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11, 2023

알라딘: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알라딘: [전자책]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ebook

책소개

삶과 글이 깊은 윤리적 지향 속에 하나로 삭혀 녹아 있는 우리 시대의 '숨겨진 선비' 이수태.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그가 길어낸 고결한 영혼의 기록들. 그의 글들은 글쓰기란 자기 기억과의 대화라는 글의 기본을 새삼 일깨우며, 일상의 구체성 속에 스스로를 성찰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깊은 잠언적 울림을 전한다.

저자는 결코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도 아니고, 대단한 명성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는 한때 문학청년으로, 시와 소설을 사랑하여 문학 서클에 들어가 문학과 철학을 이야기하며 밤을 새우기도 하고, 습작에도 몰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자신의 전공과는 별 상관없는 직업인의 길을 걸었지만, 자신의 꿈을 외면하거나 잊지 않았다.

어릴 적 품었던 꿈을 성장한 다음에도 잊지 않고, 계속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면서 일상의 결결이 그 꿈이 배이게 하는 힘, 그 꿈을 지향하는 마음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힘, 그는 그런 순수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전공과는 상관없이 쌓은 인문학적, 철학적 성과로 논어를 새롭게 번역하고, 논어에 관한 책을 낸 것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다.

저자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특별할 게 없는 생활인이지만, 자신의 일상 작은 부분 하나하나를 통해 자신의 꿈을 반추해내고 성찰하는 특별한 삶을 살고 있다. 그의 문장 곳곳에선 글을 본업으로 삼지 않는다는 겸양과는 달리 때로 노트에 적어놓고 싶을 정도로 빼어난 잠언적 경구들이 확인된다. 그는 진정한 삶의 공부를 결코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의 에세이는 큰 것, 강한 것, 힘센 것, 자극적인 것이 세상의 중심에서 위압하는 우리 사회에서 작은 것, 약한 것, 소박한 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뿌리임을 일깨워준다.


목차

1부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전태일과 김윤동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Pierre Gardin?
윤 하사와 당앙
가장 무서운 사람
작은 손해를 감수하는 일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간소한 생활에의 꿈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사 유감1
이사 유감2
두 자매
우리들의 죄의식

2부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고향이라는 허물
고요한 시간
핼리 혜성 이야기
해리 골든의 수필집
헌 책 이야기
꿈꾸던 날의 우상
신화의 탄생과 죽음
달리기1
달리기2
안양천에서
It’s me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이영유의 시와 삶

3부 논어와 나
『논어』와 나
공자, 그는 과연 누구인가?
젊은 공자
반문의 의미
진리됨에 대한 보증
공자와 예수, 너무나도 닮은 그들


책속에서


첫문장

전태일, 그는 1970년 11월 청계천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스스로의 몸에 석유를 붓고 분신해 당시의 척박한 노동 현실에 경종을 울렸다.
P.17

“전태일과 김윤동은 분명히 다르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 고만고만한 분위기 속에서 평화시장의 서럽고 배고프고 비인간적인 환경 속에서 소외된 삶을 살았다는 이 동질성은 여전히 남는다. 언젠가부터 나는 그 동질성이 그들의 서로 다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이―나의 풀리지 않는 화두를 포함하여 점점 하나로 휘덮어가는 것을 느낀다.
줌아웃Zoom out, 어쩌면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바뀌어가는 나의 인식에 가장 유사할 것 같다. 그리고 왜 많은 영화감독이 그들 영화의 가슴 저미는 마지막 장면을 구태여 줌아웃으로 처리하는지 이해가 될 듯도 하다. 화면 속 수많은 정경이 하나의 소실점을 향해 까마득히 멀어지면서 이제 전태일과 김윤동은 하나의 점처럼 보인다. 흑백으로 낡아가는 1970년대와 함께. 이제 아무도 주목해주지 않는 그 시대의 설움과 함께.”
P.61

“라면집의 간소함에는 그런 스산함이 있다. 젓가락 통에 젓가락이 조용히 꽂혀 있는 모습이라든가 단무지 접시들이 차분하게 포개져 있는 모습, 그리고 저 거울 속에 전철을 타러 부산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스산함이 있다. 그리고 그 스산함은 나를 편안하게 하고 고즈넉하게 한다. 어쩌면 이 라면집은 언젠가 까마득한 과거에 보았던 혹은 언젠가 먼 미래에 다시 보게 될, 나의 잃어버린 성소(聖所)나 제단(祭壇)의 흔적인지도 모르겠다.
P.96

“고요의 순간은 바깥에 쏠려 있던 우리의 의식이 온전히 회수되는 순간이며 의식이 일상적인 무언가로 치닫지 않고 그 발원지 근처에 무거운 안개처럼 머무는 순간, 그래서 제 자신을 좀 더 낯설게 의식하는 순간이다.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듣고 있다. 그것은 미세하게 가물거리면서 말을 걸어오는 존재의 소리다. 그래서 고요함 속에서 우리의 귀는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 열린다.”
P.174~175

“우리가 가장 깊은 눈을 열고 이 세상을 그 심연에서부터 바라볼 때, 이 세상 역시 상처로 가득 차 있다. 모든 곳에서 우리는 피 흘림을 보고 신음을 듣는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에게는 얼마간의 상처가 필요하다고 막연히 여겼던 나의 생각도 구태여 잘못은 아닌 셈이다. 다만 엄밀하게 볼 때 필요한 것은 상처라기보다는 이 세상의 미만한 상처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지적 성실성이라고 바꾸어 말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땅 위에 상처 아닌 것이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 광막한 우주의 상처가 아닌가! 단지 우리는 우리가 ‘보는’ 만큼의 상처를 가질 뿐이며 그런 방식으로 가지는 상처의 크기만큼 지혜와 인간적 연대를 확보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희비애락에 노출된 인간의 삶은 드러난 상처와도 같다. 최후의 순간에 지혜는 그 모든 상처와 일체화된다.”


저자 소개

지은이: 이수태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최근작 :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300개의 정치적 혹은 비정치적 화두들>,<공자의 발견> … 총 19종 (모두보기)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고 서울사대부고와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들어가 32년간 한 직장에서만 복무하며 대전지역본부장, 일산병원 행정부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89년 「한국 가곡의 재인식 문제」로 제5회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했으며, 2013년에는 격월간 에세이스트사가 제정한 시대의 에세이스트상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현재는 강화도에 집필실을 마련하여 활발하게 저술 활동을 하는 한편, 특히 수사학(洙泗學)을 연구하고 강연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논어 관련 저작, 『논어의 발견』(1999), 『새번역 논어』(1999) 『공자의 발견』(2015), 수필집으로 『어른되기의 어려움』(2002) 『누룩곰팡이의 노래』(2004)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2012) 『영원한 공직』(2013) 『300개의 정치적 혹은 비정치적 화두들』(2017) 등이 있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스스로 선택한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길어낸 ‘한국 최고 수준의 에세이’ 어쩌면, 한글로 쓰여진 모든 에세이 가운데서 단연 최고의 명품 에세이! 

우리 시대의 숨겨진 선비가 펼쳐내는 맑은 영혼의 세계 한 평범한 생활인의 깊은 사유와 통찰로 영혼 상실과 물질 만능의 이 시대에 던지는 최고 수준의 지혜 삶과 글이 깊은 윤리적 지향 속에 하나로 삭혀 녹아 있는 우리 시대의 ‘숨겨진 선비(隱士)’ 이수태.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그가 길어낸 고결한 영혼의 기록들! 
그의 글들은 글쓰기란 자기 기억과의 대화라는 글의 기본을 새삼 일깨우며, 일상의 구체성 속에 스스로를 성찰함으로써 우리 모두에게 깊은 잠언적 울림을 전한다. 

저자는 결코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도 아니고, 대단한 명성을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는 한때 문학청년으로, 시와 소설을 사랑하여 문학 서클에 들어가 문학과 철학을 이야기하며 밤을 새우기도 하고, 습작에도 몰두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자신의 전공과는 별 상관없는 직업인의 길을 걸었지만, 자신의 꿈을 외면하거나 잊지 않았다. 어릴 적 품었던 꿈을 성장한 다음에도 잊지 않고, 계속 자신의 삶을 반추해 보면서 일상의 결결이 그 꿈이 배이게 하는 힘, 그 꿈을 지향하는 마음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는 힘, 그는 그런 순수한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가 자신의 전공과는 상관없이 쌓은 인문학적, 철학적 성과로 논어를 새롭게 번역하고, 논어에 관한 책(『새번역 논어』, 『논어의 발견』, 『공자의 발견』)을 낸 것도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다. 저자는 평범한 일상을 사는, 특별할 게 없는 생활인이지만, 자신의 일상 작은 부분 하나하나를 통해 자신의 꿈을 반추해내고 성찰하는 특별한 삶을 살고 있다. 

그의 문장 곳곳에선 글을 본업으로 삼지 않는다는 겸양과는 달리 때로 노트에 적어놓고 싶을 정도로 빼어난 잠언적 경구들이 확인된다. 그는 진정한 삶의 공부를 결코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의 에세이는 큰 것, 강한 것, 힘센 것, 자극적인 것이 세상의 중심에서 위압하는 우리 사회에서 작은 것, 약한 것, 소박한 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뿌리임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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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분포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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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hyeffy  202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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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목소리를 내는일이 얼마나 소중할까요. 낯선장르에 지적호기심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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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D   2021-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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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완독서평

나는 아직도 완강히 핸드폰 사용을 거부하는데, 누군가는 요즈음은 핸드폰이 없다는것은 예의가 없는 것처럼 취급될 소지가 있다고 넌지시일침을 가한다. 그러고 보니 벌써 세상은 수년 전만 해도 최신품이던 핸드폰 사양을 무슨 골동품처럼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아직 버티고 있다. 이 버팀이 오래가지 못할 것을 알지만, 그래도 버티는 데까지는 버티어보려한다.

이것이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다.

63-4쪽

이 책의 표제가 된<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는 아날로그를고집하는 것과는 확연하게 구분된다. 아날로그의 낭만을 놓지 못해 불편을 감수하는 것 뿐아니라 디지털을 거부하며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집전화에 이어 상대방의 불편으로 인해 아마도 지금은 휴대전화를 보유하고 있겠지만 과거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았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크게 불편했던 것 같지는 않다.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는 분명 아쉬움을 크게 느끼고 있는터라 나는 초라한 반자본주의 마저 주장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달리기에 관해서도 언급한 부분이 나오는데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법으로 권하기도 한다. 걷기든 달리기든 그 자체에 몰입하다보면 잡념이 사라지고 신체적인 건강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저자의 말처럼 마치 술과 마찬가지로 달린다는 행위자체가 매력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달리다보니 정신과 육신의 이로운 점이 생겨나는 것이지 그 어떤 것보다 달리기를 우선적으로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가하면 헌책방이나 라면집처럼 반자본주의와 제법 낭만적으로 이어진 내용들도 나오는데 이부분 그야말로 지극히 개인적인 추억과 감상이 저마다 다를것 같아 생략하도록 한다. 무엇보다 이런 이야기들도 기억에 남지만 안타까운 사연도 등장한다. 알고 지내던 집사님이 가정폭력에 의해 죽을고비를 수차례 넘겼다는 이야기였다. 결국 자녀들의 강권하여 이혼에 이르렀다는데 가정이 해체되는 것을 두고 다행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가정폭력만큼은 어떻게든 함께 살라고 강요할 만한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수태저자의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가 맘에 들었던 이유는 읽을 때는 공감하지만 책을 덮는 순가부터 공허해지는 여타의 에세이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시대적으로 또 문학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어떻게 인문학적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나의‘라고 했지만 결국 ‘우리의‘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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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겔로스   2021-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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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솔직히 제목이 다 어렵게 느껴져서 선뜻 손에 잡기 힘들겠다 느껴졌던 책이다. 이 시리즈들 제목은 다 나랑은 멀게 느껴졌고 작가는 처음 보는 인물들이었기에 내가 이 책을 손에 잡는다 한들 페이지가 잘 넘어갈까? 의문이 많이 들었는데.. 나의 기우였다. 사무사책방 시리즈 중 제일 먼저 손에 잡은 책이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인데 내가 평소 좋아하던 에세이라 편안하게 작가의 젊은 시절, 작가의 삶을 살짜기 엿볼 수 있었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서울사대부고와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한 저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32년간 일했다고 한다. '한국 가곡의 재인식 문제'로 제5회 예술평론상을 수상, 2013년 에세이스트상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되는가 하면 '논어의 발견', '새번역 논어', '종자의 발견' 등을 집필했다. 논어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였지만 공자와 예수에 대한 관심이 지극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공단에서 일하며 세금징수를 다녔던 저자의 이야기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를 읽으면서 느껴진 저자의 생활은 청렴함이었다.검소하게 생활하길 원했던 저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와 닿았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가 더 편하게 다가왔나? 나와 그가 살았던 시대가 조금은 차이가 나는데도 말이다. 평소 즐겨읽던 책분류가 에세이여서 그랬을까? 사무사책방 시리즈 중 제목만 보고 딱 고른 책이 에세이였다니! 놀랍기도 했지만 작가의 시선으로 그 시대의 정취를 느끼고, 작가의 시선을 통해 사회도 작가의 생각도 느낄 수 있어 더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대화와 설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

난데없이 인생이 아름답다는 생각, 이승의 삶에 대한 다함없는 감사,

비극과 희극에 공히 내려진다는 신의 축복 같은 벅찬 상념에 휩싸여

핑그르르 도는 눈물을 간신히 억제해가며 서서히 교회 마당을 빠져나왔다.

고요의 순간은 바깥에 쏠려 있던 우리의 의식이 온전히 회수되는 순간이며

의식이 일상적인 무언가로 치닫지 않고 그 발원지 근처에 무거운 안개처럼 머무는 순간,

그래서 제 자신을 좀더 낯설게 의식하는 순간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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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랜드   2021-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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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다산북스

사건의 발단은 내가 복무하던 논산훈련소의 모 중대에서 화장실 유리창 하나가 분실된 데에서 일어났다. 이 뒤처리를 다른 중대의 화장실 유리창을 밤에 몰래 뽑아다가 박아놓은 것으로 처리했던 것이다. <중략> 자, 그다음은 어떻게 되었을까? 도난을 당한 중대에는 비상이 떨어졌다. 밤에 보초근무를 섰던 기간병이나 훈련병들은 기합을 받았고 즉시 원상복구를 위한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그러면 그다음 날은 건너편에 있는 다른 중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p.42~43

어느 중대가 당했다더라는 이야기나 어느 중대에서는 대낮에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작전이 성공했는데 선임하사가 직접 작전을 진두지휘했다더라 하는 이 스릴 넘치는 이야기는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의 '작은 손해를 감수하는 일'에 실린 에피소드이다. 화장실 유리창 하나가 분실된 이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했으나 점점 이야기의 스케일은 커진다. 어떻게 하면 적으로부터 자신의 중대 창문을 지킬 것인가 하는 게임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흥미진진했던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정말 궁금했다.


그런데 정말 생각보다 쉬운 방법으로 6중대 6중대장에 의해서 사건이 마무리된다. 아마 몇몇 중대장이 왜 자신도 그처럼 남다른 발상을 하지 못했는지 후회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을 거라는 저자의 말 따라 나 또한 6중대장의 발상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가 치렀던 '작은 손해'가 다른 모든 중대장과 뚜렷이 구분되는 행동으로 사병들에게 특별한 인물이 되게 하였다면 나에겐 정신 차리라며 뒤통수를 한대 치는 이야기였다. 정말 '내가 공연히 손해 볼 수는 없다'라는 일념이 한 발자국 양보함으로써 생기는 더 값진 것을 잊고 살게 했던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는 목차에서 볼 수 있듯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길지 않게 담겨있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저자의 평범한 삶이 담긴 인문 에세이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며 그의 삶의 일부분을 통해 나의 삶의 일부분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저자와 함께 추억여행을 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아마도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던 글들이 많아 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3부의 논어 주제가 실렸을 땐 뭔가 아쉬웠다. 저자의 다른 에피소드가 더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3부의 논어를 통해 수없이 들어왔던 '논어'와 '공자'에 대해 맛보기를 할 수 있어 좋긴 했지만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니!

각 장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만나볼 수 있는 풍경 그림, 정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과 함께 제목에서 주던 부정적이고 어려운 느낌이 싸악 씻겨내려가기 기분이었다.


저자의 '간소한 생활에의 꿈'편에선 식당에서 홀로 있으며 식생활로 흐른 생각이 종교의식으로 그리고 자신이 미래에 다시 보게 될 잃어버린 성소나 제단의 흔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이야기가 신기했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편에선 컴퓨터로 인터넷 세상까지 기웃거리며 세상의 변화와 문명의 이기를 줄레줄레 따라가고 있지만 아직 핸드폰은 없다며 버티는 데 까지는 버티어보려 한다며 이것이 본인의 초라한 반자본주의라고 이야기하는 저자를 응원했다.


'고향이라는 허물'편에서는 그의 이야기에 따라 나 또한 고향을 떠올려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자란 만큼 폭이 좁아졌던 골목길과 담벼락을 보며 이곳이 이렇게 작았었나 하는 생각, 예전에 있던 가게가 사라졌을 땐 나의 추억을 도난당한듯한 기묘한 기분 등 나의 낡은 기억 아래에 묻히고 만 고향을 떠올릴 수 있어 좋았다.


'이사 유감'편에서는 우리가 거대한 '……척(pretend)' 속에 살고 있으며 너무 오래 척하느라 척한다는 사실마저 잊을 지경이 된 것이 바로 이 자본의 밤이라 이야기를 통해 정말 파괴와 착취와 살육의 현장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도 했다.

이 고요를 우리 시대는 잃어가고 있다.

p.97

'고요한 시간'편에서 주는 그 고요함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차 소리 각종 기계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는 이 소란한 세상 속에서 벗어나 완전한 고요가 주는 그 여유로움을 느껴본 적이 언제였더라?! 시골에 계시던 할머니 댁을 찾아 그저 멍~하니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끝없이 이어지던 논과 밭이 있던 그 고요한 시간을, 그 여유로움을 느꼈던 그때가 그리우면서 이제는 그곳을 다시 가볼 수 없다는 생각에 울컥하기도 하다.


이렇게 저자의 소소하면서도 평범한 삶을 따라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나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되었다. 정말 제대로 된 추억여행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더없이 즐거웠다. 그리고 논어 편에서는 묻는다. 저자가 공자에게 말하던 부분이었지만 나에게도 묻는듯했던 말, 이젠 그 답을 찾아볼 시간.


너는 무엇을 하느라 네 일생을 허비하였느냐?

머리는 왜 그리 희었으며

지금 그 늦은 나이에 아직도 무엇을 찾겠다고

서성거리고 있느냐?

p.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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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쟁이   202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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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사 책방 시리즈> 일곱 권 중 두 번째로 선택한 책은 이수태 작가님의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앞서 읽은 [만인의 인문학]과 동시에 읽기 위해 비교적 무게감이 적다고 생각되는 책을 골랐다. 페이지 수도 별로 안 되고 에세이라는 말에 덜컥 집어들었으나, 어쩐 일인지 처음 생각했던대로 쭉쭉 읽어나가기가 쉽지만은 않은 책이었다고 할까. 읽다보니 갑자기 가슴이 덜컹, 하거나 갑자기 느껴지는 아련함에 어쩔 줄 모르겠는 마음을 부여잡고 멍-했던 순간들도 더러 있어 당황하게 만들었던 책. 평범함 삶 속에서 발견해낸 작가만의 빛나는 순간들, 혹은 아쉽고 그리운 순간들이 담겨 있다.

 

조그마한 손해를 감수하는 일은 생각하면 하나의 일탈이다. 그것은 단 한 발자국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평균적 가치관에 저항하며 구축된, 다소 고독한 가치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그 한 발자국을 확보할 수 있는 자를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비록 한 발자국을 물러섰지만 그의 앞에는 몇 배나 더 넓은 영지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p 45

 

이 책에 담긴 글들은 이를테면 이런 글들이다. 우리가 그냥 놓치고 지나가는 어떤 것들에 대한 술회. 한 번쯤 생각은 해보았으나 그걸로 끝, 글로는 적어보지 못했던 삶의 단상. 위의 인용문과 같은 내용을 언젠가의 나도 생각해본 적이 있다. 그저 단순히 '조금 손해본다고 나쁠 것은 없다'고 스쳐지나갔던 생각들이 작가의 펜 아래에서 구체화된 것 같은 기분. 짧고 간결한 문구로 삶에 관한 철학을 논하는 젊은 세대들에 비하면 투박한 느낌이 배어나오는 듯도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겸손한 자세로 귀기울이게 된다고 할까.

놓쳐버린 이 별에서 인생이라든가 삶과 죽음이라는 숙명적인 이미지를 느끼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이 별이 인간의 한 생애와 맞먹는 76년이라는 독특한 주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핼리 혜성에 마음이 있다면 혜성은 다시 지구 가까이 돌아왔을 때 그가 76년 전에 보았던 인류의 대부분이 무덤 속에 누워 있고 그들의 낯선 후손이 저마다의 행복과 슬픔 속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광경을 고즈넉이 굽어볼 것이 아닌가.

p 105

 

이 대목 읽는데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고 울컥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무엇!!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 고독함. 적막감. 외로움. 쓸쓸함. 다음 번 핼리 혜성을 볼 수 있는 해는 2061년이라는데, 그 때즘 되면 아마도 나는 물론 나의 가까운 이들도 대부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자신을 보았던 사람들은 아무도 남지 않는 이 지구 위를 날아갈 핼리 혜성.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면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평소에는 막연히 생각했던 죽음이나 삶 같은 것들이 핼리 혜성이라는 구체적인 것과 비교되니 더 아련하고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 받았던 부모의 사랑을 생각하고 먼저 떠나간 친구를 향한 그리움을 토로하는 저자는, 휴대폰 사용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반자본주의자'의 모습을 유지하고 이사를 하면서도 착취와 살육의 현장에 있는 것 같다며 몸을 떠는 사람이다. 순수한 듯 하면서도 '삶이 공허하고 외롭다는 것을 아는 것도 큰 지혜'라는 것을 깨달은 원숙한 사람. <논어>를 예찬하는 그가, 과연 그 책 속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얻었는지 조만간 정성들여 읽어봐야겠다. 쉽게 읽히나 이런 저런 생각을 곱씹게 만드는 저자의 글 속에서 그의 소박한 향기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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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동맘   2021-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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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조용하고도 정갈한 에세이다. 저자의 글들을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니 여름날 바람이 솔 솔 부는 시골집 대청마루에서 얼핏 잠이 들었다가 깬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추운 겨울날 따뜻한 차 한잔 대접 받은 느낌이랄까... 소근소근 들려주는 옛 이야기들로 마음을 청소한 기분이 드는 건 왜 일까?


에세이는 그 사람이다. 글을 읽고 드는 생각이다. 에세이는 그 사람의 생활이자 삶이다. 작가님의 성정이 고스란히 책 속에 묻어나온다.제목이 초라한 반자본주의라고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왠지 다이몬드같은 변하지 않은 보석이 있는 듯하다.


젊은 부부에게 다른 딴판의 사고가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고자 그가 했던 말은 참 인상깊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고 또 마음에 걸려서 모순의 사고를 끄집어낸 그를 보고 그 마음쓰임이 너무 애틋했다.


가끔 가진 것이 많다는 생각을 한다. 아니, 자주한다. 특히 이사를 해보면 안다. 이렇게 욕심들여 살 필요는 없었는데 그 순간 순간 갖고 싶다는 생각에, 그리고 이쯤이야 라는 생각에 불편을 감수할 결심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군더더기에 신경을 쓰면서 시간을 온통 거기에 잡히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저자의 소박한 하루,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마음가짐을 배우고 싶다. 페허를 사랑하고 고요한 시간을 즐기고 정갈함을 몸소 실천하는 삶...... .


데이비드 소로처럼 시골에서 땅을 일구고 자급자족하지않고도 저자처럼 도시의 반자본주의자로 살 수 있다면 어떠할까? 어마어마한 유혹들에 휩싸여 난 아마 정신을 잃을 지도 모른다. 난 너무 유혹에 약한 자이니 말이다. 차라리 유혹이 없는 곳에서, 물론 스마트폰이니 문명기계가 없는 곳에서 산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무료할 것같다. 오히려 하루 하루 먹고, 자는 것만 신경쓰면 되니 괜찮으려나 싶기도 하지만...


저자의 반자본주의의 삶... 이는 강요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경지다. 끊없이 스스로 성찰하고 싸워야하만 가능하다. 어찌보면 소박하게 사는 것이 그래서 부유하게 사는 것보다 사실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반자본주의 삶에는 바로 반성과 자기 성찰이 있다. 하지만 부유한 삶에는 그 어떤 반성도 성찰도 들어갈 구멍이 없다. 이미 너무 가득 차 있다. 또 그것을 유지하려면 보이는 틈을 메워야한다. 하지만 소박한 삶에는 여유가 있다. 바람이 통하는 숨구멍이 있다. 그 틈으로 바람이 불어올때 우리는 그것을 자유라 말한다.


여기서 미니멀리즘을 소환하지않아도, 다시금 소로를 그의 통나무집에서 불러 오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어떤 삶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인지를 말이다. 모든 것은 그리고 개인의 선택이다.



출판사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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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hyeffy   2021-04-27




🎋 스스로 선택한
평범하고 소박한 삶에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길어낸
'한국 최고 수준의 에세이'

🌺시리즈 플라뇌르 Flaneur
산책자를 위한 푸르른 영혼의 성체

필자 이수태님의 에세이는 절대 초라하지 않다. 제목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지극히 소박한 일상생활의 평정과 균형을 얻고자 알뜰살뜰 사는 삶이 초라하다 한다면 어느 누가 온전한 모습으로 삶을 반추하고 반성하며 정갈한 기록으로 부끄러움이 없다할 수 있을까.
필자의 눈과 귀를 가만히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나도 고요한 삶의 자취를 따라 나의 행적과 언행들을 돌아보고 있음을 깨닫고 만다.
어쩜 이렇게 아름다운 말들과 체험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소중한 기억들을 차분히 감상할 수 있을까. 지나온 시간만큼 변화된 그의 삶의 중심적 관계, 사랑, 일 그리고 꿈.....격동의 세월을 거쳐온 그의 이야기들은 정작 특별해서라기 보다는 지극히 소소하고 일상적이라는 담백함 속에 모두의 아련한 옛기억과 그 시절의 의미를 회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돌이켜 추억하고 반추하는 문학에 대한 집념, 고뇌, 포기, 이런 말들은 겪어보지 않고는 그 심정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오랜 시간동안 공 들여온 논어 새로 쓰기의 완성은 감격스러움 그 자체였다.
한 가지의 사물을 보더라도 정체되지 않으며 지루하지 않게 끊임없이 새로운 피조물로 승화시키는 필자만의 작법은 오랜 습작이 일궈낸 내공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야기를 연결지을 수 있는 힘, 연결된 사물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주체성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힘, 논리적이지 않고도 이치에 닿을 수 있고, 수사학적이지 않고도 되새기게 만드는 그만의 수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고요의 순간은 바깥에 쏠려 있던 우리의 의식이 온전히 회수되는 순간이며 의식이 일상적인 무언가로 치닫지 않고 그 발원지 근처에 무거운 안개처럼 머무는 순간, 그래서 제 자신을 좀 더 낯설게 의식하는 순간이다.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를 듣고 있다. 그것은 미세하게 가물거리면서 말을 걸어오는 존재의 소리다. 그래서 고요함 속에서 우리의 귀는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 열린다.
96쪽

고요한 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것들의 회상 중에서 크게 공감가는 부분이 있어서제일 인상에 남는 글이다.
나는 무수한 일상 속에서 아무리 반복해도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알아도 알아채지 못했던 것을 이리도 간결하고 깔끔하게 들려준다. 말과 글의 곧고 부드러운 힘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사무사책방시리즈 #나의초라한반자본주의 #그어딘가의구비에서우리가만났듯이 #만인의인문학 #메멘토모리죽음을기억하라 #국가의딜레마 #보이지않는가위손 #공주는어디에있는가 #리딩투데이 #리투리포터즈 #인문학 #다산 #리투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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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11687   202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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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하늘이 무엇 하나 덮어주지 않음이 없듯이

마치 땅이 무엇 하나 실어주지 않음이 없듯이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첫 페이지를 넘기면서부터 마주하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제목을 보고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문장이 섬세하고 어렵지 않은 에세이 였다.

고향에 대한 생각이나

자연에 대한 표현이 섬세하였다.

특히 안양천에 대한 글이 기억에 남는다.

고향은 없다. 고향은 다만 내 추억 속에만 있다.

지금 그곳에 있는 고향은 아버지의 헐벗은 무덤을 안고

늙은 어머니의 초점 잃은 퀭한 눈을 안고

오늘도 창백하게 낡아가고 있을 뿐이다.

푸른 숲 그늘을 노래하던 매미는 잠시 자신이 허물을 벗던 나무둥치,

그 메마른 허물 곁에 앉아 본다.

한때는 그의 세계였던 허물,

여름과 녹음을 향한 꿈, 끝없는 비상의 꿈이 배태되던 허물은

이제 하얗게 바랜 흔적만으로 매달려 있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158

봄부터 지금까지 나는 지칠 줄도 모르고 안양천과 놀고 있다.

나는 문명의 개숫물이 흘러 내려가는 이 거친 저지대에서 잠시 숨을 쉰다.

이런 휴식도 어쩌면 내 존재에 있어서는 불성실과 도피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만한 휴식도 없이 어떻게 이 곤고한 세월을 살아간단 말인가.

이제 초가을이다. 안양천의 뿌연 흙빛은 어느덧 다시 녹색의 풀빛들로 바뀌었다.

그래도 자세히 보면 풀더미 아래에는 아직도 큰물의 상처가 뿌옇게 혹은 시커멓게 남아 있다. 그래도 안양천은 지난달보다 훨씬 더 차분해졌고 파란 하늘 아래에는 군데군데 코스모슥가 피어 그림처럼 고운 정경을 연출하고 있다. 이제 그 코스모스도 쓰러져 눕고 풀들도 누렇게 시들어 본격적인 가을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머지 않아 겨울이 오면 이 헐벗은 안양천에도 눈이 올 것이다.

나는 눈 덮인 안양천의 모습이 벌써부터 궁금하다. 그때 자전거 바퀴 자국이 난, 하얀 길을 입김을 뿜으며 걸어가 보고 싶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158

하천은 생각보다 폭이 넓었고 시원하게 조성된 하천 부지에는

갈대와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 뚝방 아래 농구코트를 가로질러 곧바로 물 가까이 접근하니

탁한 오수의 냄새가 풍겼다. 결코 좋은 냄새는 아니었지만 다행히 그 냄새는 조그마한 소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에게는 추억의 냄새이기도 했다. 잠자리채를 들고 종일 철다리 아래 개천가를 쏘다닐 때 시커먼 도랑에서 나던 그 잊혀졌던 냄새를 나는 모처럼 다시 맡았던 것이다. 그래도 그 검은 물 위로 야생 오리들이 줄을 지어 이 기슭에서 저 기슭으로 미끄러지듯 헤엄치고 있었다. 봄이라서 그런지 하천부지는 온통 연녹색이었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158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인상깊은 부분은 '상처'에 대한 내용이다.

이렇게 사고하는 저자의 시선이 철학적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런 생각의 전환 가운데 상처를 극복해 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상처를 상처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극복이라는 의미로서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다-

정초에 컵퓨터를 고치겠다고 연장을 다루다가 무심결에 손을 다쳤다.

작업에 너무 취해 있었던 탓인지 손이 좀 쓰리다는 것만 느꼈는데 나중에 보니 컴퓨터 곳곳에 피가 묻어 있었다.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 놓았으나 움직임이 많은 부분이라 제대로 붙어 있지를 않았다. 아물다가 피가 나고 또 아물고, 딱지가 앉다가 떨어지고 또 딱지가 앉고 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그 상처를 다스리면서 나는 마음에 난 상처를 생각해 보았다.

우연한 일상일 수도 있고 또 그 순간을 자극한 어떤 마음의 상처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가 아물고 더치고 하는 과정이 몸의 경우와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167

컴퓨터를 고치다 다친 손의 상터를 통해 내면의 상처를 생각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나였다면 아마 자신의 실수를 탓하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며 이 작은 실수도

그럴수 있다고 말하기 보다는 무너질듯 자책을 했을 것 같다.

요증 더 힘들어서 그런지 그런 생각이 너무 쉽게 찾아오는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나보다 그런 내면의 상처를 인식하고 이겨내는 힘이 강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러한 과정에서도 저렇게 또 다른 시선의 생각을 할 수 있던 것 같다.

그리고 저자는 '막연하게 인간에게는 얼마간의 상처가 필요하다'라는 생각을 늘해왔다고 하다.

하지만 나는 할 수 만 있다면 그러한 상처 하나 받고 싶지 않다,

어쩌면 요즘 너무 지쳤기 때문일까.

내가 나를 돌보기도 지치는 날들이 많아서

그냥 편히 쉬고 싶고, 더 이상 상처로 아파하고 싶지도 않다,

나의 몸도 마음도 어디하나 상처 받지 않고 평안했으면 좋겠다.

그렇지만 상처를 바라보는 저자의 표현은 인상적이었고, 공감이 되었다.

아무런 상처 없이 고이자란 사람의 시선은 사물의 표면에만 머물기 쉬다.

인간사의 다양하고 미묘한 내정은 제가끔의 상처를 통해,

더 정확히 말한다면 상처를 다스리면서 형성된 경험세계를 통해 비로소 인지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본다면 상처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기도 하다.

그러나 너무 심한 상처는 때로 그것을 치유하고 극복하려는 의지 자체를 압살해버리기도 한다. 실제 세상에는 치유할 수 없는 상터를 안고 그 고통에 짓눌려 한평생을 불행히 살다 떠나는 사람이 많다. 할수 만 있다면 상처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 그러나 상처는 우리가 임의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상처 그 자체는 대부분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불행이기 때문이다. 다만 상처를 극복하면 우리는 그 우연성과 개별성을 넘어 필연성과 보편성을 갖춘,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지닙할 수 있을 뿐이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 사무사책방 -168

상처를 받고 싶지는 않지만, 솔직히 살아가는 과정에서

마음이 상처, 몸의 상처 한 번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상처는 받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 라는 생각도 든다.

상처라는 주제에 대해 저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상처라는 것이 의미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극복이라는 단어가 함께 존재할 때 일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그것에 눌리지 않기 위해 극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산북스의 사무사책방 시리즈를 읽으며

이렇게 우리나라에도 좋은 책들이 많이 있구나라는 생각이들었다.

주로 읽었던 책이 외국작가들 책이었는데,

이제는 우리나라 작가들의 이야기가 다긴 책을 더 자주 찾아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혹시나 제목을 보고 어려울 것이라고 먼저 생각할 수 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고

다양한 생각을 해볼 수 있게 해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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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딩북   2021-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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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사 시리즈 중에서 사적인 에세이를 담고 있는 책이다. 에세이여서 가볍게 읽어볼 수 있겠다 싶었지만 아니었다.

읽으면서 이태수 작가를 통해 진정한 어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책을 통해서도 작가의 인생의 가치를 볼 수 있었고, 그 가치는 곧 옛 선조들의 신념과 일맥상통함을 엿볼 수 있었다.


가진 것이 많고 두른 것이 많고 내세울 것이 많을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 타고난 위상을 잃게 된다.

제 자신을 잃고 어떻게 남을 논의할 수 있는가.


이태수 작가는 한 시대의 사람으로서 소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그 삶 속에서 성찰한 인생의 가치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세속적, 물질적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염세적인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이 부분이 옛 현인들의 지혜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물질적인 것에 흔들릴 때가 많다. 하지만, 이런 내면의 가치가 가장 아름답고 살아가면서 고수하기 힘들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믿는다.






생각하면 우리의 평온한 일상은 파괴와 착취와 살육의 나날들이다.

우리의 평화는 이미 평화가 아니다.

우리는 거대한 '척'하는 속에 살고 있다.

평범한 삶. 그저 특별한 것이 아닌 일상의 삶이지만 그 속에서 인생의 가치가 무엇인지 성찰해 볼 수 있게 해준다.

특별하게 살아가는 것은 극소수이고 어렵지만 나는 남들과 비슷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훨씬 어렵고 힘들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도 부단한 노력과 발돋움을 수없이 해야지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는 우리들에게 잠언의 경구들을 통해 성찰을 하게 해준다.

개인적으로는 시리즈 책 중에서 사무사의 주제와 가장 걸맞는 책이지 않을까 싶다.

사사로운 에세이 작품이지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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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ekey77   2021-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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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이수태 에세이/ 사무사책방





마치 하늘이 무엇 하나 덮어주지 않음이 없듯이

마치 땅이 무엇 하나 실어주지 않음이 없듯이





저자의 서문 대신 한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저자이신 이수태님은 연세대학을 졸업 후 국민건강보험 관리공단에서 32년간 재직하셨고 논어의 대가로 불리며 작품을 쓰고 있다. 관련 글을 검색해보니 저자를 오랜만에 만난 지인은 그의 모습을 단아한 선비 같다고 표현했다. 그의 작품을 읽으니 작품이 곧 그 사람이므로, 그를 선비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책은 총 3부로 나누어져 있고 1부, 2부에는 수필이 3부에는 논어를 강연한 내용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다. 책의 초반에 등장하는 전태일 열사와 저자의 사촌 형 김윤동 님은 대조적이다. 우리 삶이 뭔가를 생각해 볼 때, 삶은 이런 간극을 넘나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저자의 군대 시절에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에 독특한 대답을 하는 훈련병이 있었는데 그의 대답은 "대화도 설득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지요."였다. 훈령병이면 이십 대 초반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런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던 걸까! 대화와 설득은커녕 남의 말에 귀 기울여보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꽤 있다. 한 편 한 편 저자의 수필을 아로새기며 많은 생각을 했고 나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었는지 떠올려보게 되었다.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우리의 영혼을 이끌고 유혹하는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감수성을 우리와 함께 나누지 못했다. 그러나 함께 나누지 못하면서도 그들을 그 새로운 세계가 그들의 자녀들의 세계가 되어야 할 것임을 분명히 통찰하고 있었다. 불과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에는 못 먹는 것이 가난이었을진데, 요즘의 가난은 못 먹고 사는 가난이 아니라 상대적인 격차이다. 20세기 후반의 우리나라에서처럼 문화적 간극이 큰 나라가 있을까? 저자의 말에 공감 가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 놀라웠다.







저자는 글에서 '조용하다'와 '고요하다'를 구별하여 표현한다. 고요라는 말 자체도 사멸해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저자의 말처럼 고요의 순간은 이제 국어사전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 사라진 고어가 될지도 모르겠다. 문명의 이기가 앗아가버린 우리들의 소중한 가치들이 안타깝다....아쉽다.... 







중학교 2학년 때 나간 백일장 대회의 기억을 더듬어 쓴 수필. '대열'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쓴 그의 친구에게 선생님이 대열이 시제로서는 다소 어려웠을 텐데 혹시 4.19 혁명 대열 같은 것에 관해 쓰지 않았느냐고 물으셨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 생애 그 자체가 하나의 대열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라고 말하는 그의 친구, 이제는 추억이 된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헬리혜성에 대한 이야기, 헌 책 이야기, 달리기의 추억 등 소소한 수필이 큰 감동을 주었다.  

인문학과 신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가 보다. 신화를 좋아하는 내게는 반가운 일이다. 우리시대가 목말라하는 상상력과 창의력을 신화에서 만날 수 있다.  신화가 성립하기까지의 집단 정신. 시대가 변하고 고유의 가치관이 변하더라도 신화는 영원히 전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몇 달 안 갔던 산책로를 오랜만에 갔다. 높은 아파트들이 한창 공사 중이었다. 몇 달 사이 몰라볼 정도였다. 우리나라 건축기술 특히 속도는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폐허의 모습을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까? 『그 벌판에서 폐허의 모습을 본 이후 나는 이렇다 할 폐허를 다시 보지 못한 채 20여 년을 살아왔다. 자고 나면 새로 건설되는 온갖 입방체의 공간에 갇혀 정신없이 사느라 나의 눈은 쇄락의 기회를 그만큼 오랫동안 가져보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인생은 상처 입고 상처가 아무는 과정이다. 너무 많은 상처를 입어서도 안되겠지만 상처 없이 자란 사람이 남의 아픔을 겨안을 수 있을까? 사람 간에 서로 상처 주고받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오해는 종종 있다. 예전 같으면 시시비비를 가린가고 일일이 따지고 들던 일들이 이제는 그냥 시간이 흐르도록 침묵으로 내버려 두었다. 결국 진실은 밝혀진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오해가 더 쌓일 수 있겠지만!  


저자는 논어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법학을 전공한 그가 논어가 좋아서 논어에 대한 공부를 했다고 하니 독특한 이력이다. 논어를 처음 읽었을 때 세상에 이런 책이 있다니 하고 놀랐다고 한다. 논어 이전에 공자는 누구인가? 공자의 제자들도 한 마디로 일축하기 힘든 분 공자. 저자기 일찍이 세상에서 이보다 멋진 소개를 본 적이 없다는 공자의 소개 글이다.『너는 왜 그리 사람됨이 발분하면 먹는 것을 잊고 즐거움으로써 근심을 잊으며 장차 늙음이 오리라는 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이수태 작가님의 수필은 담담하면서도 감동을 준다. 언제가 나도 삶이 무르익을 때, 이런 글을 쓰고 싶다. 격정적인 논조가 들어가지 않아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글. 책 제목인 대표작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라는 작품을 다른 수필을 먼저 읽고 아껴놨다가 뒤에 읽었다. 이런 행동 역시 작품을 쓴 저자와 닮은 것 같다. 남들이 다 바꿀 때까지 물건을 사용하고 하는 점이나, 저명인사의 집에 30년이나 쓴 귀 떨어진 소반이 아직 있더라는 말에 어린아이처럼 감동을 한다는 저자, 나도 그렇다. 새로운 휴대폰이 나올 때마다 척척 바꾸는 사람을 보면 나 혼자 생각에 왠지, 그는 사람도 척척 바꿀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인문학은 나를 고민하게 하고, 아프게 하고 철들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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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jdajfjd2   2021-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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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에 자본주의는 확고부동한 진리가 되었다.주식 투기 열풍과 부동산 투기 광풍 심지어 공공기관의 내부정보를 이용한 투기까지 터져서 온 나라가 난리통이다.이런 시대에 자본주의란 무엇일까.우리는 모두 자본주의 법칙에 따라서 산다.그러나 자본주의가 때때로 어두운 모습을 보여줄 때도 있다는 것을 안다.그렇기 때문에 반자본주의자가 우리나라에 한명쯤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이 책의 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책을 읽어보면, 오랫동안 공공기관의 직장인으로 근무한 저자는 살면서 열심히 사색에 매진했다고 생각된다.주변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회에 대해서 고민하고, 문학을 즐기고 고전을 공부해서 강의까지 한 저자의 모습이 존경스러웠다.저자의 에세이가 단순한 일기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서 기뻤다.



공공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큰 부자가 되기 힘들다.부정부패에 빠지거나 재테크에 특별히 열을 올리지 않으면 말이다.그러나 부에 관심을 두고 발버둥을 쳐도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전자는 애처롭지만 후자는 어쩌면 공공분야 종사자로는 적절한 자기관리일 수 있다.물론 저자는 특별히 자기관리를 했다기보다 그저 소박하게 사는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싶다.우리 옛 선비들도 안빈낙도를 지향하지 않았나.소박한 삶이 성찰하기에는 좋은 환경일지도 모르겠다.경제적 여유가 부족하면 오는 여러가지 단점들이 있겠지만 생각하고 글쓰는 일이 가능한 환경만 되면 만족할 수도 있다.



성찰은 과거에 대한 성찰이고, 글쓰기는 현재의 관점에서 이뤄진다.즉 성찰적 글쓰기는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다.기억을 되살려서 과거의 나와 대화하는 일이다.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고 상처를 어떻게 대할지 고민해보는 일이다.이것은 역사 공부와 닮았고 고전 읽기와도 닮았다.저자가 논어에 대해 박식한 사람이라서 책을 쓰고 강의했던 사람임을 상기한다면 철학과 윤리까지도 꺼내들어볼만 하다.더 나아가서는 종교에 대한 이야기인 측면도 있다.우리의 험난한 현대사와 삭막해진 이웃 관계 그리고 책을 읽지 않는 사회를 생각해보면 저자의 모습을 귀감으로 삼을 필요도 있음을 지적해두고 싶다.공자와 예수 같은 성인들에 대해 저자 나름대로의 비교적 식견을 이야기한 부분도 인상 깊었고,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시인 친구와의 우정도 읽어볼 가치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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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D   2021-08-05메뉴


사무사책방 시리즈사무사책방 시리즈 총 7권 읽기와...  
사무사책방 시리즈사무사책방 시리즈 총 7권 읽기와 서평쓰기가 마무리 되었다. 처음에는 한 권씩 읽어야지 싶었는데 우연한 계기로 시리즈의 다른 권을 읽다보니 각권을 개별적으로 읽는 것보다동시에 나눠 읽는것이 무언가 보완되고 확장되는 기분이들게 했다. 에세이처럼 편안한 방식의 책을 읽을때는 공감하고 반성하는 수준이었다면 이론과 관련 문헌을 언급한 책에서는 해당 부분을 메모하고 좀 더 찾아보면서 읽고 흩어지는 지식과 찰나의 사유가 아닌 지속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는 그야말로 인문학적 사고로 전환할 수 있었다. 특히 국민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독서와 기록의 중요성을 얕게나마 알고 있었던 입장에서는 작더라도 열심히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종교적인 내용이 등장할 때는 인문학과 종교의 만남이 서로 대치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의 주장 혹은 이론을 사무사책방의 각 권별처럼 연결지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저자들이 들려주는 혹은 누군가에게 쓰여진 편지의 고운 내용들이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아있길 바랄뿐이다.*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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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쟁이   2021-05-03메뉴
[나의 초라한 반자본주의] 10(완독)  
                예수는 깨끗하게 살아온 것을 자부하던 바리사이 대신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던 죄 많은 세리에게서 의로움을 보았다. 공자는 앎의 실체를 더 많은 앎에서가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찾았다. 잘못을 넘어서는 것에 있어서도 그는 마찬가지 논리였다. 심지어 선의 실질도 구악, 즉 불선이 갖는 겸허한 자인에서 구했을 뿐이었다. p 255  알 듯도 같고 모를 듯도 같은 저자의 공자와 예수에 대한 찬사. 마지막을 공자와 예수로 장식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저자를 이토록 감동하게 만들었는지 점점 더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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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쟁이   2021-05-03메뉴


[논어]에는 인간과 세상을 보는 완전히 다른 관점이 있었고, 그것은 경이롭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p 200

 

 

나도 얼마 전에 [논어]를 읽었지만 저자와 같이 깊은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그저 그 유명하다는 공자의 말씀이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열심히 읽었고, 그 중 인상깊은 문장들을 몇 개 얻었을 뿐. 아직 도를 덜 닦은 탓인가. 한꺼번에는 못 읽더라도 하루에 몇 페이씩 [논어]를 다시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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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쟁이   2021-05-03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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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年 동안 땅 속에

씨앗으로 묻혀 있다

싹이 트는

식물을

나는 안다

 

 

꽃이 없다

천년 동안 땅 속에

꽃을 감췄다

몰래 言語를 피우는

꽃을, 나는 안다

 

[꽃 없는 꽃] p190

 

 

저자의 지기인 이영유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저자에게 '목숨 무게가 실린' 묵직한 시를 보낸다. 백년도 다 채우지 못하고 삶을 끝내는 인간에게 천년이란 얼마나 긴 시간인가. 죽음 앞에서 영겁의 세월을 떠올린 시인의 펜 끝을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해온다. 그 자신이 꽃 대신 언어를 피우는 꽃이 되고 싶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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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쟁이   2021-05-03메뉴


 


Who?

It's me

p 161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여운계님이 소중한 반려를 만났을 때의 에피소드.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라 해서 변태를 만난 줄 알았더니, 이런! 이 일화를 가슴에 간직하던 저자에게 그 바바리맨님이 연락해온 적이 있다는 부분을 보니, 인연이란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다. 하긴 결혼생각이 없던 나도 옆지기를 만나 결혼하고 곰돌이들까지 낳았으니 인생이란 참 신기하다.

 

그런데 왜 연락해서 직접 만나지는 않으셨을까. 나라면 한 번은 만남을 가졌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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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쟁이   2021-05-03메뉴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을 오랜만에 다시 보다가 떠나버린 여인을 막연히 기다리는 젊은 경찰관의 독백이 마음에 다가왔다.

"실연당했을 때 나는 조깅을 한다. 그럼 수분이 모두 빠져나와 눈물이 더 이상 안 나온다."

p 132

 

 

이 부분을 읽는데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달리는 것은 커녕 가볍게 걷는 것도 안 하던 나였는데, 생전 처음으로 몇 날 며칠 공원을 뛰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로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그대로 땅으로 꺼져버릴 것만 같아서.

공지영님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 다시 읽고 싶어지게 만드는 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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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쟁이   2021-05-03메뉴


놓쳐버린 이 별에서 인생이라든가 삶과 죽음이라는 숙명적인 이미지를 느끼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이 별이 인간의 한 생애와 맞먹는 76년이라는 독특한 주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핼리 혜성에 마음이 있다면 혜성은 다시 지구 가까이 돌아왔을 때 그가 76년 전에 보았던 인류의 대부분이 무덤 속에 누워 있고 그들의 낯선 후손이 저마다의 행복과 슬픔 속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광경을 고즈넉이 굽어볼 것이 아닌가.

p 105

 

 

이 대목 읽는데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고 울컥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무엇!!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 고독함. 적막감. 외로움. 쓸쓸함. 다음 번 핼리 혜성을 볼 수 있는 해는 2061년이라는데, 그 때즘 되면 아마도 나는 물론 나의 가까운 이들도 대부분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자신을 보았던 사람들은 아무도 남지 않는 이 지구 위를 날아갈 핼리 혜성.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면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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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쟁이   2021-05-03메뉴


이 에세이를 읽다보면 가슴을 찌르르하게 만드는 부분을 종종 만난다. 우리 부모님이 그랬던 것도 아닌데, 이 대목에서 왜 눈물이. 아마도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든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나조차도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나보다 아이들을 먼저 챙기게 된다. 요즘 아동학대 기사를 자주 접하는데, 그들은 과연 이런 마음을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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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쟁이   2021-05-03메뉴


간소한 생활을 꿈꾸면서 휴대폰 만들기에도 저항하고, 이사를 하면서 오래된 장롱을 처분할 때에는 자신이 '파괴와 착취와 살육의 현장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저자. 새로운 것을 접할 때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설레임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다소 고리타분하고 고지식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이렇게 자신만의 '반자본주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는 점이 놀랍기도 하다.

 

 

삶에는 일련의 스산함이 있어야 한다. 그 스산함은 우리가 헐벗은 상태로 태어났다는 사실에의 끝없는 상기가 아닌가 한다.

p 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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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홍쟁이   2021-05-03메뉴


조그마한 손해를 감수하는 일은 생각하면 하나의 일탈이다. 그것은 단 한 발자국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평균적 가치관에 저항하며 구축된, 다소 고독한 가치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그 한 발자국을 확보할 수 있는 자를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비록 한 발자국을 물러섰지만 그의 앞에는 몇 배나 더 넓은 영지가 확보되기 때문이다.

p 45

 

 

앗! 이 부분,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생각해본 적이 있는 내용이라 깜짝 놀랐다. 직장 다닐 때를 떠올려보면 그 순간에는 손해보는 것 같더라도 멀리 보면 오히려 이득이 되었던 경우도 더러 있었던 것 같다. 고집을 부려 자신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다가 후회했던 경험도 있었다. 우선 내 것을 먼저 취하고 싶더라도, 마음을 일단 가라앉히고 물러설 수 있다면 물러서는 것. 그것이 오히려 자신의 마음에도 여유를 주고, 상대에게도 같은 편안함을 전달하는 일인 것 같다.

뭐, 늘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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