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6, 2026

손민석 자본 이전의 세계 -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



손민석

Favourites ·opeosdtSrn e t93b9a l203etc4D5112831lu6ae45r2m2c:g2161at00m5 0t ·


<자본 이전의 세계 -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을 쓰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체계에서 핵심이 '가족공동체의 존재양태'라는 점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 연장에서 앞으로의 인류사의 전개는 남성보다는 여성한테 더 많은 주도권이 주어져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이 어떤 가족공동체를 형성할지에 있어 주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선택이야말로 원시공산제 이후의 인류사의 전개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소경영생산양식'의 향방 또한 결정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약간 갸우뚱 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아무래도 계급, 계급투쟁 같은 걸 기대하고 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역사이론 수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가족공동체 얘기만 한다. 계급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며 불만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예컨대 반복해서 제기되었던 건 게 계급투쟁을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보기보다는, 화폐자본과의 관계라든지 이런 걸 좀더 강조하는 듯한 뉘앙스가 있어 '비(非)마르크스주의적'으로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계급적 대립 혹은 모순이란 그 자체로 주어져 있는 게 아니다. 계급적 대립이 정말로 하나의 "모순"으로 치달을 때까지 그 운동을 가속시키는 요인들을 함께 다뤄야 한다. 그게 아니면 계급환원론이 되어버린다. 로버트 브레너로 인해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라 하면 역사인구학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배격해야 마땅한 걸로 자꾸 '오해'하는데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역사발전에 있어, 특히 전근대에 있어 인구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했다. 그들은 인구만으로 설명하는 걸 부정했을 뿐이지, 양질전화에 있어 인구만큼 확실한 지표가 또 없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은 역사인구학, 비교정치학 등의 성과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론체계를 확장해야 한다. 가족사회학의 연구들도 적극적으로 섭취해야 하는데 결국 기존의 한국형 일부일처제적 가족공동체의 형해화 속에서 여성이 어떤 선택을 할지, 그 귀추에 주목해야 거기에 기초해서 교육문제라든지, 부동산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다룰 수가 있다. <자본 이전의 세계>는 그를 위한 기초적인 이론체계를 세우는 작업이다. 앞으로 마르크스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무시해서는 제대로 된 접근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자부하고 또 자신한다. 문제는 좀 어렵다는 건데.. 내가 웬만하면 내 글 어렵다는 얘기를 안 하는데 이건 조금 어렵다.. 내가 평생에 걸쳐 쓸 책들 중에서 아마 변증법에 관한 것을 제외하면 가장 어려운 책이지 않을까.. 한다.. 아무튼 이런 맥락에서 여성들이 더 많이 읽고 역사적 위치를 파악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호중

근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저도 헤겔에 대해 무지하고 마르크스에 대해서 피상적인 깊이밖에 지니고 있지 않아서, 페이스북 글만으로도 민석님은 속된 말로 헤겔주의적으로 보이지 마르크스주의적으로 보이진 않거든요. 물론 민석님의 글을 깊은 맥락에서 이해해보면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첫번째로는 헤겔에 대한 무지(심지어 레닌이나 마르크스조차 헤겔에 대한 오독이 있다고 평가하시니, 물론 마르크스는 잘 이해하고 있다곤 하셨지만 반례를 들때 짜쳐서 그게 아닌거 같다고 하셨던거 같기도 하고), 두번째로는 정치경제학에 대한 무지, 세번째로는 지나친 이데올로기론으로의 천착(그로인한 프랑스철학으로의 경도)으로 인해 오늘날 형성돤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이론체계에 대한 총체적 왜곡이기에 그런 의미로 파악했을때 민석님은 맑스주의적이긴 하지만, 여전히 헤겔이 민석님을 설명하는 가장 큰 키워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암튼 저도 남녀에서의 여성 결정력이 여성의 성매매가 상품노동의 특수한 형태로서 어떤 의미로 말씀하시는지는 그동안 글을 통해서 어렴풋이는 이해하겠으나 이렇게 까지 강조하는게 직관적으로 와닿지는 않네요. 암튼 책에 다 있다고 하시니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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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손민석

이호중 "헤겔의 논리학 전체를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고 또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특히 제1장(상품)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반세기를 경과했지만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했다." 레닌의 말인데 동의합니다. 저도 헤겔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적어도 저는 제가 헤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약간 나은 점이 있다고 봐요ㅎㅎ

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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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엥겔스의 <자연의 변증법>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 이론체계는 내가 보기에는 두 가지의 논리체계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는 "재생산"이고 다른 하나는 "평균"이다. 이 두 논리가 "그 자체로" 서로 대립한다든지 모순된다든지 하는 건 아니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역사적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 두 논리의 논리적 관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자연적 존재'라는 말은, 여러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역사이론'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는 자연의 일부이자 자연으로부터 '자립'하지 못했다는 함의를 지니고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재생산"의 논리가 압도적인 규정력을 지니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엥겔스는 '재생산'의 논리를 인류사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자연'에도 적용한다. 자연, 특히 생물학의 영역으로 넘어왔을 때 엥겔스가 주로 구사하는 논리가 바로 이 '재생산'의 원리다. 재생산의 원리에 따라 생명체는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하며 그 나름의 '역사'를 형성한다.
인류사 또한 다르지 않다. 우리가 '생산'이라는 걸 시작하면서 비로소 '역사'의 시대로, 자연적 존재였던 야만의 단계를 넘어 드디어 생산을 해내며 자연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하는 미개의 시대로 이행하지만 그 정도는 상당히 약하다. 계급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문명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인간이 자연과 구별되는 '사회', 즉 "제2의 자연"을 창출하지만 여전히 자연의 압도적인 규정력 하에 놓여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절단"되는 역사발전의 단계로 보는 건 역시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이르렀을 때밖에 없다.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본원적 결합이 해체되면서 비로소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어 독자적인 하나의 생태계, '제2의 자연'인 시장경제 속으로 들어간다. 최근 사이토 고헤이 등이 논하는 '생태주의적 맑스주의'의 가장 큰 한계는 역사이론에 대한 몰이해로 인해 본원적 결합의 고차원적 재현이라는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이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본원적 결합의 고차원적 재현이라는 관점에 기초해 사용가치를 교환가치 축적하듯이, 자본축적 못지 않은 인간의 필요(needs)의 축적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논의해야 하는데 일본적인 사상가라 그런지 역시나 '촌락공동체'로의 회귀를 주장하고 마는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촌락공동체가 거의 없었던, 일본의 무라(村)공동체에 미치지 못하는 리(里)공동체를 영위했던 한국인에게는 돌아가야 할 공동체가 없다.
더 나아가서 사이토의 생태맑스주의에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관철되는 논리, 즉 '평균'의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평균의 원리를 어떻게 다시 재생산의 원리에 종속시킬지에 대한 문제의식이 보이지가 않는다. 평균의 원리를 방기하는 '탈성장'론으로 튀어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으로부터의 '절단'은 재생산의 논리체계로부터 '평균'의 논리체계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자본제 사회를 관통하는 원리는 '평균'이다. 우리는 평균의 논리에 따라 생산을 하고 움직인다. 재생산은 '평균'의 논리에 종속되어 있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자본제 사회를 분석하는 '플랜'을 논했을 때 그는 이러한 전도(顚倒)를 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임노동'을 먼저 분석하지 않는다. 자본=토지소유의 관계를, 평균의 원리가 관철되는 사회적 관계를 먼저 분석한 뒤에 그에 종속되어 '임금'의 형태로만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제한된 재생산의 세계로서의 '임노동'을 다룬다. 그렇기에 전자본제 사회를 분석하는 '플랜'을 짤 때는 반대로 생산자가 먼저 나와야 한다. 노예/농노와 노예주/농노주의 사회적 관계를 먼저 다루고 그 다음에 화폐자본의 대표자로서의 '상인'을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체계 일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이론체계를 정초지을 수 있는 것이지, 그냥 마르크스 조금 읽고 어, 이거 흥미롭네 하면서 역사연구에 적용하거나 해서는 안된다. 그건 그냥 마르크스를 읽은 독후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지양한다고 할 때, 평균의 논리를 전제로 어떻게 재생산의 논리를 고차원적으로 재현할지를 논할 수가 있다. 물론 촌락공동체의 고차원적 재현 같은 게 좋은 얘기이기는 하지만, 자본주의적 세계시장이 창출한 유통망, 세계적 차원의 생산 등을 고려한다면 한계가 뚜렷하다. 재생산의 논리와 평균의 논리를 대립시키기만 해서는 곤란하다.
아무튼 다시 돌아가자면 우리가 전자본제 사회를 분석할 때는 항상 '재생산'이 어떻게 이뤄지는지를 중심축으로 잡고 논의를 해야 한다. 이 재생산의 논리에는 당연하게도 경제적인 영역만 포함되지 않는다. 사회의 "총체적인 파악"으로 나아가야 된다. 그래야 사회, 공동체 전체의 재생산의 과정을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 이전의 세계>는 이런 것들을 다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에 제대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도움이 많이 될거라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을 보완하는 작업들을 계속 해야 되는데.. 엥겔스의 <자연의 변증법>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내지 못한 게 그래서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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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이전의 세계>는 몇 번째 다시 읽는 건지 모르겠는데 아니, 이렇게 평이하게 풀어서 쓰는데 뭐가 어렵다는 거여 대체.. 노예제도 가내노예, 노예제 소경영, 노예제 대경영, 소경영 노예제, 완성된 가내노예제 등으로 딱딱 분류해서 보여주고.. 사적 노예제와 공적 노예제, 사적 농노제와 공적 농노제 다 분류해서 적용할 수 있게 해주는데.. 이제 이 책으로 해야 할 일은 전근대 중국이나 조선왕조의 사회구성에 관한 논의를 하는 것정도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조선왕조의 사회구성의 성격은 후기 공적 노예제에서 전기 공적 농노제로 이행하는 단계이다. 원래 이걸로 이영훈의 농노제론을 비판하려고 했는데.. 이 아저씨가 갑자기 노예제 사회라고 이상한 소리 하기 시작해서.. 요즘에는 어떻게 비판해야 되나, 고민을 하고 있다. 아, 내가 노예제 사회론 주장하려고 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중국이 공적 농노제로 이행한 뒤에 거기에 편입된 주변부 사회들, 예컨대 베트남, 조선왕조, 류큐 등은 역설적이게도 중국의 조공무역체계의 영향 하에 노예제적 사회구성으로 재편되었다. 이것을 세계사의 구조적 관점에서 논의하는 방식으로 전근대 조공관계론을 재구성해보고 싶었다.
예컨대 중국이 노예제 사회 단계에 있을 때의 조공체제와 농노제 사회 단계에서의 조공체제의 질적 차이를 이론화하는 걸 시도해보고 그 과정에서 그에 편입된 주변부 사회들의 사회구성을 체계적으로 접합하여 전근대 동아시아사를 구조적으로 파악해보고 싶었다. 그래야 비트포겔류의 중심부-주변부-아주변부라는 구조적 파악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다. 가설이지만 이춘식 선생의 연구를 참고하자면 조공체제의 성격은 정치-군사적인 것에서 점차로 경제적인 것으로 이행한다. 특히 후자의 광역경제권의 형성을 이후의 산업화 과정과 연결시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현대 중국공산당 중심의 '근대적' 중화질서와 미국 중심의 '국가간체계(inter-state system)'의 차이를 드러내면서 '21세기형 세계시장'의 질적인 부분을 좀 논의해보고 싶은데.. 아, 저 아저씨가 괜히 노예제 사회론 선점해서..
아무튼 이민족인 청왕조에 의한 조공체제의 변화와 이후 산업화를 연결시키는 "구조적 세계사"를 방법론으로 좀 정초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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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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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글쟁이들의 마르크스 비판을 봐도 어설프기 그지없다.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는 게 본인들이 마르크스를 직접 읽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그 내부로 파고 들지를 않고 바깥에서 그냥 대충 몇 개 툭툭 건드린 다음에 이런 점에서 한계가 있고.. 내가 마르크스 이론체계를 깊이 파고 들어서 하나의 총체적인 이론체계를 세우겠다. 그런 다음에 비판을 해야 되거든. 내가 마르크스 공부하고 책쓰고 그러는 것도 이 마르크스 이론체계 전체를 부정하기 위해서다. 나 이 아저씨 안 좋아해. 근데 뭘 어떻게 비판해야 될지도 모르면서, 코끼리 다리 더듬듯이 조금 보고 욕하고.. 그렇게 쉽게 쉽게 넘기는 게 황당해서 전 이론체계를 재구성한 책을 내는거다. 
 읽어보고 까라고. 우리는 사유를 할 수가 없는 게 사유의 지반이 없다. 기반이 되는 근거가 없다. 공통의 기반 없이 각자 할 말만 하는거다. 유행한다는 책들만 읽지, 파고 들어서 사유의 근간을, 기반을, 근거를 형성하고 그 위에서 비판을 못해. 내가 너무 속이 터지는거야. 예를 들어서 김용섭과 강만길의 자본주의 맹아론, 내재적 발전론 등을 비판하는 걸 봐봐. 이분들도 문제인데, 이 양반들도 냉정하게 평가하면 이론적 수준이 굉장히 낮다. 하는 얘기 들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걸 그냥 했을 뿐이다. 그러면 후학이 이걸 비판할 때는, 이분들의 글의 이면에 존재하는, 무의식의 체계를 끄집어내면서 거기에 체계성을 부여해 이론으로 만든 다음에 깨부수어야 한다. 그 이론이, 실증이 근거할 수 있는 토대 자체를 음미하고 무너뜨리고 그래야 하는거다. 
 근데 그게 아니라 후학들이 그냥 아무 말이나 한다. 어떤 놈은 숨은 신이라서 박정희 경제개발 뒷받침한 이론이라 그러고, 또 어떤 놈은 자본주의 맹아론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이론이라고 하고.. 아무말 대잔치하는거다. 당연히 본인들 수준도 낮아지고 조선일보에 기고하면서 사는거다. 이 사람들한테 사유가 있을까? 사상이 있을까? 반공주의 외에 뭐가 있나 대체.
 내 마르크스 공부는 이 책만 이해하면 더 이상 마르크스 읽을 필요가 없게 해놨다. 내가 MEW 50여권 다 뒤져서 샅샅이 뒤져서 인용문 발췌집 만들고 그거에 기초해 체계적으로, 그것도 <자본론>의 체계에 대응시켜서 이론체계 만들었으니 텍스트가 더 나와도 입장이 바뀔 게 없다. 이제부터 할 일은 최근의 실증 자료들 섭렵해서 이 이론체계를 하나하나 깨부수는거다. 깨부수면서 새로운 이론체계를 세우는 것, 사상의 틀을 세우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공통의 지반 위에서, 근거 위에서 사유를 논하고 함께 대화를 하고.. 그런 '텍스트의 제국'을 세우고 싶다.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기반으로 삼아서 중국, 일본, 베트남 등의 동아시아 사유의 교통공간을 만들고 사유의 제국을 세워 아시아의 시대를 여는 데 기여하고 싶다. 나는 그런 꿈이 있다. 사유의 제국, 언어의 제국, 정보의 제국, 그런 제국을 만들고 싶다.
 안되면 씨발 어쩔 수 없고. 어쩔거야. 거기까지가 내 운명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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