 평등했습니다.

 

② 장자가 아닌 아들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가부장제는 딸만 차별하지 않습니다장자가 아닌 아들도 차별하죠따라서 가부장제와 성차별은 동의어가 아닙니다장자가 아닌 아들을 차별하는 건 어떠한 의미로도 성차별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죠가부장제와 성차별은 교집합이 있을 뿐이지 동의어가 아닙니다이는 가부장제가 성차별을 포함한 더 큰 개념이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성차별에는 성소수자 차별도 포함되죠그런데 앞서 살펴본 고대 그리스의 사례처럼가부장제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않는 경우가 분명히 있었습니다그러니까 가부장제와 성차별은 교집합과 차집합이 있는 서로 다른 개념입니다.

오늘날에는 가부장제와 성차별을 혼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흔합니다그러나 이는 위에서 논증하였듯이 명백히 오류입니다왜 이런 혼동이 생겼을까요이는 서구 페미니즘의 영향이 큽니다제가 페미니즘을 까려는’ 게 아니라서구 사회와 우리 사회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가부장제를 영어로는 Patriarchy라고 합니다어원상 아버지가 다스리는 체제라고 할 수 있겠죠이렇게 보면 서구에서 Patriarchy을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체제’ 정도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그렇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또한 서구 사회는 대개 우리만큼 가족주의가 강하지 않고우리처럼 나이주의가 강력하게 작동하지 않습니다우리는 나이가 같으면 서로 잘 몰라도 친구라고 하고한 살만 차이가 나도 위아래가 나뉘잖아요다른 나라는 이런 경우가 거의 없고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나이주의가 가장 강한 나라입니다.

한국은 서로 가족이 아니어도 형누나언니오빠동생할머니할아버지삼촌이모처럼 유사가족주의적 호칭으로 서로를 부릅니다제 예전 친구가 저를 브라더라고 해서 얘는 왜 이렇게 나한테 친한 척을 하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는 원래부터 서로를 그런 용어로 부르고는 했습니다나이에 따른 차별은 원래 장자상속제의 영향입니다한국이 이처럼 극심한 나이주의를 겪는 걸 유교의 영향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흔한데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조선 시대는 상팔하팔(上八下八)이라고 하여 위아래로 8살까지는 친구라고 할 정도로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우리의 나이주의는 일제강점기의 산물입니다일제는 조선인을 천황의 서자쯤으로 취급하며 천황제 대가족주의를 이식했죠천황제 대가족주의란 사회 전체가 천황을 아버지로 하는 하나의 대가정이라는 의미입니다일제 통치의 편의성을 위해 도입된 것이죠조선인들 사이에 위계질서를 만들어 놓으면윗사람만 잘 통제해도 그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을 잘 통제해줄 것 아닙니까비슷한 이유로 동물의 경우에도 위계질서가 있는 동물이 인간의 가축으로 선택되곤 했습니다자유로웠던 아메리카 인디언도 근대 유럽의 가혹한 (인종주의적노예제에 적응하지 못하고(유럽에서 옮겨온 전염병에 면역이 없어서기도 했지만), 자꾸 죽고 나자빠지는 바람에 먼 아프리카 대륙에서 흑인 노예를 아메리카까지 데려왔다는 것 아닙니까비단 나이만이 아니라 군대의 짬밥’ 문화 등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일제가 심은 것입니다그것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남아 있으며현재는 일본보다도 더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이를 해소하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 가운데 하나입니다우리가 가진 언어 중에도 일본식 용어가 많은데예컨대 상속도 일본에서 이식된 용어입니다우리가 우리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일본 전래가 정말 많아요제가 빠른 생일(1월 3)이라서 나이가 한 살 차이인 사람들 사이에서 족보가 꼬인다는 얘기도 듣고 살았는데여기서 족보란 게 뭡니까이건 일제가 이식한 문화를 조선시대우리 전통의 것으로 착각했다는 방증이죠.

그렇다면 이런 한국의 가부장제와 서구의 Patriarchy’가 같을까요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서구 페미니즘의 기여가 없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명백히 사회상이 다른데우리 실정에 맞는 이론을 발전시키기보다 서구 페미니즘의 이론을 열심히 옮기고자 하면 그것은 오류입니다우리가 가부장적이라고 하면 그건 권위주의적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잖아요또한 우리나라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나이주의는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성이 다른 사람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우대합니다즉 여자도 나이가 많으면 누나고 ‘()윗사람입니다참고로 한 살만 나이가 차이나도 존비어(존댓말과 반말)가 갈리는 문화는 신분제의 유산이기도 합니다원래 존댓말은 신분이 높은 사람한테 하는 거고반말은 신분이 낮은 사람한테 하는 겁니다왕이 나이가 어려도 신하가 반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영어에 존댓말이 없다고 하는데영국에도 궁궐 용어로의 존댓말은 있었습니다신분제가 타파되면서 사라진 거죠이런 차이를 보면 한국은 위아래가 있는’, ()민주주의적인 요소가 많은 나라입니다. ‘넌 위아래도 없냐?’가 욕으로 쓰이잖습니까.

한국에서 성차별은 도전받은 적이 많지만나이주의는 공식적이고 전면적으로 도전받은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또 한국에는 재벌이라는 독특한 현상이 있지만(재벌은 영어에 상응하는 용어가 없어서 chaebol이라고 발음을 옮겨서 씁니다서구에는 그만한 직접 경영하는 가족주의적 대자본이 기본적으로 없습니다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서구의 이론을 그대로 가져와 우리나라 실정을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편협한 혹은 부족한 분석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그런 이론틀로는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저는 오히려 우리나라의 진지한 학자들의 분석이 우리나라 실정에 더 맞고 더 유의미할 수 있다고 봅니다.

과거 사회 얘기로 돌아가보죠유럽에는 프랑크 왕국이라는 국가가 있었습니다프랑크 왕국은 서로마가 멸망한 후 서유럽에 있었던 국가죠그런데 프랑크는 나라가 세 개로 쪼개져 각각 현재의 프랑스독일이탈리아가 되었습니다이렇게 쪼개진 이유는 원래 왕위를 장자상속하려고 했는데 다른 왕자들이 반발하며 세 개로 나뉘어진 것입니다그 결과 평민들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받게 되었죠역사적으로 평민들은 균분상속을 선호했지만평민들은 지배 계급이 안정적인 장자상속을 하는 걸 더 원했습니다왜 그랬을까요평민들이 차별주의자들이어서아니지요평민들은 알고 있는 겁니다왕위 같은 것이 안정적으로 장자상속이 되지 않으면 결국 자신들이 더 고생할 것이라는 사실을요.

 

③ 서자사생아(혼외자)

 

서자는 첩의 자식이지요현대 사회는 많은 곳이 일부일처제를 채택하지만 가부장제 사회는 기본적으로 일부다처제였습니다일부일처를 하는 가족조차 일부일처제여서 그렇다기보다는 처를 한 명밖에 못 구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인간의 성비는 남자가 조금 더 많이 태어나지만 거의 50대 50입니다그러므로 모든 남자가 여러 아내를 둘 수는 없는 법입니다가부장제 일부다처제 사회에서는 지배 계급을 중심으로 서자가 생깁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서자인 홍길동도 아버지가 대감(고위 관료)이죠그런데 홍길동의 어머니는 노비입니다그래서 홍길동은 엄밀히 따지면 그냥 서자도 아니고 얼자입니다얼자는 어머니가 천한 신분인 사람입니다홍길동전을 보면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호부호형)도 못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보며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눈시울을 붉혔을 법도 합니다그런 감수성은 굉장히 고귀한 감정이며 인간적인 것입니다그런데 사회과학은 그런 감수성에서 그치지 않습니다사회과학은 그에서 좀 더 나아갑니다.

서자를 차별하는 이유도 살펴봅니다우리나라 소설 홍길동전을 보면 얼자(노비인 첩의 자식)여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사연이 나옵니다이 소설의 이야기는 우리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슬픈 사연을 전해 주지요그런데 사회과학의 시선에서 보면그처럼 감수성 깊은 감상에서 그쳐선 안 됩니다물론 그런 감수성은 매우 고결하고 숭고한 것이지만사회과학은 그에서 좀 더 나아갑니다.

만약 홍길동 같은 사람도 양반댁 자제라면서 최고급 대우를 해주면백성들은 더욱 허리가 굽도록 그들을 부양해야 할 것입니다즉 지배 계급의 숫자를 소수로 제한하는 일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나라가 휘청거리게 되는 것입니다홍길동에겐 가족의 슬픔가족의 비극이지만일반 백성들에겐 그야말로 생존의 문제먹고사는 문제지요그렇다면 우리가 홍길동에게만 감정이입해서 서자 차별을 매도해야 할까요서자를 차별하는 것은 사실 전근대 사회의 낮은 생산성에서 기인하는 것이죠현대 사회와는 물질적 조건이 전혀 다릅니다앞에서 장자상속이 왜 정당화되었는지를 프랑크 왕국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는데그렇다면 서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의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일관적입니다사생아(혼외자)도 마찬가지의 논리를 적용할 수 있겠습니다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니 적절한 경제적 재산을 받기 어렵고, ‘문란한 여성의 자식이라는 비난을 받기 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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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에 있었던 내용들 군데군데 가져왔다여기서는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방법론적 전체주의가 드러나있고 성직자ㆍ스님이라는 종교 기제고자 및 여성의 임신ㆍ출산이라는 생물학적 기제도시국가라는 지리적 기제 등이 검토되고 있다다양한 층위의 기제들을 고려하면서 관계론적 설명을 시도하고또한 이것들을 1. 자식 금지, 2. 성욕의 경로 변경(동성애 권유), 3. 가부장제(자식 차별)로 분류화해 총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손민석의 부계제적 일부일부처제 개념은 전자본제 지배 계급의 인구 관리라는 중요한 대목이 설명되지 않는다생산자 개인의 발전 그리고 성선택 같은 납작한 말들이 있을 뿐이다주류 경제학의 논의를 따와서 장자상속제가 인적 자본을 계발했다는 얘기를 인용(나름 비판은 하지만 그 비판은 내가 다루는 것과는 다른 부분이다일단 인정하고 다른 부분에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게 손민석의 입장이다)한 손민석은 지배 계급일수록 장자상속제가 강력했던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내가 놓친 게 아니라면은 책에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다음으로 근대 사회인 자본제 사회를 보자이것도 굳이 내 논의를 가져오고 싶진 않았는데 손민석 본인이 하도 비판을 하려면 이런저런 내용들이 다 있어야 한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결과적으로 쓸데없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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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상품 생산이 주가 되는 사회+노동력의 상품화

 

(이건 마르크스가 공식처럼 자본론에 쓰고 있는 얘긴데자본주의 사회에 대해서 손민석 저자가 독자적인 분석을 전개하는 건 좋은데 왜 가장 기본인 이런 정의 자체는 간명하게 제시해주지 않을까? 후술할 가치 법칙도 마찬가지다한마디로 정리하지 않고 장황한 건 그만큼 개념을 더 잘 파악하고 있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상품 생산이 주가 되는 사회란 무엇일까요여러분주위를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아마 여러분 주위에 무엇이든 물건들이 보일 텐데그 물건들 대부분혹은 전부가 상품일 것입니다정확히 말하면 상품이었던 것이겠죠여러분이 입은 옷그것을 스스로 지으신 분이 있으십니까제가 감히 말씀드리자면아마 단 한 분도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이것이 전자본주의 사회와 다른 자본주의 사회의 풍경입니다우리는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시장에서 상품으로 구매하여 이용합니다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첫째 가는 규정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이를 가격표 시스템과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경제적 법칙을 통해 알아봅시다우선 연필 1개 만드는데 1시간이 들고 1천 원에 팔리며지우개 1개 만드는데 1시간이 들고 1천 원에 팔린다고 해보죠그런데 어떤 이유로든 갑자기 연필이 유행해서 연필의 수요가 늘어나는 것입니다여러분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계시겠죠수요가 증대하면 가격이 증대합니다그러니 연필의 가격이 늘어날 것입니다이에 따라 연필 1개 가격이 1천 2백 원 으로 늘었다고 해보죠.

이제 여러분이 상품 생산자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연필을 만들겠습니까지우개를 만들겠습니까지우개를 만들면 1시간에 1천 원인데 연필은 1시간에 1천 2백 원이니 당연히 연필을 만들 것입니다그러면 연필의 공급이 늘어나겠죠그럼 어떤 일이 발생합니까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연필의 가격이 내려갈 것입니다경제학 얘기라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저는 여기까지 단순한 예이긴 하지만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했습니다연필 가격은 어디까지 내려갈까요우리의 예시에서는 연필의 가격은 지우개의 가격과 같아질 때까지 내려갈 것입니다그래서 결국 연필을 1개 만드는데 들어간 1시간과 지우개를 만드는데 들어간 1시간은 동일한 가격을 표현하여 동일한 대가를 받게 되겠죠.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상품을 만드는데 들어간 노동(시간)이 상품 생산의 본원적 비용이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종교가 욕망을 통제하는 신분제 사회와 달리 욕망이 통제되긴 커녕 자극되고 수요가 시시때때로 변동하는데가격표 시스템은 그것에 대응하는 위와 같은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한 발 더 나아가가격표 시스템과 연관된 일물일가의 법칙을 알아보겠습니다.

 

일물일가의 법칙똑같은 상품은 똑같은 가격을 가진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똑같은 연필은 모두 같은 가격에 팔린다는 것입니다예컨대 우리의 예시에서처럼 1천 원에 팔립니다그렇지만 각각의 연필 생산자는 숙련도에 따라 연필 1개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노동시간이 저마다 다를 것입니다즉 어떤 사람은 연필을 빠른 시간 안에 잘 만들고어떤 사람은 평균 속도로 연필을 만들고어떤 사람은 숙련도가 떨어져 느린 속도로 연필을 만들겠죠구체적으로는 대부분의 사람이 1시간 걸린다면누구는 2시간누구는 30분 만에 만들 수도 있습니다그런데 연필 만드는데 시간이 얼마나 들었든 전체적으로는 평균 시간으로 환원됩니다연필 1개 가격은 1천 원이었는데 그 예시대로 보죠연필 1개 만드는 데에 2시간 걸리는 사람은 1시간에 500원 밖에 못 법니다. 30분 걸리는 사람은 1시간에 2천 원을 벌어갑니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작동하는 이유입니다이와 비교하면 신분제 사회는 기본적으로는 능력주의 사회가 아닙니다신분제 사회는 능력이 중요한 사회가 아니라 부모가 누군지가 중요한 사회죠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종놈 자식이면 종놈이고왕의 장자면 다음 왕이 될 수 있습니다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부모가 누군지는 중요하지만 신분제 사회만큼이나 극단적이지 않고가격표 시스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회 곳곳에까지 능력주의가 작동합니다이런 능력주의는 근대 사회에서 장애인이라는 범주가 만들어지고 장애인 차별이 만연해진 근본 원인이기도 합니다.

이 능력주의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 봅시다가격표 시스템은 가치 법칙이란 것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가치 법칙실제 노동시간이 평균 노동시간으로 전화

 

말이 좀 어렵지요쉽게 말하면 이런 것입니다연필 1개 만드는데 2시간 걸리는 사람이 지우개 1개는 30분 만에 만들 수도 있죠누구는 연필 만드는데 재능이 있고누구는 지우개 만드는데 재능이 있는 겁니다그럼 이 지우개 만드는데 재능 있는 사람은 지우개를 만드는 것이 돈을 벌기 좋겠죠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각자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을 선택해서 하게끔 유도됩니다제가 앞서 신분제가 경제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분업 시스템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가치 법칙이 경제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는 (분업시스템입니다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신분제 사회보다 생산력이 더 높은 거죠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끔 유도하니까요. ... 이 분업 시스템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신분제 사회와 달리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그건 반쪽자리 자유입니다여러분도 알다시피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해서 하기보다 돈을 잘 버는 일을 선택해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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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력의 상품화는 다들 잘 아는 얘기니 생략하겠다관건은 경제의 근본 문제로부터 출발해서 각 사회가 이걸 어떻게 해결하는지가 그 사회를 규정하는 핵심이라는 것이다이게 마르크스의 얘기인데 자본 이전의 세계 책에서는 그 핵심 주변을 계속 빙빙 돌고 있다아예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쉽고 명료한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이제 일부일처제와 같은 가족 얘기를 더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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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밀한 의미에서의 가부장제는 신분제 사회에서나 온전히 발휘될 수 있습니다일부다처제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 핵가족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요새 첩서자가 있나요물론 아직도 이슬람권 같은 곳에서는 있긴 있습니다만많은 곳에서 법적ㆍ제도적으로 일부일처제가 일부다처제를 밀어냈습니다이 절에서 차차 살펴보겠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 사회는 가부장제 사회가 아닙니다그렇지만 가부장제는 가부장적 문화라는 형태로 우리에게 유산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서자도 재벌가 등에서는 몰래 남아있어서 가끔 문제가 되긴 하지만 그조차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공식적인 일부다처제에 비할 바는 안 됩니다.

일부다처제는 낡고 후진 것이며 일부일처제는 진보적이고 평등하다는 인식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분명 적어도 일부 측면에서는 그런 면이 있습니다하지만 일부다처제에서 일부일처제로 이행한 것은 사람들이 착해져서’, ‘성도덕이 발달해서’ 그런 게 아닙니다역사를 그런 식으로 파악하는 것은 조야한 것입니다자본주의 사회만큼 성매매가 활발한 사회는 없었습니다재벌들의 성매매도 드러난 것도 있고 드러나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과거의 일부다처제보다 통상 성적으로 덜 복잡하다는 건 그다지 근거가 없을 것 같습니다피임이 발달해서 사생아는 적어졌을 수 있지만과거라면 처첩이 되었을 성적 파트너가 반복되는 일회성의 성매매 대가로 치환되었다는 게 저는 현상을 더 적절하게 설명하는 듯합니다지배 계급 남성의 성욕이 공식적인 결혼 제도가 아니라 비공식적인 성매매를 통해서 해소되는 것이지지배 계급 남성들이 금욕적이 된 게 아니겠죠물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어떤 페미니스트는 일부일처제보다 일부다처제가 여성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주장도 합니다결혼이 남성이 여성을 성적으로 독점하는 제도라고 하긴 했지만그래도 결혼은 여성이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잖아요그런데 한 명하고만 결혼을 하니첩이라는 형태로나마 신분 상승을 할 길이 사라지는 거죠그 한 명도 정략결혼이나 상위층끼리의 결혼일 가능성이 높겠죠이게 성적인 얘기고 민감한 얘기긴 하지만정말 기본적인 사실만 짚고 보자면 이런 얘기를 할 수는 있다는 겁니다사실 일부일처제가 올바른 성적 관계인 것처럼 여겨지는 문화 자체도 인류사에서 보면 극히 최근에 발생한 것이고한국은 더 그렇습니다제가 이런 얘기를 하면 충격을 받으실 분도 있겠지만그래도 사실은 사실입니다우리가 아는 성적 도덕 중에 강간 같은 성폭력을 제외하면 보편성을 띤 성도덕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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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가도 사람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는 순간이 옵니다그때가 오면 보통 자기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어하죠그런데 가부장제 일부다처제처럼 자식이 많으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현대 사회는 장자상속이 구조적으로 장려되는 사회가 아닙니다과거와 달리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었고 경제가 발달하면서 토지의 지위가 이중으로 낮아졌습니다즉 토지를 분할 상속한다고 해서 국토가 나뉘지 않고토지보다는 기계 같은 발달한 생산수단 등의 동산이 중요해졌습니다화폐도 동산(動産움직이는 재산)입니다자본가들은 더 많은 토지를 원한다기보다 근본적으로 더 많은 화폐(교환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며토지 획득도 화폐 추구의 수단입니다따라서 토지가 부차화되었기 때문에 한 명한테 재산(토지)을 몰아줘야 할 근거가 약해졌습니다.

토지는 분할하면 기능이 떨어지기 쉽지만(토지에 접근하는 도로의 문제 등도 있습니다), 돈은 분할해도 교환수단으로써 돈인 것은 동일합니다즉 장자가 아닌 자식들도 주요 재산인 동산(화폐 등)에 대한 자기 몫을 요구할 요인이 커지는 것입니다과거에는 주요 생산수단인 토지의 상속만 주로 중요했다면나머지는 다른 자식들에게 조금씩 주어도 좋았습니다나라(국토)는 당연히 제1왕자에게 줘야 하지만그렇다고 다른 자식들을 굶겨 죽일 필요는 없잖아요그런데 이제는 갈수록 상속 다툼에 모든 자식들이 동참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가부장제).

하지만 토지와는 사정이 달라도 돈 또한 다다익선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많은 돈은 적은 돈을 겸하며많은 돈을 추구하는 자본의 특성상 분할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죠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기보다, ‘자본의 입장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입니다그래서 피임을 중시하죠성매매할 때 피임하지 않으면 나중에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습니까처첩 제도 때와는 다른 거죠.

이처럼 장자상속에 대한 유인이 약해졌다면(한국에서 장자 등에게 더 많은 재산을 물려주던 법적 제도는 점차 약해지다가 1991년에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아들 딸 구별도 사라지고 있습니다어차피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건 20세기 초부터 발달한 혈액형 검사 및 현재의 정확도가 높은 친자 검사로 가능하고예전과 달리 남성의 근력 등 신체적인 강인함의 중요성도 떨어졌습니다발달한 도구가 그 중요성을 대신하고 있죠요즘에는 오히려 여성에게 강요된 사회성 때문에 여아를 더 원하는 현상도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물론 오랫동안 존재한 가부장적 문화까지 한번에 다 사라지지는 않습니다저는 구조적인 변화가 어떻게 진행됐으며 또 진행되고 있는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재벌가 내에서 여성 CEO도 나타났고앞으로는 재벌 그룹 자체를 여성이 대표하는 일도 나타날 수 있을 겁니다그 시기가 언제인지가 문제이며 반동적인 저항이 얼마나 강한지가 문제이지이런 경향들이 나타나는 것 자체는 부정하기 어렵습니다과거와 달리 교육받은 여성들의 여성 인권 운동도 물론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이 지배 계급의 가족에 관한 것이라면피지배 계급노동자 가족의 상에 관한 것은 약간 다릅니다물론 지배 계급의 가족관가족상은 당연히 피지배 계급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하위 계급은 상위 계급의 문화를 부러워하게 되고 모방하고자 함으로써문화적 상승감을 느끼고 싶어 하니까요.

앞서 제가 자본주의 사회의 분업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가치 법칙에 대해 말씀드린 걸 기억하실 것입니다노동자는 자기가 가장 잘하는 일을 선택해서 하게 됩니다물론 자기가 선호하는 직업을 선택하는 노동자도 있지만너무 그런 구체적인 부분까지는 일단 고려하지 말고(개인의 선호를 제가 일일이 파악할 방법도 없습니다), 추상적으로 봤을 때는 이론상 이런 가정을 하는 게 얼마든지 타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런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돈 잘 버는 일이겠죠이 돈 잘 버는 일이란 산업상의 구조에 따라 시시때때로 변합니다어떤 직업은 사라지기도 하고어떤 직업은 생겨나기도 하죠또 수요와 공급의 변동에 따라어떤 직업은 일시적이나마 돈을 잘 벌게 되고 어떤 직업은 경쟁이 심해져 돈을 잘 못 벌게끔 변화합니다이런 변동은 단순히 단기적이지만은 않고여러 사정으로 인해 장기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해당 직업의 진입장벽이 높을 수도 있고요.

아무튼 이런 직업의 이동성은 실제로 지역적 이동성을 동반할 수도 있습니다예컨대 임업은 나무가 있는 곳에 가서 하고수산업은 물이 있는 곳에 가서 해야죠계속 같은 회사에서 일하더라도 (지역적파견을 나가게도 됩니다따라서 현대 사회는 이동을 많이 해야 하죠헌법상 보장된 거주 이전의 자유라는 게 있는데이것은 일정 정도 이동이 제한된 신분제 사회를 부르주아 혁명이 타파하면서 적극적으로 보장되기 시작한 것입니다전자본주의적 지배 계급에 의해서 토지에 혹은 재산으로 속박된 노동력을 고용하기 위해 해방시킨 결과물 중 하나인 거죠미국 남부의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고 산업이 발달한 북부로 이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런 사례를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이것과 가족은 어떤 관계를 가질까요? 가족은 규모가 작으면 작을수록 이동에 유리합니다즉 이런 점에서 보면 핵가족 형태가 제일 좋은 것이죠부모ㆍ자식으로 이루어진 핵가족은 생물학적 재생산의 가장 기본 단위(작은 단위)일 뿐만 아니라지역적 이동을 하기에 좋습니다예를 들어 여러분 중에 부모님의 직업이 바뀌거나 파견이 되면서 덩달아 같이 이사를 하게 된 경험이 있는 분이 계실 겁니다그럴 때면 주위의 학교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지 않았나요혹은 이런 사례를 들어보신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그래서 부모님한테 나는 이사가기 싫다고 를 쓰신 분도 있을 겁니다바로 이런 것입니다가족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이런 지역적 이동이 힘들어집니다예를 들어 여러분이 자식이 있는 장성한 부모고노부모와 같이 살고 있다면이분들을 설득해서 데리고 이사가는 게 불편하지 않겠습니까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부담은 커지는 거죠자식이 장성하면 독립시키는 게 상식이 된 이유도 자본주의 사회와 연관이 있는 겁니다이 내용 자체는 가족사회학의 유명한 산업화’ 테제인데애초에 보수적인 기능주의 사회학에서 처음 제기되었으며 좌우를 크게 가리지 않고 유명한 테제입니다(물론 어딜 가나 있듯 학문적 논쟁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만그렇게까지 자세히 들어갈 필요는 없으니 논쟁 지점이 있다는 걸 언급만 해두겠습니다)[Elliot(1993)의 가족사회학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생물학적 재생산의 단위를 가장 작게 만들 수 있는 결혼 형태는 누가 뭐래도 일부일처제죠또한 과거에는 가족이 주로 생산 단위였는데(소농[농민가족), 그래서 어느 정도 가정 내에 농사를 위한 노동력이 필요하였습니다그렇지만 현재는 생산의 기본 단위가 기업이 되었죠이 측면에서 또한 가족의 규모가 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부일처제핵가족이 주된 가족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가족(가문)’, 가부장제는 과거에는 지배 계급에서 더 강력한 제도였지만현재는 피지배 계급의 노동력 재생산을 관리하는 데에서 더 원활하게 작동하고 있습니다왜냐면 우선 생산력이 발달하여 지배 계급의 인구를 자원 문제 때문에 제한해야 할 필요가 사라졌습니다사실 현대 사회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는 건 자원 부족 문제가 아니라 분배 문제 같은 것 때문입니다절대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것은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오히려 모든 사람이 여유롭게 살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은 발전했습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지배 계급의 인구를 관리하는데 집중하느라 전체 인구를 관리하는 건 뒷전이었습니다조선 시대 때도 인구 조사가 있었지만일부러 인구를 적게 조사하여 세금을 적게 거두는 게 선정(좋은 정치)’으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양반의 족보는 현대의 주민등록제도를 방불케 하죠그렇지만 귀한 가문이 아닌 이상 족보 같은 정도의 조사가 없었습니다현재는 모든 인구가 인구학과 통계학의 조사 대상이 됩니다그게 가능한지가 국가의 국력을 좌우하는 척도 중 하나기도 하죠사실 인구라는 사람을 숫자로 세는 개념 자체가 신분제 사회에서는 통용되기 어려웠던 개념입니다왜냐신분제 사회에서는 형식적으로 사람이 똑같을 수가 없잖아요귀족이랑 평민이 어떻게 같은 사람입니까신분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어떻게 똑같이 숫자로 세겠습니까감히그러니까 인구는 근대에 이르러서야 대두될 수 있었던 개념인 겁니다.


다른 한편 무한한 화폐 증식 추구를 위해 노동력이 중요해지죠이와 관련해 낙태는 재미있는 역사적 차이를 보여줍니다과거에예를 들어 조선 시대 때도 낙태죄가 있었을까요그런데 그건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낙태죄와는 다릅니다다른 사람을 폭행해서 낙태시킨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었고임신한 여성이 스스로 낙태(임신 중단)하는 것은 처벌하지 않았습니다세종실록에는 세종이 다른 사람을 낙태시킨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내용도 나옵니다오늘날과는 많이 다르죠자기낙태를 처벌하는 낙태죄 자체가 근대 형법의 산물입니다자기낙태는 원래 원시 부족부터 근대 이전까지 기본적으로는 처벌해야 할 범죄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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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측면에서 정리하면 가족은 엥겔스가 규정한 대로 1차로 사적 소유의 재생산 기제다만약 가족이 사회화되고 가사노동이 사회화된다면 가사노동을 분업과 협업을 할 수 있으므로 노동력 재생산 비용은 더 싸질 것이다(가사노동에도 노동력이 필요하고그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필요하므로 가사노동은 부불노동’, ‘공짜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적 소유의 근간이 의심받으므로 안 하는 거다토지 국유화가 자본주의에도 이롭지만 안 된다고 마르크스가 설명한 것과 비슷한 이유다그리고 이 가장 기본적인 가족의 규정 위에 자본주의적 일부일처제라는 규정이 추가된다작은 인원수의 규모로 가구가 분할되어 있으면 그만큼 가전 제품도 집집마다 많이 팔 수 있다또한 직장은 정서적 기능을 제공하지 않고 가족이 정서적 기능을 담당하도록 되면서 가장은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일을 하게 된다가족이 생산의 단위가 아니라 기업이 되면서 생기는 일이다이건 뭘 반박하려고 쓴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거다.

이로써 일부일처제로 역사 전반을 보는 게 왜 조야한지까지 설명했다근대화 관련한 얘기를 추가해보겠다근대화를 간단하게 얘기하면 자본주의화지만 전근대/근대화로 비교하면 전근대(신분제탈피가 근대화다즉 사회주의화도 근대화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로 해당 사례를 찾기는 어려우니 편의상 자본주의화라고 해도 일단은 무방하다고 생각된다내가 근대화를 이렇게 폭넓게 보는 건 마르크스주의가 근대를 비판하면서도 그 긍정성까지 포함하여 변증법적으로 사고하고마르크스가 근대의 아들이라고까지 불린 맥락 등을 반영하고자 해서다물론 더 세세히 얘기하면 원시 공산사회 부족이 근대화가 되는 것도 있겠지만 논지를 집중하기 위해 생략한다.


근대화는 1. 토지 소유에 기반한 신분제 철폐와 2. 소농(농민)의 노동자로의 전환두 가지 이뤄지는 것으로 성사된다전자의 대표적인 형태가 민주화후자의 대표적인 형상이 산업화다(추가로 2번을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게 농업혁명이다식량 생산 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있어야 산업상의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자유로운 노동자가 생기므로 농업생산성이 우선 발달해야 한다이것도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밝힌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어떤 방법으로 이뤄졌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이후 행로에 대한 경로의존성이 정해진다크게 세 가지 경로를 보면 다음과 같다고 생각한다.

1. 유럽흑사병으로 봉건제가 타격을 입었고 노동력이 귀해졌다프랑스 혁명 같은 신분제 타파 혁명도 일어났다인클로저는 소농 혹은 농민을 노동자로 만들었다(본원적 축적과 연관). 오늘날 유럽이 상대적으로 민주주의 풍토가 강하고 반권위주의적 문화가 더 큰 것은 혁명 같은 방법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2. 현실 사회주의사회주의화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본주의화로 귀결되었다토지에 대한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토지 소유에 기반한 신분제가 철폐된다농민의 노동자로의 전환은 집단농장국영농장 그리고 산업화로 이뤄졌다이 영향으로 국가주의적ㆍ권위주의적인 영향이 크게 나타난다.

3. 한국식민지화로 신분제에 대한 1차 타격이 일어났지만 제국주의 착취ㆍ수탈의 보조 형태로 전근대적 잔재가 이용된다토지의 유상몰수ㆍ유상분배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한 토지 보상의 유야무야로 신분제적 잔재가 많이 해소된다이후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 운동 등 산업화로 농민의 노동자로 전환이 일어난다한국의 근대화는 먼저 일본화였고그 이후 서구화였기 때문에 일제 잔재가 전통인 줄 아는 경우도 많다그리고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살아 있는 자들의 머리 위에 악몽처럼 짓누른다.”


러프하게만 얘기한 거지만 내가 근대화를 보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경로와 형태였으며 그로 인해 어떤 경로의존성이 생겼는지다. 관심 두는 부분이 저자랑 차이는 있을 텐데그렇다고 이건 진지하게 크게 대립시키려고 한 말은 아니다. sns에 비평하려면 근대근대화에 대해서도 자기 생각을 얘기해야 한다고 그러기에 써봤다손민석 씨 이쯤 되면 얼마나 많은 분량의 비평을 요구하신 건지 좀 아시겠죠이걸 다 해주려고 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정말 어떤 분이 혼냈다고 한 것처럼 독자들 입을 막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의견 갖고도 또 손민석 씨가 뭐라 할 테고 또 그것 갖고 내가 또 뭐라 할 거 생각하면 벌써 골치가 아프다.


참고로 마르크스는 자본론 서문에서 자신의 자본론 서평을 인용하며 각 시대(사회)마다 다른 인구 법칙을 가진다고 말한다이것과 원시 모계 사회 이후 부계제적 일부일처제가 전개돼왔다는 저자의 설명이 일치할까아닌 듯하다여기까지가 저자의 기본 논지에 대한 나의 핵심적인 반론이다더 할 이야기들도 많지만 서평은 내 연구 개진하는 곳이 아니니 이만하겠다나머지는 책 내용들 지엽적인 부분들에 대한 비판 남겨두겠다.

 

1. 상인자본을 화폐자본이라고 설명하는데 이게 맞는 걸까상인자본은 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으로 나뉘며 상품거래자본이 상업자본이 되고 화폐거래자본이 현대적 은행으로 발전한다자본론 2권에서 생산자본상품자본화폐자본을 얘기하고 있는데 전자본제니까 생산자본은 없다고 치고 그럼 상인자본과 고리대 자본이 있다는 게 마르크스의 설명인데고리대 자본은 화폐자본이겠지만 상인자본이 화폐자본인가적어도화폐자본만 있는 건가상품자본은 어디로 갔나저자가 마르크스의 어느 구절에서 발견해가지고 말하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는데마르크스가 말기에 쓴 자본론 2권이 가장 생산자본상품자본화폐자본 개념을 엄밀하게 전개하고 있다.

 

2. “자본주의적 생산이 평균이윤율을 매개로 하여 끊임없이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가격을 하락시키며 초과이윤의 획득을 꾀한다”(570-570)

특별잉여가치를 얘기하는 건데 이게 왜 생산가격인가? 

시장가격이 부문 내에서 작용하는 거고 생산가격이 부문 간에서 작용하는 것이며 두 개를 합쳐서 현실의 가격에 더 가까운 형태가 시장생산가격이다특별잉여가치를 얘기하는 거면 당연히 시장가격(개별가치-시장가치-시장가격여기서 더 다루진 않겠다)을 얘기해야지왜 엉뚱하게 생산가격을 얘기하고 있나부문 내에서 특출하게 생산성이 높으면 수취하는 특별잉여가치는 생산가격과 다르다생산가격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비율이 평균과 다른 자본 간에 평균 이윤율이 형성되는 것으로 부문 간을 의미한다(당연히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는 개념이므로 언급만 하겠다). 차라리 그냥 가격이라고 얘기하면 모든 사람들이 더 이해하기 쉬웠을텐데 그냥 자기가 자본론 읽고 공부했다고 자랑하려고 생산가격이라는 개념을 (잘못쓴 것 아닌가좋지 않은 글쓰기 습관이고 내친김에 언급하면 책 전체도 가독성이 떨어진다자본론의 지대편에서 저자가 혼동하기 쉬웠을 문장들이 나오기는 하는데 그건 맥락이 다르다절대지대 얘기 다음에 한 얘기인 데다가 특별잉여가치/차액지대가 다른 것이고마르크스 자신이 초고라 내용이 난잡하고생산가격이라고 써놓고 여기서의 생산가격은 사실 무엇무엇을 얘기한다이런 식으로 퉁치고 지나가기도 한다하지만 자본 간 가치 구성이 다른 데서 발생하는 생산가격은 분명하게 다른 건 저자가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기에 더 이상은 생략한다.

 

3. 월러스틴 논의를 인용하며 임금 상승을 얘기하는데 여기서 임금이 실질임금(상품량으로 환산한 임금)인가명목임금(화폐임금)인가? 마르크스가 상대적 잉여가치를 주장하며 하는 얘기가 소비재 생산성이 오르면 실질임금은 증가하지만 명목임금은 하락한다는 것이다즉 착취율은 올라가지만 실질임금은 올라가는 게 기본이라고 밝혔고 자본주의의 임금 동학은 실제 대체로 그런 방향대로 흘러갔다그리고 전형적인 임금 상승-이윤 압박설의 재탕을 하고 있는데 그건 이렇게 쉽게 할 얘기가 아니다실질임금을 보는 게 맞냐명목임금을 보는 게 맞냐를 두고 이윤율 저하설도 걸리고 오키쇼폴리 같은 경제학자들이 다 한마디씩 얹었고임금 상승-이윤(자본압박 이야기도 경제학적으로 큰 논쟁거리다얼마나 공부했어서 이렇게 간단히 처리하는지해당 쪽수들의 너무 짧은 이야기들로는 파악도 불가능하다독자들에게 괜한 오해만 야기하기 쉽다추가로 노동력 재생산 비용 전가하는 건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니다노동자에게 전가해서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올라가면결국 생계비->임금이 올라가는데그게 이윤이 줄어드는 거 아닌가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주는 것과 노동력 재생산 비용 전가를 혼동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데경제학적으로 전혀 엄밀하지 않은 것이다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주면 노동력 재생산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는다당장 손민석 본인도 전가한다고 하고서 가계의 재생산 비용도 상승하여 출산율이 급락”, “... 더 이상 장악할 노동력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하고 있다마지막으로 똑같이 월러스틴을 인용하며 임금수입 말고 다양한 수입 원천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도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채만수는 노동자들의 월급에 부가되는 이자주식 소득 같은 금융소득도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기 때문에 경제학적으로 임금이라고 포함시킨다계급 대 계급으로 보면 전체 필요노동 대 잉여노동이 구분되기 때문에 전자에 해당하면 임금이라는 것이다여기서도 손민석은 방법론적 전체주의와 대비되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빠져 있다. (이 얘기에 동의하든 말든 생각난 김에 첨언하자면채만수노사과연강성윤 이런 사람들 스탈린주의자들이라고 마냥 무시하지 말고 배울 건 배워라나도 트로츠키주의자지만 강성윤 자본론 강독만 10년 가까이 수백 번지금도 계속 듣고 있다지금 마르크스주의자 중에 학계 밖에서 연구로 살아남았고 어느 정도 인정받는 사람이 채만수 말고 있긴 하나손민석 씨가 따라갈 수 있을 만한 선례는 채만수 정도밖에 없다자기 책은 색안경끼고 보지 말고 읽고서 평가하라는 사람이 왜 자기는 잘 모르는 사람들 논의 쉽게 보고 폄하하나강성윤 서울대 강의 폐강돼도 되지 않냐고 한 거 보고 하는 소리다남한테 엄격하고 자기한테 관대한 태도이중잣대는 극복해야 한다.

 

4. 단순상품생산 개념 사용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원래는 단순상품유통이다자본론 본문에서 단순상품생산이 딱 한 번자본론 3권 3편 15장에 나오는데 그것도 사실은 엥겔스가 쓴 것이다무슨 착오가 있었는지 엥겔스가 단순상품유통을 단순상품생산으로 바꿔서 쓴 것인데 단순상품유통은 마르크스가 아직 (자본의생산과정도 들어가기 전에 쓴 개념으로이걸 아무 이유없이 바꿔서 써야 할 필요가 없다나아가 단순상품생산이든 단순상품유통이든 이걸 소상품생산과 혼동하는 것도 개념적으로는 착오가 있다고 생각된다손민석 저자는 소상품생산이라고 써야 할 것을 단순상품생산이라고 쓰고 있는데그에 대한 타당한 이유도 제시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넘버링된 이야기들 등에 대해선 손민석의 공부 배경이 나와 달라서 내가 모르는 뭔가를 쥐고 있을 가능성도 무시하지는 않지만일단은 그냥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파악 부족이라고 여겨진다.

 

마지막으로 사소한 잔소리 두 가지만 더 하겠다.

출판한 책에 오타가 너무 많다. 어느 정도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솔직히 이 정도로 심한 책을 별로 못 본 것 같다오타는 저자의 책임도 있지만 편집자의 책임도 있다오타는 희한한 게 저자는 자기 책임이라고 하고 편집자는 자기 책임이라고 하는 게 출판업계라는 곳의 생리 중 하나인데(정상적인 저자와 편집자라면), 사실 당연히 둘 다 책임이 있다오타는 지엽적이라면 지엽적인 거니 이 이상은 더 말하지 않겠다.

원전 인용을 왜 이렇게 옛날 번역 버전으로 했는지 의문이다. 자본론 1권의 김영민 역 1990이라니 이거 강신준 교수가 가명으로 낸 거 아닌가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주석으로 설명해주면 좋지 않았을까게다가 최근 버전도 있는데저자 본인은 독일어 원전도 읽는 모양인데 그래도 인용을 옛날 번역서로 하면 신뢰성이 떨어진다한 두 권이 이런 것도 아니고 전체적인 인용이 거의 다 옛날 번역본으로 보인다이것도 위 문제와 마찬가지로 이론서로서는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트집 잡는 걸로 생각하지 말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바란다나름 학술서로 냈을 텐데이런 식으로 책 쓰는 사람이 없다. 아마 본인이 옛날 번역본으로 구했고(헌책방에서?) 그게 익숙해서 했을 텐데어느 정도는 도서관을 이용하는 발품을 팔면 좋지 않았을까?

 

이상이다서평을 길게 썼는데 솔직히 이렇게 공을 들일 만한 일도 아니었다. 원고료도 안 나오는데... 그렇다고 본격적인 학술적 글쓰기를 한 건 아니라 분량 말고는 노력 낭비하지 않았으니 뭐내가 쓴소리한 부분들에 대해선 손민석 씨가 기분 상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을 들인 서평은 옳든 그르든 결국 저자에 대한 응원의 마음에서 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좋은 책 쓰고연구 잘 해나가시기 바란다.



fpdlakstp 2026-02-22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긴 글에 감사드리며 개인 SNS에 관련된 글을 적었습니다. 답변이 되었기를 바라며 임정빈씨도 좋은 연구 계속 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https://www.facebook.com/sonminseog.23629/posts/pfbid05fUEyvkhKRHGNmf4w6m9cQcrr1KUo34tGr4CtR4ZmsMqYRb9oSZ4HRFVUzpDw5Mrl

마님 2026-02-22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손민석님이네 감사합니다!!

마님 2026-02-22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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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답변이 되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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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이전의 세계>에 관한 리뷰글이 알라딘에 하나 올라왔는데 누가 썼는지 알겠다. 임정빈씨가 쓴 것 같은데 공들여 썼다는 건 알겠다. 감사하다. 진심이다. 많은 노력과 시간을 들이신 것 같다. 그정도로 공을 들였으니 저자로서는 감사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아마 지금도 내 SNS 계정을 보고 계실테니 말씀드리자면.. 오해하시는 듯한데 나는 이런 식의 리뷰를 원한 적이 없다.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리뷰와는 다르다. 책이 아니라 저자에 관한 내용이 분량상 절반을 넘는 서평/리뷰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임정빈씨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겠지만 불필요한 내용들이다. 공들여 써주셨는데 답변해야 할지 망설였던 건 이런 이유에서다.

1.
 책에 관한 지적도 오해의 여지가 많은데 먼저 방법론에 관한 것부터 따져보자. 방법과 방법론을 혼동하고 있다는 지적은 웃어넘기겠다. 임정빈씨의 전공을 사회학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는 건.. 나로서는 도통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역사서술에 있어 '개인'을 중시한다는 게 곧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채택한다는 걸 의미하지 않는데, 그리 오해하지 않았다면 쓸 수 없는 표현이다. 임정빈씨가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관해 설명한 부분을 보면 이런 내 '오해'는 더욱 강화된다. 
 예컨대 "여러분들께서는 아마 궁궐에서 일하는 환관을 거세하는 이유는 왕의 소유인 후궁을 임신시킬까봐, 왕이 '질투해서'라는 설명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 사회과학적인 설명이라기보다는 너무 개인의 감정에 치중한 설명입니다(->방법론적 개인주의)"라고 한다. 왕이 질투했다는 감정으로 설명했으니 방법론적 개인주의라는 것인데, 바로 뒤에서 "환관이 자기 자식을 왕으로 만들고 싶어서 왕위 다툼을 벌이는 문제 등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임정빈씨 본인의 분류를 따르자면 방법론적 개인주의가 아닌가? 방법론적 개인주의는 막스 베버의 사회학, 인간형 등에 관한 분석을 설명하는데 주로 사용되는 개념이지, 연구자가 자의적으로 이것은 개인의 감정이고 저것은 아니고, 같은 걸 하는데 사용하는 개념이 아니다. 레이먼 부동 등의 분류에 불만을 느끼고 있어 더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또한 이 책은 "추상에서 구체로"의 방식을 취하고 있지 않다. 내가 이해하기에 변증법의 핵심은 원환(圓環)에 있다. 쉽게 말하자면 추상에서 구체로의 방향과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방향, 달리 표현하자면 상향법과 하향법이 교차하는 방식을 취하며 그 자신의 논리적 전개를 위한 재료를 스스로 산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개념의 전제조건을 개념의 자기전개의 결과로 산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상향법과 하향법의 교차를 책 전체에 걸쳐 실현하고 있다는 데 특질이 있다. 
 예컨대 책의 1부의 전개를 임정빈씨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방식을 취한 것으로 여기는 듯하지만, 이는 '추상', '구체' 등의 의미를 오인한 것으로 이 책의 1부는 반대로 하향법, 즉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전개방식을 취하고 있다. 물론 책 전체에 걸쳐 상향법과 하향법이 교차하면서 전개를 이뤄내고 있지만, 크게 보아 1부는 '구체에서 추상으로'를, 2부는 반대로 '추상에서 구체로'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1부에서 습득한 개념들이 2부에서 전개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해가 있는 듯하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추상적인 걸 다루는 걸 '구체에서 추상으로'의 하향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임정빈씨도 공장법 운운하며 공장법을 분석하는 '구체적'인 내용이 여기서 왜 나오는지가 "헤겔주의자"에게 "미스터리"로 지목된다고 하는데 전혀 미스터리가 아니다. 이는 변증법을 분석틀로 사용하는 게 쉽지 않아 생기는 오해로, 이 책은 방법론적 논의에 있어서는 미타 세키스케(見田石介)의 <마르크스의 방법론 연구>를 직접적인 비판대상으로 상정하고 있다. 나카무라 사토루, 시바하라 다쿠지 등의 일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미타 세키스케 등의 정통파 해석에 의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변증법을 방법론으로 다룬 글을 내고 싶은데 그때가 되면 오해가 많이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2. 
 나머지 내용이나 나머지 지엽적인 1, 2, 3, 4에 관해서는 딱히 반론하거나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장자상속제에 관해 어떻게 설명할지에 관해 묻는데, 그건 방법론에 관한 오해에서 나온 지적으로, 추상과 구체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있는 주장이다. 장자상속제, 균분상속제 등의 상속제도에 관한 분석은 이 책의 논의를 근거로 하여 보다 구체적인 역사이론을 산출할 때 이뤄져야 한다. 이 책의 기본적인 입장은, 상속관계로서의 부계제가 보편화되었다는 정도의 추상적인 개념규정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부계제의 구체적인 존재양태의 차이를 2부의 노예제, 농노제 등을 다루며 언급하기는 하지만(예컨대 아시아적 사회에서는 부계제 가족공동체의 확대재생산, 일종의 대경영화, 이라는 방향을 취한다고 한다든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기 위해서는 자연적 조건, 천수농업인지 관개농업인지, 농법의 형태 등의 다양한 논의들을 추가해야 한다. 당장 부계제적 일부일처제에 입각한 가족공동체는 고려왕조에서조차 보편화되지 않았다. 고려왕조 당시 한국의 상속제는 부계제가 아니라 양계제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책의 이론이 거기에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부계제적 가족공동체, 즉 소경영과 그에 기초한 전제국가로의 전환이 한국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달리 표현하자면 한국사의 특수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분석틀이 필요하다. 그래야 미야지마 히로시 등의 소농사회론이 지니는 의미, 한계 등도 제대로 논의할 수 있다. 이 모든 것과 별개로 말해지지 않았다는 걸 이유로 책이 비판받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또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연구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 선입견에 따른 판단이다.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연구자는, 아니 본래적으로 모든 인간은 자기만의 독특한 경험세계에 근거하여 세계를 인식하고 타인과 상호작용한다. 연구자는 그러한 상호작용을 자신만의 경험세계에 매몰되지 않고 좀더 정치한 언어, 정돈된 서사로써 이뤄낼 뿐이다. 자기만의 고유한 인식틀로써 세상을 대하고 타인과 상호작용하기에 거기에는 일정한 정도의 간극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연구자로서의 역량이란 그러한 간극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 간극을 줄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상대의 논리체계에 동화되어 논리전개를 따라가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논리체계에 의거하여 그 내적 전개를 감각하며 자신의 선입견이 깨지는 경험을 반복할 때 연구자는 상대방이, 세계가 지닌 그 내적 고유함을 수용하며 자신의 한계를 끊임없이 극복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며 "트로츠키주의자"로서의 임정빈씨가 과연 그러한 작업을 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지니고 있다.
 가령 지적 3의 경우에서 월러스틴의 논의와 내 주장을 "전형적인 임금상승 - 이윤 압박설"로 해석하는 건 내 주장에 대한 오해 이전에, 월러스틴의 논의가 지닌 복합성을 사상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월러스틴이 이윤압박에 따른 자본주의의 자동붕괴설을 주장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내 해석으로는 그렇지 않다. 월러스틴은 임금상승에 따른 이윤압박으로 자본주의의 자동적인 종말을 논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 속에서 무력을 동원해 미국 자본주의에 보다 적합한 형태로, 세계를 수탈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예견하고 있다. 트럼프주의의 등장 이후에도 비슷한 주장을 했지만, 그러한 지적을 <자유주의 이후> 등의 오래 전의 저작에서 행했다는 데서 대가의 역량을 엿보고는 한다. 이런 내 해석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월러스틴의 주장이 임금상승에 따른 이윤압박을 주장하고 있다는 오해는 해소하기를 바란다. 나는 이것이 "트로츠키주의자"로서의 임정빈씨의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 관한 이해가 선입견으로 작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강하게 품고 있다. 
 내가 결론장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임금상승에 따른 이윤압박과 그로 인한 자본주의의 종말, 내가 임금노예제라고 하는 발전단계의 종언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수입의 상당 부분을 자본에 의존하는 경우가 점차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저발전하고 있을 때는 소경영의 수입원이 다양하게 존재했기에, 레닌 식으로 표현하자면 다양한 '우클라드'가 존재했기에, 달리 표현하자면 자본주의적 경영 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경영이 존재했기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구태여 노동력 재생산 비용의 "모든" 부분을 책임질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적인 예로 농촌에서의 자급자족으로 가족을 포함한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의 상당부분을 충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월러스틴이 말하는 반(半)프롤레타리아트 가계에 대한 자본의 '선호'는 바로 이런 지점에서 성립한다. 아무튼 노동력의 존재양태가 온전히 자본주의적 임노동의 형태로 재편되지 않은 상태, 즉 자본주의의 발전의 정도가 낮은 수준에서는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의 상당수를 자본이 책임질 수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형식적 포섭을 넘어 실질적 포섭으로 진행된 상황에서는 임노동자들이 생산수단으로부터, 그리고 생활수단으로부터도 분리되어 있기에 어떻게든 자본주의적 관계 내에서 이들의 재생산 비용을 해결하게 해야 한다. 
 대체로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이행한다는 건 자본이 노동력 재생산에 있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진다는 걸 의미하고, 월러스틴은 이를 가계의 '프롤레타리아트화'라고 표현한다. 임금상승이 실질임금을 의미하는지, 명목임금을 의미하는지 같은 논의가 아니라 경험적 현실에 관한 분석이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루이스 전환점'도 사실 이런 맥락에서 논의되는 것이다. 이를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말하는 자동붕괴론과 연결시켜 임금상승에 따른 이윤압박설인지 여부로 판별하는 건 다음의 구절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1960년 66.4%를 차지했던 전 세계 농촌인구의 비중은 이미 2007년을 기점으로 비농촌인구에게 역전되었으며 2024년 42%까지 감소했다." 임정빈씨는 이 구절을 임금상승에 따른 이윤압박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는가? 연구자의 지식이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생생한 사례를, 그리하여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실례를 임정빈씨의 글에서 발견하고 있다면 나의 과한 자기방어일까. 그리 생각되지는 않는다. 

3. 
 그리고 이런 것들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실패의 원인이었을 것이다. 내가 "딱지 붙이기"라 말하는 것들이 이 책을 진심으로 이해하려 노력한 임정빈씨의 글에서도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의 분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저자에 관한 평들 중 상당수가 그런 방식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내가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등이 아니라고 비난받는 것에 대해 딱히 억울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의 자기규정이 한국사회에서 그리 좋은 의미를 지닌 것 같지는 않은데, 임정빈씨나 나를 비난하는 이들은 그리 생각하는 것 같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어떤 스테레오 타입이 존재하고, 그것에 어긋나면 마르크스주의자, 공산주의자 등이 아니라는 비난은 내게는 별 의미가 없다. 본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자유고, 내게 증명을 요하는 게 귀찮을 뿐이다. 임정빈씨의 글도 그런 맥락에 놓여 있다. 
 예컨대 임정빈씨는 "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이라면서 공산주의를 말하지 않고 임금농노제를 얘기하는가? 나는 이 지점에서 이 책을 읽지 않고 반공주의자들이 폄하하는 게 부당하며, 다른 한편에서 이 책이 체제에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한다. 부당하게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마르크스도 말하지 않은 공산주의를 나보고 말하라 하는 건 과한 요구다. 공산주의에 관해 언급해야만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기준을 내세운다면 마르크스조차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닐 것이다. 물론 <자본 이전의 세계>에 공산제 사회에 관한 언급이 간간이 나오기는 하지만 아주 추상적인 맥락에서만 그러하다. 나는 임정빈씨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체제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해 그정도로 확고한 역사상(像)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아래의 글을 읽을 필요없이 나를 지도해주기를 바란다. 
 이 문제를 구태여 언급하는 건 "임금농노제" 개념에 관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는 걸로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임정빈씨는 공산주의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왜 임금농노제를 언급하는지를 지적하며 "난 솔직히 뭔지 잘 모르겠고 ‘생산과정에서의 노동자의 자율성과 독립성의 확보에서부터 이뤄져야 한다.’ 같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긴 책을 썼다는 것도 실망한 지점이다. 어쩌면 저자는 자본제 하에서의 투쟁 자체보다는 근대화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말한다. 사실 이렇게 말할 것이라면 신현준 교수처럼 구태여 오늘날에 왜 노예제, 농노제 같은 얘기를 하냐고 물어보는 게 더 솔직하지 않을까? 내가 이 책에서 제기한 역사법칙은 ‘노동→경영→점유→소유’이다. 독립적 노동을 행하면 생산과정에서의 경영을 행하게 되고, 생산과정에서의 경영을 하면 생산과정 '내'에서의 생산수단에 대한 '점유'관계가 성립하며, 생산과정 내에서의 점유관계가 생산과정 "외(外)"로까지 넘어가게 되면 소유관계 전반에 변혁이 일어난다는 게 이 책의 기본적인 테제이자 논지이다. 
 이 책은 이런 입장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보편화한 집단적 노동이, 어떻게 독립성을 획득하며 집단적 경영으로, 집단적 경영이 다시금 생산과정 내에서의 생산수단에 관한 점유로, 집단적 점유가 집단적 소유로 이행하며 사적 소유 전반에 변혁을 가져올지를 제시해보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미래에 어떤 사회가 도래할지에 대해 알 수 없다는 데서 나타난다. 이걸 설명하려고 하다보니 가라타니 고진처럼 종교성에 관한 탐구로 나아가거나 아니면 반대로 반공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는 기독교적 종말론의 일파, 라는 식의 비판을 가하는 것이겠다. '과학적'으로, 과학적이라는 표현이 한국에서 이상하게 해석되니 본래 독일어에 적합한 "학적인" 분석을 통해 공산제 사회로의 이행의 필연성을 설명하고 또 설득할 수 있을까. 임정빈씨는 공산주의에 관한 뚜렷한 역사상을 지니고 있어 내게 왜 공산주의에 관해 언급하지 않냐고, 너는 공산주의자 혹은 마르크스주의자 아니지 않냐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럴만한 실증적/논리적 근거들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에 내가 취한 전략(?)은 전자본제 사회의 전개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을 체계화하여 보여줌으로써, 적어도 이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을 상정한 게 아니라 그들의 이론체계 내에서는 나름대로 갖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고자 했다. 이를 임정빈씨는 헤겔주의적 목적론이라 간단하게 기각할지 모르겠지만, 공산주의라는 대안적 인식 없이 마르크스주의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 임정빈씨가 논하는 "공산주의-레닌주의-혁명정당 노선"이 어떻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책의 2부에서는 ‘노동→경영→점유→소유’의 순서로 전개되는 역사발전의 법칙에 따라 생산자가 점차로 객체(노예)에서 주체(농노)로 전환되는 과정과 그에 따라 타인의 노동에 기초한 소유로서의 예속신분제적 관계가 어떻게 해체되는지를 반복해서 보여주고자 했다. 생산자의 소경영자로의 전화, 소경영자의 개인적 노동에 기초한 개인적 점유 및 소유가 어떻게 중층적 소유구조를 해체시키는지를 다루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서도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미 집단적 노동이 성립했고, 화이트칼라 계층과 같이 집단적 관리를 행할 수 있는, 대기업 내부의 관료제 집단이 등장함으로써 집단적 경영으로 이행할 조건들도 갖추고 있다. 임금노예의 임금농노로의 이행은, 집단적 노동에 기초한 집단적 경영으로의 이행을 통해 자본제 이후의 사회(그것을 공산제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만)로의 이행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추상적인 역사이론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들을 다루고 있는 다른 강의와 그 강의 초안을 정리한 다음 책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와 서유럽을 대별시키며 이 두 지역에서의 노예제와 농노제의 전개를 현대의 역사학의 성취를 종합해 제시한다. 여기서 나는 노예제의 존속기간을 1,300~1,400년으로 잡고, 반대로 농노제를 대략 5~7세기 정도로 잡는다. 소경영자로서의 생산자가 확립된 농노제가 노예제에 비해 그 기간이 상당히 짧다. 마찬가지로 임금노예제로서의 자본주의의 역사가 16~21세기까지의 5세기였다면, 임금농노제는 21~22세기정도가 되지 않을까? 아무튼 훨씬 짧을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생산자가 개인적 경영의 주체든, 집단적 경영의 주체든 한번 경영의 주체로 정립되면 소유관계의 변혁으로까지 이어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논리적/현실적 근거를 찾는 건 이런 맥락이다. 공산제 사회를 뭐라고 할지에 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나는 결국 집단적 노동에 기초하여 집단적 경영을 행하는 집단적 소유관계에 기초한 사회라 파악하고 있다. 그러한 사회로의 이행의 논리적/현실적 근거를 찾기 위해서 이 책을 썼던 것이다. 물론 이 책은 아주 '추상적'인 차원에서 논의하고 있기에 후속작인 <머리 없는 국가>가 더해져 상부구조론이자 혁명론에 해당하는 '사회적 공화정'에 관한 논의가 더해져야 한다. 아무튼 지금 시대에 혁명을,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꾀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떠한 논리적/현실적 근거 위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조건들이 나타나고 있는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집단적 경영으로의 이행이라는 맥락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 임정빈씨는 이걸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긴 책"을 쓸 필요가 있냐고 묻지만 나로서는 필요했다고 본다.
그 연장에서 내가 "지금의 논리적 분석에서는 이 이상 언급할 수가 없다. 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레닌의 글로 갈음하고자 한다. “‘혁명의 경험’을 쌓는 것이 그것에 대해 쓰는 것보다 더 즐겁고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대단한 사회활동을, 혹은 혁명활동(?)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집단적 경영으로 이행할지에 관해서는 내가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세계사의 전개까지 포함한 인간 일반의 실천적 활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리고 아마 그 과정은, 내가 보기에는, 그리고 책에 언급했듯이 노동력 재생산 기제의 '사회화', 새로운 형태의 가족관계의 형성에서 발견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 과정에는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있기에 꼭 레닌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거창한 것이라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한다. 

4. 
 마지막으로 오타에 관해서는 할 말이 없다. 해봐야 출판사와 인쇄소에 관한 비난으로 읽힐 것이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지만 어째서인지 계속해서 출판과정에서 실수가 거듭되었다. 내가 진정으로 억울한 게 있다면 이 부분이다. 완벽주의를 지향하는 성향이라 이런 지점에서 하나라도 오타가 발생하면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거의 매일 밤새면서 수정하여 제대로 보냈는데도 잘 되지 않았다. 한글파일을 주로 사용하는 내 책임도 있을 것이다. 변환과정에서 생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인쇄소의 잘못도 있을 것이다. 이번 2쇄 출판 과정에서도 인쇄소가 마지막으로 보낸 수정파일이 아니라 그 전단계의 것을 인쇄하는 사고가 있었다. 출간되고 나서야 확인했지만 이미 늦어버렸고 누구를 탓하며 원망하겠는가. 그런 운까지도 모두 내 몫이다. 저자의 잘못이니 다시 한번 용서를 빈다. 
 이외에는.. 예전부터 느끼던 것인데 임정빈씨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많이 서툰 분 같다. 내가 본인을 차단한 이유도 그런 것이 있다. 본인은 그것이 자신의 솔직함에 대한,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신의 정확한 지적을 수용하지 못한 내 인품의 한계로 받아들이는 듯하지만 그냥 본인이 눈치가 좀 없는 사람이라 상대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최근에도 자영업자의 서비스가 불만족스러웠다며 별점을 낮게 준 것을 보았다. 별점을 낮게 준 게 삭제당했는지 어쨌는지 후속조치에 관한 불만글을 올렸고, 거기에 어떤 분이 댓글로 자영업자한테 그런 평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냐며 반성하라 했지만 임정빈씨는 그게 왜? 내 솔직한 평인데? 내 손해는 어쩌고? 라는 식으로 반응하는 걸 보았다. 그건 솔직함이 아니라 눈치없음이다. 힘들게 노력하는 자영업자들에 대한 배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공산주의에 관해 논해봐야 설득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긴 글에서도 나는 그런 눈치없음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이 서평글(?)을 끝까지 읽게 만든 동력 중 하나는 임정빈씨와 내가 다투게 된 이유가 이 책의 1부의 5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아직 제대로 개념화하지 않은 초기자본주의론을 다루는 과정에서 느끼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글을 SNS에 올린 적이 있다. 예컨대 근세적 상업자본 같은 용어는 마르크스가 사용한 것이 아니라 내가 도입한 분석적 개념이다. 이것을 사용하는 게 맞는가, 더 나아가 전근대적 화폐자본에서 근세적 상업자본을 거쳐 근대적 산업자본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다고 보는 입장에서, 전근대적, 근세적 등의 시대구분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게 적확한지에 대한 고민을 토로하는 내 글을 두고 임정빈씨가 보인 태도는 무엇이었나. 본인이 <자본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내세우며 나를 가르치려는 태도였다. 본인이 <자본론>을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하는지가 내 고민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대화가 불가능하다 여겨 차단했기에 임정빈씨가 이 책을 읽고 그에 관해 어떻게 말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 긴 글, 수많은 충고(?)로 가득한 이 글에서 그런 부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임정빈씨가 해당 부분을 재밌게 읽었다고 하니 그걸로 만족해야 하나 싶다.
 가계정까지 만들어서 나와의 대화를 시도하고 나름대로 내 사정을 이해하려 노력했던 부분에 관해서는 좋게 생각한다. 이렇게 긴 글을 적어준 것도 정말로 고맙게 생각한다. 진심이다. 고맙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냥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치없는 부분이 계속해서 보이고, 임정빈씨와의 관계를 회복하더라도 딱히 좋은 관계가 되리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건 내가 임정빈씨 말처럼 나에 관해 좋게 말하는 사람들만 곁에 두려고 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눈치가 없기 때문이다. 눈치없음에서 나오는 주제넘는 모습이 짜증나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그런 짜증을 인내할 체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항상 말하지만 타인에 관해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게 좋다. 나는 임정빈씨의 개인사에 관해 전해 들으면서도 말하지 않는다. 몰라서 얘기하지 않는 게 아니다. 내가 이 긴 글에서 임정빈씨 개인에 관해 말하는 건 이 마지막 세 문단 정도다.
 원고료를 말하기에 혹시나 원고료를 받고 싶다면 가계정으로 내게 연락을 취하시라. 스타벅스 쿠폰이라도 하나 선물해드리겠다. 날이 풀리고 있지만 여전히 춥다. 감기 조심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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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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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이전의 세계 서평평평

(먼저 한 가지 밝히자면 내가 손민석 씨한테 개인적으로 연락을 취해 서로 오해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질문 등으로 확인하고, 이 글도 올리기 전에 미리 보여드리겠다고 했으나 손민석 씨는 자기가 검열하는 것 같아 사양한다고 말하고, 내가 글을 올리는 건 책이 화제가 되는 일이니 좋은 일이라고 말해주었다. 다만 손민석 씨가 자신만만하게 단정하는 것 중 몇 가지는 분명히 내 기억에는 내가 하지 않은 말인데, 이에 대해서는 답변을 해주기 바란다)

감사하게도 손민석 씨가 자본 이전의 세계 서평평(?)을 써주셨다. 해당 서평평은 사진으로 첨부한다. 이 글은 서평평에 대한 평이므로 서평보다 좀 더 자유롭게 써보고자 한다. 서평평을 보니 역시나 내 생각대로 상호 간에 오해가 축적돼있다. 일단 나는 손민석 씨의 주장과 다르게, 손민석 씨와 다투지 않았다. 왜 손민석 씨는 우리가 다퉜다고 인식하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만한 부분이 있으나, 내 현실 인식과 더불어 실제 있었던 일을 살펴보자. 사실 나는 근세/근대 논의는 별로 관심이 없(고 서평에도 이미 드러낸 것 같은데)다. (왜 관심이 없는지에 대해서도 서평에서 짤막하게 다루었다고 생각하는데, 내 연구 작업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sns에서 연구자들을 위해 좋은 이론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해당 대목 관련해서 나에 대한 기여점을 발견해주시면 꼭 알려주시고, 크게 사례하고 싶다) 재작년에 손민석 씨가 나를 차단하기까지 이른 과정은 사실 내가 보기에는 별 게 없다. 손민석 씨가 페북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본래적인 의미의 메뉴팩처’가 뭔지 탐구 및 질문을 하고 있더라. 나는 그냥 메뉴팩처의 본질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은데 복잡하게 둘러가나 보다 싶어서 매뉴팩처는 공장제 수공업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그게 서평평에서 “자본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를 내세우며 나를 가르치려는 태도”였다는 내용이다(매뉴팩처가 공장제 수공업이라는 건 자본론을 잘 알아야 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라, 어느 정도 운동권의 상식 중 하나 아닐까?). 내가 그랬더니 손민석 씨가 굉장히 짜증을 냈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얘기한 건 ‘본래적 의미의 메뉴팩처 시기(진정한 매뉴팩처 시기)’라는 것이었다. 사실 시기가 붙냐 아니냐에 따라서 해당 단어의 의미가 다르다는 건 분명해보이는데, 내가 다음부터 용어를 잘 쓰시라 했더니 나를 차단하고 “병신”, “머저리”라고 욕하고 있더라. 그러면서 자기 이론을 장문으로 열심히 설명하고, 나를 이것도 이해 못하는 머저리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이번 서평평에서는 “무식한 태도”가 아니라 “가르치려는 태도”라고 정정한 데에서 감사해야 할까?(그런데 정말 궁금해서 한번 물어보는 건데, “가르치려는 태도”는 손민석 씨가 매일같이 하는 것 아니었나......?) 나는 그때 벙찌긴 했지만, 여태까지 거기에 대해 직접적으로 뭐라 한 적은 없다. 이게 나와 다툰 일로 기억하고 있다면 기억을 다시 한번 재고해보시기 바란다. 손민석 씨가 얼마나 기분이 나빴는지와 별개로 나는 당신과 다툰 기억이 없다. 당신이 나를 차단하고 욕을 했을 뿐이다. 손민석 씨한테 공정하게 말하자면 내가 “눈치없게” “가르치려는 태도”로 짜증을 유발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 일로 손민석 씨한테 화를 낸 적도 욕을 한 적도 없다. 오히려 그 이후 내 행적을 보면 나는 필요 이상으로 손민석 씨한테 잘 하려고 하지 않았나? 우리가 ‘다툰 사이’인 게 아니라 손민석 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내가 신현준 교수의 페북에서 댓글로 위와 연장된 취지로 손민석 씨가 단어, 개념을 엄밀하게 쓰지 않는 것 같다는 얘기를 하기는 했다. 그런 의견을 밝힌 게 문제가 될까? 혹시 그걸 ‘자기와 다툰 걸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신현준 교수는 ‘자본 이전의 세계’ 책을 안 읽고 서평을 쓴 걸로 밝혀지긴 했지만 그게 내 잘못도 아니고, 막연하게 책을 읽고 서평을 썼겠지라고 내가 생각을 하긴 했는데 그걸 나한테 문제 삼을 수 있을까? 그런 건 좀 과하지 않나? 또한 내가 비판할 때 표현이 과할 수는 있는데, 그런 건 애초에 손민석 씨 본인의 주특기기도 하고 손민석 씨는 자신이 그런 걸 주고받는 것에 거리낌없는 것처럼 얘기하지 않았었나?
손민석 씨는 “그건 내가 임정빈씨 말처럼 나에 관해 좋게 말하는 사람들만 곁에 두려고 해서가 아니라”라고 했는데, 만약 내가 정말로 그런 말을 했다면 정말 미안한 일이지만 나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 너무 자신만만하게 내가 그랬다고 하길래 오히려 내가 자신이 약해진다. 내가 손민석 씨에 대해 사적인 대화를 나눈 건 내 기억으로는 딱 두 사람인데, 뒷담화를 한 것도 아니고, 저런 말을 한 기록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다른 기록들도 뒤져보고 댓글도 찾을 수 있는 건 찾아봤다. 내가 페이스북에 손민석 씨 얘기를 한 건 신현준 교수 글을 공유하거나, 손민석 씨를 염려하거나, 손민석 씨의 책을 계속 홍보하거나(나는 내 박사학위 취득 소식을 알리는 글도 손민석 씨 책을 홍보하는 데에 썼는데, 얼마나 샀을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홍보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손민석 등의 안티가 아니라는 취지의 얘기를 할 때 언급했을 뿐이다. 그 글에서 손민석 씨가 나를 차단했다는 사실을 말하긴 했는데, 그걸 “그건 내가 임정빈씨 말처럼 나에 관해 좋게 말하는 사람들만 곁에 두려고 해서가 아니라”라고 해석한 걸까? 만약 그렇다면 안타깝다. 오해는 푸시기를 바란다. 그 글의 취지는 당신에 관해서는 내가 당신 안티가 아니라는 얘기를 한 것인데, 오해를 한 듯하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이해하실 수도 있을 것 같다. 애초에 손민석 씨 본인이 자신의 sns에서 차단에 대해 그런 오해를 하지 말라고 누누이 설명을 하지 않았나? 물론 내가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해본 건 아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일을 확증없이(애초에 확증이 있기 어려운 일이다) 단정짓는 스타일도 아니다.
이상의 사적인 오해를 풀고서 내가 부당하게 느낀 점을 말하고 싶다. 우선 나는 나 스스로 사회성이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주변에 고지를 하기도 하며, 주변 사람들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너는 사회성이 없는 게 아니다”라고 할 때 나는 거기에 반박하며 또 나 스스로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나를 이해하지 않고,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민석 씨가 나한테 한 눈치가 없다는 얘기는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고평가로 여겨져 고마운 마음도 든다. 왜냐면 그냥 싸가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이런 나 자신의 약점을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었으며, 잘하지 못하는 완곡어법을 사용하지 않고, 나는 직설적이라는 사실을 기회만 되면 주변에 고지한다. 그 이유는 예컨대 다음과 같다. 내가 별로 안 좋아한다고 얘기할 때 그건 (아주) 싫어한다는 얘기를 완곡하게 돌려 말하는 말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좋아하는 감정이 크지 않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대인관계를 위해 완곡어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래서 내가 100%의 감정을 얘기해도 완곡어법이라고 짐작하여 그보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 나는 애초에 잘 하지 못하는 완곡어법도 사용하지 않고, 내가 솔직하고 직설적이라는 말을 하고 다니는 것이다. 내가 직설적이라는 건 장단점이야 있겠지만(단점만 있다고 말하면 그것도 거짓말이고, 그런 괜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랑이어서 주변에 얘기하고 다니는 게 아니다. 내 약점이라는 걸 내 자신이 잘 인지하고 있을 정도로의 자기객관화는 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물론 내가 모든 사람과 사이가 안 좋은 건 아니지만 이런 내 개인적인 측면에 관해선 더 얘기할 필요가 없다.
그럼 이제 부당하게 느꼈다는 점을 얘기하면, 남의 배달음식 리뷰 글을 왜 멋대로 폭로(?)해서 (임정빈이) “눈치 없다”, (임정빈이) “서비스가 불만족스러웠다며 별점을 낮게 준 것”, (임정빈이) “그게 왜? 내 솔직한 평인데? 내 손해는 어쩌고? 라는 식으로 반응”, “힘들게 노력하는 자영업자들에 대한 배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공산주의에 관해 논해봐야 설득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긴 글에서도 나는 그런 눈치없음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 이런 글을 올리나? 손민석 씨가 개인사 운운하는 걸 보니 내가 서평에서 손민석 씨에 대해 쓴 걸 “개인사”에 관한 얘기로 치부하는 모양인데, 나는 철저하게 학문적 배경 및 학문적 태도에 관해서 썼다. 내 리뷰에 대한 ‘파묘’가 서평에 대한 반응으로 과연 적절한가?
손민석 씨가 먼저 꺼냈으니 리뷰 얘기부터 하면 솔직히 이걸 다루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나는 그냥 고기를 배달주문해서 먹었는데 맛이 없어서 별점 2점을 줬다. 평소에 별점을 낮게 주는 것도 아니다. 그냥 내가 평생 먹어본 고기 중에 제일 맛이 없었다. “서비스가 불만족”스럽다고 얘기한 것도 아니고, 정확히 “리뷰가 좋아서 시켰는데..ㅜㅜ”라고 한마디 썼다. 사장이 댓글로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라고 물었고, 나는 그저 맛이 없었던 것뿐이라서 답변하지 않았다. 내가 욕을 한 것도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임시조치에 따라 게시가 중단된 리뷰입니다.”라는 안내와 함께 내 리뷰가 내려갔다. 이 조치에 동의할 수 없어서 스샷을 찍어서 sns에 올렸다. 댓글 내용은 복원이 안 돼서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적어도 “내 손해는 어쩌고?”라는 글을 쓴 기억은 나에게 없다. 이후 지인들이 상호명은 가리라고 해서 아차 싶어서 그냥 글을 내렸다(방금 확인했는데 스레드에 자동으로 같이 올라간 글은 안 지웠길래 지금 내렸다). 이게 “힘들게 노력하는 자영업자들에 대한 배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공산주의에 관해 논해봐야 설득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긴 글에서도 나는 그런 눈치없음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다.”라는 말까지 들어야 하는 일이라고? 진심인가? 배달음식 리뷰에 별점 2점을 준 것이 언제부터 범죄였나? 그리고 이게 ‘눈치’의 문젠가? 내가 별점 2점이 자영업자의 음식 평판에 부정적일 거라는 사실을 과연 모를까? 혹시 별점 시스템을 오해하는 건 손민석이 아닐까? 그럼에도 이게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라 하여도, 나는 손민석 씨의 학문적 배경 및 학문적 태도에 한정해서만 손민석 씨 이야기를 하였는데, 그게 나의 이 리뷰 건을 까발리는 것과 대체 무슨 상관인가? 좀 너무한 거 아닌가. 혹시 내가 손민석 씨의 책에 별점 2점을 줬으면 그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했을까?

(이 리뷰글과 거기 달린 댓글은 인스타를 얘기하는 건데, 손민석 씨는 자기가 차단한 사람 안 본다고 하지 않았나? 누가 내 인스타를 보면서 그런 것까지 손민석 씨한테 전달하는 건가? 왜, 무슨 목적으로? 자기들끼리 뒷담을 까기 위해? 뭐든간에 어떤 생산적인 점이 거기에 있나?)
손민석 씨가 혼동하는 것 같아서 하나만 예시로 말하겠다. 내가 당신의 ‘개인사’를 까발릴 거였으면, 당신이 트위터에서 20대 운동권 여자들을 두고 한 말이 박제돼서 짤로 돌아다니는 그런 것 같은 걸 언급했을 것이다(손민석 씨가 한 것과 같은 수준으로 내려가고 싶지는 않아서 그 내용은 말하지 않겠다). 나는 그런 일을 안 하지 않았나?
손민석 씨가 배려를 얘기했으니 기본적인 예의에 관해서만 사실관계를 생각해보자. 나는 손민석 씨 책을 읽고 열심히 서평을 썼다. 그에 대해선 손민석 씨도 부정하지 않고 진심으로 감사한다고 말한다. 애초에 귀찮고 힘든 서평을 쓴 것도 도중에 그만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손민석 씨가 sns에서 하도 서평을 갈구하고 있길래, 나와 차이점이 있어도 공통점이 있는 동료 연구자를 생각해서 서평을 쓴 것이다. 그 서평이 한글로 25페이지다. 만약 내가 손민석 씨가 나를 욕한 것 등을 두고 악감정을 갖고서 서평을 썼다면, 그런 “정성들인” 서평이 나왔을까? 내가 그냥 별점 테러나 하고, 대충 손민석 씨가 반박하지 못할 짧은 서평이나 등록해서 훼방을 놓으려 하지 않았을까? 또한 손민석 씨도 알고 있듯이 나는 손민석 씨의 다른 책들도 관심있게 읽어봤고 지나가는 식으로나마 내 학위논문에서 인용하기도 했다. 진심으로 나는 손민석 씨를 부당하게 대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 나한테 돌아온 게 “(나와) 다퉜다”, “좋게 말하는 사람만 곁에 둔다고 말했다”, “자영업자한테 배려가 없어서 (임정빈한테) 설득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 세 가지 다 사실관계에 정말로 일치하나? “임정빈이 눈치없이 기분 상하게 말했다”는 게 손민석 씨 당신의 나에 대한 인격모독 등등을 전부 뒤집을 수 있는 와일드 카드라도 되는 건가? 오히려 그런 걸 명분삼는 용도로 쓰고 있다면은 과한 생각일까? 어떤 사람들은 참 자기가 더 무례하게 행동해놓고 상대가 무례하다고 비난하더라. 그것도 “나이를 먹어서” 그런 건가? 난 사과 요구란 게 거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 웬만하면 그런 걸 한 적이 없는데, 이 일련의 서술에서 내가 잘못 파악한 게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 내가 사과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손민석 씨가 일부라도 나에게 사과하길 바란다. 도대체 내가 그냥 서평 올린 것 갖고 무슨 다투는 것처럼 포장하는 언플 같은 짓을 왜 하는가?
학문적인 얘기만 해도 바쁜데 이런 사적인 거나 얘기하고 있어야 한다니 암담하다. 어쨌든 위 얘기는 정리하고, 이제 본격적인 서평평평으로 넘어가자. 


1. “오해하시는 듯한데 나는 이런 식의 리뷰를 원한 적이 없다.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리뷰와는 다르다. 책이 아니라 저자에 관한 내용이 분량상 절반을 넘는 서평/리뷰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민석 씨가 오해하시는 듯하다. 서평자는 저자가 원하는 식의 리뷰를 작성해야만 할 의무가 없다. 나는 손민석 씨가 생각한 이상적인 리뷰를 써야 하는 리뷰어가 아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내가 작성하는 것과 같은 식의 서평/리뷰는 존재할 수 있다. 세부 전공 분야가 달라서 이에 관한 견해도 더 차이가 나는 것 같은데, 저자의 배경을 중시하는 서평 전통 또한 튼튼하다. 그리고 나는 학술적 논의를 넘는 개인사는 언급한 바가 없으며, 그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했다. 또한 손민석 씨 본인이 자신의 sns에 허구한날 자신의 책에 대해 추가적인 이야기를 하고, 나를 비판하려면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라는 식으로 올리지 않았나? 그런데 그걸 뻔히 알고 있는 내가 sns 등을 참고 안 해야 할까? 어차피 손민석 씨 본인 sns에 “나는 그렇지 않다”는 식의 논지가 또 올라갈 텐데 말이다.

2. 서평에서 다룬 걸 서평평에서 안 다룬 게 많다. 손민석 씨가 추가적으로 언급을 하면 내가 생각해보겠지만, 일단 언급을 안 했으니 그 부분들은 내 주장에 더 신빙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해두겠다. 우선 “방법과 방법론을 혼동하고 있다는 지적은 웃어넘기겠다.”라고 하는데 웃어넘기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일 수 있을 거다. 1) 손민석 씨는 방법과 방법론을 혼동하고 있지 않다. 2) 내 말대로 그 구분을 딱히 생각해본 적도 없지만 그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별 다른 말이 없으니 나는 2번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견이 있으면 얘기해라. 그리고 2번이라면 그거 웃어넘길 일 아니다. 못 믿겠으면 관련 논의를 직접 공부하고, 소스를 원하면 준다고 했다. 누차 얘기하지만 자기는 자기 논의를 엄밀하게 읽어야 반박할 수 있다고 하면서, 남의 논의는 대충 웃어넘기겠다는 식의 이중잣대를 버리기 바란다.

3. 내가 방법론적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 방법론적 전체주의를 제시했는데, 손민석 씨야말로 방법론적 전체주의를 오해하고 있다. 이는 사회과학의 오랜 주제인 인간 행위와 사회 구조 간의 관계를 해석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방법론이다. 나는 내가 얘기한 비판적 실재론의 입장에 따라 인간 행위와 사회 구조는 존재론적으로 구분되지만 인과적으로 상호의존한다고 본다. 따라서 개인과 전체를 망라해서 살펴보는 것이 방법론적 전체주의며, 개인의 입장, 감정, 행위 등을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 서평에서 분명히 썼으니 다시 보시기 바란다. 이에 대해서도 환관을 거세하는 이유는 왕족(환관의 자식이지만 왕의 자식으로 오해되는 케이스) 등의 지배 계급 숫자가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제한하는 지배 계급 내의 인구 관리 기법이라고 분명하게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손민석은 방법론적 전체주의의 장점을 환기하는 이런 핵심적인 설명은 배제한 채 내가 개인 행위를 고려한 대목만 인용해서, 똑같이 방법론적 개인주의라고 매도하고 있다.
나는 어떤 신분제 사회든 지배 계급을 소수로 제한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지배 계급을 부양하느라 사회가 망하기 때문에 지배 계급의 숫자를 제한하는 인구 관리 기법을 개발한다고 말했다. 그것을 분류한 게 1. 자식 금지: 성직자, 스님, 환관/2. 동성애 권유: 고대 그리스/3. 가부장제: 딸, 장자가 아닌 아들, 서자, 사생아 등의 자식을 차별하는 가족의 재산 상속 제도 였다. 각 사회 현상을 방법론적 전체주의에 따라 발생학적으로 설명한 것이고 종교인이 자식이 금지된 이유나 환관, 동성애 권유의 이유 등을 사회과학적으로 종합해서 설명한 입장은 나는 기존 논의에서 본 적이 없다(이 얘기에 대해 더 자세한 건 기존 서평에 썼다). 당연히 손민석의 논의에도 없고, 손민석이 앞으로 이 책에서 얘기하지 않은 구체적인 얘기들을 쓰겠다고 말했지만 성직자, 스님, 환관, 동성애 권유 등의 이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을 거라고 본다. 있다면 진작에 말하지 않았을까? 내가 이런 얘기를 굳이 한 이유도 방법론적 전체주의가 무엇인지 밝히고, 손민석이 말한 부계제적 일부일처제라는 논리적 개념 도출이 가진 방법론적 제한성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한 이유도 손민석이 자꾸 자기 책 내용을 비판하려면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식의 단서를 달았기 때문에 굳이 한 것이다. 
다시 얘기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정치하게 반론하고 싶다면 내가 당신 책을 읽고 공부한 것처럼 스스로 공부하고 나서 말을 하는 성의를 보이기 바란다.

4. 내가 헤겔 철학적인 ‘추상에서 구체로’를 비판한 것에 대해 손민석 씨가 1부는 구체에서 추상으로라고 반박했는데, 추상적인 개념을 쓴다고 해서 구체에서 추상으로가 아니라는 손민석 씨의 말은 옳지만, 추상화 자체가 “구체에서 추상으로” 가서 기제를 포착한 것이다. 이것도 정밀하게 얘기하려면 비판적 실재론을 얘기하지만, 자본론을 서평에서 다 얘기할 수가 없듯이 이런 글에서 다 얘기하기는 어렵다. 요점은 손민석 씨가 하는 ‘추상에서 구체로’와 ‘구체에서 추상으로’ 모두 헤겔 철학에 기반한 것이며 나는 서평에서 썼듯이 그것이 실제 마르크스의 작업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부의 서술 자체가 구체에서 추상으로임에도 내가 손민석 씨의 서술을 ‘추상에서 구체로’라고 퉁친 것도 손민석 씨의 반론에 일조하게 된 셈이라 내 얘기에 책임이 있다고 본다. 다만 나는 그런 원환을 거쳐서 손민석 씨가 구성하고자 한 것, 세계관적 방향이 헤겔식의 ‘추상에서 구체로’라는 것을 주목한 것이다. 그 점은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구들에서 드러난다고 본다. “인류사의 전개란 생산수단과 단순히 노동하는 주체로서만 관계하는 본원적 결합자가 점차로 생산수단과 노동하는 주체로서만이 아니라 소유자로서 관계하는 본원적 소유자로 상승, 전화해나가는 과정이다. 그러한 발전의 끝에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통해 생산수단과 분리되어 자립할 수 있을 정도의 생산력을 얻게 된다. 실상 자본제 이전의 사회의 발전 정도란 개인이 공동체, 자연 등으로부터 벗어나 얼마만큼 자립할 수 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28), “... 인류사의 전개는 1)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결합관계를 중심으로 한 본원적 소유의 강화를 축으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2) 노예제와 농노제를 매개로 생산자가 단순한 생활수단의 소유자에서 노동을 매개로 한 생활수단의 소유자로, 그리고 종국에는 생활수단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자로 성장, 전화해나가는 과정으로 파악될 수도 있다.”
다 인용할 수 없으므로 일부만 인용해서 언급하자면 이것 자체가 헤겔 식의 상승하는 논리다. 이걸 구축하기 위해서 원환법을 쓰는 것인데, 이것 자체를 비판하고자 한 게 내 취지다. 나는 보다 관계론적 논리가 개입된 다른 구조가 구축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얘기는 이런 글에서 다 할 수가 없으니 적어도 여기서는 입장 차이의 확인과 내가 바로잡고자 한 취지가 공유되었으면 한다. 물론 본인이 기존 해석을 뒤집으며 변증법을 새로 밝히겠다는 입장도 나는 방법론적 다원주의에 따라 환영하며 응원한다. 다만 나는 변증법은 헤겔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더 확고히 새롭게 전유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해두고 싶다.

5. 내가 노력했음에도 당연히 나는 내 선입견에 따른 판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게 선입견에 따른 판단을 줄이기 위한 최선의 길이다. 그런데 이 얘기는 손민석 씨 본인에게도 해당한다. 당장 나와의 사적인 오해를 내가 위에서 지적한 부분도 있고(아직 이에 대한 손민석 씨의 답은 듣지 못했지만), 딱지 붙이기는 안 된다면서 나를 재차 “트로츠키주의자”라면서 “의구심”, “의문”을 드러내는데 서로 오해를 줄였으면 싶다. 그리고 나는 손민석 씨가 “공산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오독했을 거라는 식으로 서술하진 않았다. 각자의 배경을 밝히는 것과 딱지 붙이기도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 식이면 저자의 배경을 살펴보는 일 같은 건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러저러한 바 때문에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 같다는 식의 얘기를 했고, 그걸로 손민석 씨의 독해가 틀렸을 것이라고 추론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야기의 전제로 상대의 정체성이 등장하는 건 문제지만, 분석의 결과로 가리키고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오히려 손민석 씨야말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이유로 나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내 독해를 대하는 것이 아닌가? 이게 이중잣대이고, 손민석 씨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려는 노력을 덜 기울인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손민석 씨가 지엽적인 1, 2, 3, 4는 딱히 반론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데, 이걸 내 말이 맞다고 해석해도 되겠나? 근데 그냥 “내가 틀렸다”, 적어도 “아 그렇구나”하고 말면 되지 왜 말을 그렇게 하나? 그게 어렵나?(내가 이러는 것도 ‘눈치 없는’ 건가?) 일단 별 얘기가 없으니 내가 위에서 쓴 바에 따라 그렇게 추정해두고 넘어가겠다.
손민석 씨는 지적 3의 일부에 대해서만 반론하고 있는데 이는 오해가 확실해 보인다. "월러스틴이 이윤압박에 따른 자본주의의 자동붕괴설을 주장하고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겠다. 내 해석으로는 그렇지 않다. 월러스틴은 임금상승에 따른 이윤압박으로 자본주의의 자동적인 종말을 논하고 있지 않다.”, “내가 결론장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임금상승에 따른 이윤압박과 그로 인한 자본주의의 종말, 내가 임금노예제라고 하는 발전단계의 종언이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있는데 손민석은 물론이고 나도 ‘종말’을 얘기한 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내가 언제 ‘종말’, ‘종언’을 얘기했나?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손민석이 얘기하는 임금 상승 -> 자본 압박은 문자 그대로 그냥 임금상승-이윤압박이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임금상승-이윤압박(설)을 자동붕괴설로 끌어올린 논의를 아는 바가 없다. 내가 모르는 걸 내가 말했을 수도 없다. 임금상승은 계급 투쟁이 매개하는데 그걸로 자본주의가 붕괴한다손 치더라도 그게 어떻게 자동붕괴인가? 내가 과문해서 그런지 몰라도 아는 바나 짐작가는 바가 없다. 이 대목에 있어서는 손민석이 왜 이런 반론을 했는지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다.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한 건지 밝혀주기 바란다. 나머지 3번의 내용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말한 바를 손민석 씨가 다시 잘 읽으면서 생각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6. “공산주의에 관해 언급해야만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는 기준을 내세운다면 마르크스조차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닐 것이다.” 이건 너무 충격적인 얘긴데 공산당 선언, 독일 이데올로기, 고타강령 비판, 자본론에도 다 공산주의 용어가 등장하면서 언급되는데 무슨 얘기일까? 정말 몰라서 하는 얘기일까? (내가 방금 또 자본론 본문을 검색해봤지만) 자본론에도 “공산주의 사회를 생각해 본다면” 같은 용어가 분명히 나오는데? 만약 손민석 씨가 이걸 정말로 모르는 거라면 매우 충격적인 일이라고밖에 할 수가 없다. 말이 심하다면 미안하지만 정말 그렇다. 그런데 다음의 문구를 보면 꼭 모르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더 알쏭달쏭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을 체계화하여 보여줌으로써, 적어도 이들이 아무 근거도 없이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필연성을 상정한 게 아니라 그들의 이론체계 내에서는 나름대로 갖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고자 했다.” 손민석 씨의 앞의 말과 쉽게 일치하진 않는데, 아무튼 얘기를 계속 진행해보겠다.
나는 내 서평에서 손민석 씨가 진화론과 목적론을 혼동한다고 비판하고, 진보사관과 목적론적 사관도 다르다고 말했다. 예컨대 목적론을 가미해야 역사의 의미를 논할 수 있다면 그건 “신이 없으면 이 세상의 의미가 없고, 인생의 의미도 없다, 그러니 신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는 유신론자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다고 예시했다. 내 생각에 서평 초반부의 이 내용은 다른 사람도 주목했을 만큼, 내 서평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 중 하나였다. 그런데 손민석 씨는 이에 대해 명시적으로 입장을 밝히지 않고 논의를 에두르고 있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나는 임정빈씨가 우리가 나아가야 할 체제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해 그정도로 확고한 역사상(像)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어떻게 알았을까?)“만약 그렇다면 아래의 글을 읽을 필요없이 나를 지도해주기를 바란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와 정확히 반대의 입장을 갖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 1권 서문에서 콩트를 비판하며 미래 사회를 위한 요리법을 만들려 한다고 조롱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도 공산주의는 현실을 지양해나가는 운동이라고 주장한다. 손민석 씨의 입장은 본인이 뭐라고 생각했었든 “실증주의에 기반한 예측”에 해당한다. 나는 “비판적 실재론의 비예측적 설명” 개념에 기반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게 사회과학의 역할이 아니라, 사회과학은 설명을 하는 것이다. 실증주의가 전제하는 경험주의적 세계관처럼 세계는 평면적이지 않고, 경험/현상/실제(기제)의 영역이 구분되기 때문에 가장 복잡한 층위의 사회에서 우리는 행성의 운동처럼 미래를 예측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나는 손민석 씨의 ‘근대 자본제 사회를 목표 설정처럼 두는 목적론적 역사관’을 비판하였는데, 이에 의거해서도 나는 공산주의라는 확고한 미래 목표상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결국 손민석 씨는 이에 관하여 내 입장에 대해서 따지는 게 아니라, 자기 입장을 나한테 적용하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역사상’에 대해 손민석 씨가 “나를 지도해주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말했듯이 나는 사양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빈 말로 하지 말고 뭐든 정말 생각이 있으면 연락을 하고, 임정빈과 대화하는 게 본인 정신건강에 좋지 않아서 사양하고 싶다면(그게 현명한 선택일 수 있다, 나는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그렇게 하시면 된다.
다음으로 손민석 씨는 공산주의 사회와 달리 자신이 주장하는 임금농노제에 대해서는 다른 잣대를 적용한다. 다음을 보자. “그 연장에서 내가 "지금의 논리적 분석에서는 이 이상 언급할 수가 없다. 그 이유에 대해서 나는 레닌의 글로 갈음하고자 한다. “‘혁명의 경험’을 쌓는 것이 그것에 대해 쓰는 것보다 더 즐겁고 유익한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대단한 사회활동을, 혹은 혁명활동(?)을 하고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집단적 경영으로 이행할지에 관해서는 내가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세계사의 전개까지 포함한 인간 일반의 실천적 활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리고 아마 그 과정은, 내가 보기에는, 그리고 책에 언급했듯이 노동력 재생산 기제의 '사회화', 새로운 형태의 가족관계의 형성에서 발견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 과정에는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있기에 꼭 레닌만이 할 수 있는 그런 거창한 것이라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한다.” 
나는 여기에 진정 좋은 말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어떻게 ...에 관해서는 내가 선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앞으로의 세계사의 전개까지 포함한 인간 일반의 실천적 활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다뤄져야 한다는 의미에서다.” 이거다! 바로 내가 공산주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다! 덧붙여 ‘아마 그 과정은’이라며 자신의 분석에 의거해 전망(전망과 예측은 다르다)을 밝히는 것이 긍정적인 자세인 것이다(그래도 난 당장 급하게 당면한 혁명 활동, 체제 건설을 해야 해서 글을 쓰다 만 레닌에 자신을 비유하는 건 좀 과한 것 같다는 개인적 의견은 제시해둔다. 지극히 개인적이므로 무시하셔도 존중한다). 그런데 손민석 씨는 왜 이 얘기를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적용하지 않으면서, ‘임금농노제’에 대해서는 적용하는가? 내가 손민석 씨에게 이중잣대 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되는 거 같은데, 기분이 상하더라도 나는 저자한테는 바로 그와 같은 학술적 토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과 해보시기를 권해본다.
이번 서평평평도 길었지만 서평보다는 훨씬 짧아서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내 눈치 없음과 짜증을 유발한 면에 대해서는 손민석 씨에게 사과하고 싶다. 내가 진정으로 고쳐질 거라는 과언은 하기 어렵다. 이런 얘기가 과연 얼마나 더 오갈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시간도 결국엔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내 건강 걱정해주어 고맙다. 고생 덜하고, 잘 살고, 계속 잘 해나가기 바란다. 나 역시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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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pia 아르케 인터뷰-3] 사회학 연구자, 임정빈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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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pia 에디터

2025-06-13

안녕하세요, DBpia 에디터입니다.


DBpia 커뮤니티는 ‘연구자들이 빛나는 공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 시작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DBpia 아르케’입니다!

‘DBpia 아르케’는 활발한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DBpia와 함께 새로운 연구자 네트워킹 생태계를 만들어 나가는 창립 필진 그룹입니다.


어떤 분들이 ‘DBpia 아르케’로 활동하고 있는지, 한 분씩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6월 2일, 수원역 인근의 한 스터디공간에서 임정빈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오늘 인터뷰의 주인공은 사회학 연구자, 임정빈 선생님입니다.


‘연구자 임정빈’의 키워드 3가지는 #마르크스인구학, #실천하는이론가, #능동적인삶 입니다.



#마르크스_인구학


안녕하세요, 임정빈 선생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진주에 있는 경상국립대학교에서 사회학 강사로 일하고 있는 임정빈입니다. 박사 수료 후 학위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임정빈 선생님께서 커뮤니티에 쓰신 글들은 강연록 같은 형식이라, 읽을 때마다 좋은 강의를 듣는 느낌을 받았어요. 경상국립대에서는 어떤 강의를 맡고 계세요?


‘한국의 사회 문제’를 강의명으로 교양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학기마다 수강 학생수가 30명 정도 되고, 주로 공대생들이 듣습니다. 실제로 커뮤니티에 쓴 글 중에 강의 내용과 좀 겹치는 경우도 있어요. 강의는 저의 중요한 생계수단이고 실제로 좋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학강사가 저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인 것은 아닙니다.



임정빈 선생님에게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뭐예요?


제가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겁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강의도 하고, 글도 쓰고, 연구도 합니다.


지금 학위논문은 정책 연구로 쓰고 있기는 하지만, 더 좋아하고 주로 하는 건 이론적인 작업들이에요.


제가 관심 있는 건 ‘마르크스 인구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마르크스주의에서 경제학은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사실 ‘마르크스 인구학’이라는 말은 원래 없거든요. 그런데 제가 봤을 때는 이 분야가 일종의 연구 공백이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해요. 역사적으로 19세기까지는 경제학과 인구학이 구분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경제학과 인구학이 본격적으로 구분되기 시작했죠. 인구학이 경제학 못지않게 보수적인 풍토가 짙은 학문 분야예요. 이 분야에 대해서도 마르크스주의의 언어로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제가 추구하는 학문 방향입니다.



마르크스 인구학이 기존의 인구학 담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비판을 할 수 있는지 예시를 들어주세요.


제 학위논문 주제가 저출생 대책 정책 연구인데요. 기존의 인구학 담론에서는 ‘저출생’과 ‘고령화’를 하나의 문제로 묶어서 다루는 경향이 있죠. 예컨대 ‘출산율이 낮아지면 고령화가 심해진다’와 같은 식이죠. 저는 이런 담론이 여성들을 고통스럽게 만들 뿐더러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고령화 현상의 직접적인 원인은 ‘평균 수명 연장’이지, 출산율에 좌우되는 게 아니거든요. 우리가 더 오래 살고 싶어하고 기대수명이 올라간다면 그만큼 노화된 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내기 때문에 고령화는 필연적으로 찾아오게 돼요. 피할 수가 없죠. 출산율 올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출산율과 고령화를 하나의 문제로 다루는 것은 국민연금 고갈론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문제를 냉정하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비판적 관점이 강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거죠.


▶ 관련 글: “저출산ㆍ고령화”는 옳은 말일까?



인터뷰 장소에 먼저 도착하여 인터뷰어를 기다린 임정빈 선생님의 책상에는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이 놓여 있었습니다.




#실천하는_이론가


마르크스주의는 강력한 이론 체계이자, 동시에 실천을 중시하는 사회운동의 기초이기도 합니다. 선생님께서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이론’과 ‘실천’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가요? 그리고 선생님 자신은 이론가에 더 가깝다고 느끼시는지, 실천가에 더 가깝다고 느끼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제가 대학원에서 주로 공부하는 ‘비판적 실재론’이라는 과학철학 분야에서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이 세계에는 여러 가지 힘들이 존재하고 이 힘은 발현되거나 발현되지 않을 수 있어요. 우리가 현실을 바꾸어 나가고자 할 때 이 힘들을 어떤 방향으로 결합시켜서 발현되거나 발현되지 않게 하는 작업을 하는데, 이런 것 중 하나가 사회운동이라고 볼 수 있죠. 과학 실험과 비슷한 거예요. 실험을 통해 어떤 현상이 나타나게 하거나 나타나지 않도록 억제하는 행동들을 하잖아요. 사회과학과 사회운동도 마찬가지의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이론의 영역과 실천의 영역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자연과학 분야에서 어떠한 이론을 가지고 실험을 하듯이,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이론을 토대로 실천을 하는 거죠. 과학 실험에서 이론 연구만 하는 사람과 실험만 하는 사람을 꼭 나누지 않는 것처럼, 사회과학에서도 이론가의 역할과 실천가의 역할이 꼭 구분되는 건 아니에요. 이론 연구 역시도 실천의 한 방식이 될 수 있죠.

다만 각자의 전문 분야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 전문 분야는 이론 연구이고, 이론 연구로써 사회에 기여할 방법을 여러모로 모색하는 중이에요.


▶관련 글: “거대 담론”과 “거시 이론”은 같은 말일까?



#능동적인_삶


인간 임정빈은 어떤 사람이에요?


그냥,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이요.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기 싫은 일에는 시간 쓰는 걸 싫어해요. 군대에서도 급식 대기줄에 서있는 동안 책을 읽곤 했어요.



연구는 하고 싶은 일이었나요?


어렸을 때 꿈은 소설가였습니다. 대학도 처음엔 문예창작학과를 갔죠. 추리 소설도 몇 권 출간했어요. 《사기의 신》이라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다 보니 글을 잘 쓰려면 경험이 많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것저것 하다가 운동권 동아리를 들어가게 되어 사회 운동에 관심을 가졌는데, 어느샌가 본말이 전도되어 버리더라고요. 그래도 지금 삶의 방향성에 나름 만족하는 중입니다. 본격적으로 연구자의 길에 들어서기로 마음먹은 건 학부 후반에 하도 놀다 보니 공부가 하고 싶어져서였어요. 그리고 학문적 작업이 어느 정도는 제 취향에 맞기도 합니다.



좋은 연구자란 어떤 연구자라고 생각하세요?


헛소리 하지 않는 사람이요. 누군가 본인 주장의 허점을 지적했다면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해요. 타당한 비판을 수용하지 못하는 연구자들이 많아요.




시리즈 보기

[DBpia 아르케 인터뷰-1] 나노 항생제 연구자, 김경민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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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pia 아르케 인터뷰-4] 예술교육 연구자, 공윤지를 소개합니다

[DBpia 아르케 인터뷰-5] 아동심리상담 연구자, 황지원을 소개합니다

[DBpia 아르케 인터뷰-6] 도시연구자, 윤다운을 소개합니다

[DBpia 아르케 인터뷰-7] 생물정보학 연구자, 전수현을 소개합니다

[DBpia 아르케 인터뷰-8] 한중문화콘텐츠 연구자, 배혜은을 소개합니다

[DBpia 아르케 인터뷰-9] 문화매개 연구자, 박세희를 소개합니다

[DBpia 아르케 인터뷰-10] 디자인 연구자, 김민채를 소개합니다

[DBpia 아르케 인터뷰-11] 도시공학 연구자, 문성남을 소개합니다

[DBpia 아르케 인터뷰-12] 국제스포츠관계학 연구자, 권석무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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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희

    '헛소리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 진짜 중요한.. 연구자의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ㅠㅠ 아르케 연재 동안 거의 모든 글에 임정빈 선생님의 코멘트가 달려 있었는데, 글 쓰는 일도 잘 하시지만 읽는 일도 잘 하셔서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025.06.13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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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정빈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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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mage showcases two books, including a major philosophical work on Marxism.
The prominent book is Volume 1 of "Main Currents of Marxism" by Leszek Kołakowski, titled "The Founders". 
The second book is a history of Korean progressive parties written by Lee Jae-young. 
The setup includes a pair of white wireless earbuds and a pen on a wooden table. 





제국의 위안부 읽고 있는데 상상외로 쓰레기 같은 책이었네... 선해하려는 나조차도 이럴 정도였으니 정대협 같은 곳에서 얼마나 싫어했을지...

공통체 | 제국 3부작 3 | 안토니오 네그리 외 |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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