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29, 2022

일본과 중국에서 경험한 나의 원전, 그리고 문재인과 윤석렬의 그것 – 다른백년




일본과 중국에서 경험한 나의 원전, 그리고 문재인과 윤석렬의 그것 – 다른백년
김유익의 [內觀 China]
일본과 중국에서 경험한 나의 원전, 그리고 문재인과 윤석렬의 그것

한국에 사는 당신에게 원전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김유익 2022.06.29 0 COMMENTS




핵발전(원전)과 관련해서 이런 저런 논란이 있기에 관심을 가진 보통사람으로서 한마디 보태고 싶다. 세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나는 당사자로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그냥 남의 말을 듣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내 경험과 관찰과 학습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 학습이라는 것도 인터넷을 뒤져서 나온 일방의 주장에 근거한 자료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다. 내 일상생활의 경험과 탈핵운동현장, 그리고 다른 지식들을 함께 유기적으로 녹인 내용을 나누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과거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일본의 상황속에서 내 생명이나, 삶과 관련된 결정을 위해, 이 문제에 대해 상당히 치열하게 고민했기 때문이다. 두번째 이유는, 이미 그로부터 11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사고가 발생했을 당시의 긴장감이나 긴박감, 공포감 혹은 비장함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과거의 자신이나 주위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서 조금 거리를 두고 고찰해 볼 수 있다. 그후 11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고, 당시에 이런 저런 반응을 보이던 사람들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기 때문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21년 연초에 중국 푸졘(福建)성에 새로운 신형핵발전소가 완공됐다는 뉴스를 듣고, 나는 상당히 관심을 갖고 이런 저런 중국내 뉴스들을 들춰봤다. 처음에는 걱정이 돼 (내가 사는 광둥성 광저우시의 동쪽 션전시와 서쪽 타이샨시의 해안에 각각 핵발전소가 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이 문제를 들여다 봤지만, 한편으로는 과연 중국에서 핵발전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또, 안전성이 보장된다고 주장하는 여러가지 새로운 핵발전 기술을 나름대로 눈여겨 봤다. 그래서 조금 더 균형잡힌 시각으로 이 문제를 들여다 보게 됐다. 세번째로 최근에 인터넷상에서 알게 된 분들 상당수가 문재인 정부의 탈핵정책을 비판하는 것을 듣고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지적인 논증을 중시하는 것으로 보이고 (소위 반지성주의에 대한 조소와 풍자에 능하다.) 내 기준으로는 새롭거나 색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현실주의”를 자신의 모토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열린 마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이분들은 일부 이론적인 기술지식을 강조할 뿐, 자신의 삶과 이 문제가 어떻게 관련될 수 있는지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발언하는 경우는 적은 것처럼 느껴졌다.그림1) 광둥성 션전시 다야완구의 핵발전소. 30년가까이 운용되고 있다.

그래서 다시 강조하지만 나는 “게임으로 대리체험한 아포칼립틱한 정서와 기분”을 나누고 싶은 것이 아니다. 최근 굉장히 많은 게임이나 영상물이 극단적인 디스토피아나, 가늠하기도 힘든 먼 미래와 과거의 타임스케일로 사람들을 현실과 동떨어지게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이런 게임들은 그 나름의 예술적, 오락적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환타지나 SF라는 장르의 특이성이나 장점에는 우리를 일상의 진부함 혹은 (주로 주류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집착으로부터 끌고 나와 새로운 생각이나 관점을 제시하는 긍정적인 역할이 있다. 하지만, 그런 체험은 우리가 일상으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는 감각을 갖게 되고, 그래서 일상을 더 디테일하게 그리고 흥미있게 바라볼 동력을 제공할 때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런 감각은 음식, 물, 공기나 돌봄과 같이 삶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요소와 이를 생산하기 위한 다양한 노동을 어떻게 느끼고 사고할 수 있는 가와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 핵발전소 사고는 특히 노벨문학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작품처럼 체르노빌과 관련한 좋은 글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표현되기도 했지만, 아마 대부분의 청년세대들에게 더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이런 게임들이 아닐까 싶다. 물론 더 쉽게 눈에 띄는 것은 바이오사고와 관련된 좀비물이지만, 거대한 재난과 연결된 종말론적 세계관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 체험은 그런 가상의 것이 아니라 “먹고 싸고 자는(吃喝拉撒)”삶, 그 중에서도 후쿠시마 사고직후 2년간 일본에서 지낸 시간에서 비롯한 것이다.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다이이치(第一)발전소에서 사고가 났을 때 토쿄에 살고 있었다. 그때 토쿄에서 지내면서 호흡이나 음식물을 통한 방사능 물질의 섭취 가능성 때문에 대단히 심리적 부담을 많이 느꼈다. 당시 나는 집에서 밥을 지어먹기보다는 외부에서 매식을 더 많이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더 신경이 쓰였다. 어쩔 수 없이, 밥을 해먹기 시작했다. 고시히카리같은 품질 좋은 일본쌀은 워낙 달고 맛있어, 간단한 밑반찬과 미소장국 한그릇만으로도 훌륭한 한끼가 됐다. 토쿄에서 한동안 생수를 구하기 힘들었던 기간이 있는데, 근처의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유일한 솔루션이 가장 비싼 수입생수인 에비앙이었던 적도 있다. 지금도 “나 에비앙으로 밥해먹는 사람이야”라고 농담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2005~2007년에 베이징에 살면서 악명높은 공기오염을 실감한 적도 있었는데, 당시에 토코에서 베이징으로 근거지를 다시 옮기려는 계획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토쿄에 머무는 것과 베이징으로 이주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내 수명을 단축시킬까,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했다. 현재까지 과학이 채택한 가설은 (아래 그림2), 이에 대한 반박과 논란은 있지만, 방사능 피폭정도와 암의 발병률은 통계적으로 정비례해서 나타난다고 보고 있다. 여기엔 문턱값이 따로 없다. 그러니까 안전한 기준이란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함정도 있다. 이건 통계적인 결과이므로, 개개인의 암발병 확률이 이 결과와 꼭 매칭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성별, 연령, 유전적인 정보 그리고 생활방식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더 쉽게 암에 걸릴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 또, 방사능은 원래 자연물질에도 함유돼 있어서, 자연에서 조사되는 방사능의 양과 핵발전소 사고에서 누출된 방사능 중 어떤 것이 더 많은지도 따져봐야 한다. 그리고, 암의 발병요인은 심리적인 스트레스를 포함해서 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한 개인이 암에 걸렸을 때, 어떤 요인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이 문제들을 남들보다 더 많이 신경쓸 수 밖에 없는 개인적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는 폐암으로 60대초반에 돌아가셨었는데, 나도 어머니처럼 폐가 그리 건강한 편이 아니다. 당시 내 고민이 소심한 강박증 환자의 과도한 공포심이 아니라 대단히 실존적이었던 이유이다.그림2) 미국국립과학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s)가 2006년에 BEIR VII phase2 report에서 발표한 방사능피폭량과 암발병률의 관계를 보여주는 모델. LNT(문턱값이 없는 선형)가설을 사용하고 있다.

일본사회의 변화와 충격,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당초 계획보다 10년정도 빨리 은퇴를 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커리어 전환을 했다. 지금은 흔히 핀테크라고 불리는 금융기술계 직장을 그만두고 토쿄와 후쿠시마의 중간쯤 되는 위치에 있는 나스(那須)라는 농촌마을에서, 일년 가까이 지냈다. 한때 서울시 지원으로 한국에도 왕래하던 일본인 대표가 운영하던 생태기술/자급자족기술센터였다. 이곳에서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관련된 일을 할 것을 권유받았기 때문이다. 하자센터라는 청소년교육과 공공인문예술, 그리고 사회혁신기관의 이야기이다. 나는 시민운동차원의 환경문제에 관심이 좀 있기는 했어도, 이런 생활방식을 추구하는 것은 꿈꿔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커리어 전환과정의 일보를 조금 과격한 방식으로 내디딘 셈이다. 일종의 모험심이나 호기심이 없지 않았다. 당시의 경험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나 취하고 있는 생활방식과 깊은 연관이 있지만, 그때도 지금도 디테일에 있어서 모두 동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절반쯤은 타고난 내 기질이나 적성과 완전히 상반돼 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재확인하는 것을 포함해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탈핵운동가(연구자, 기술자, 활동가 등 다양한 층위)나 이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일본의 보통사람들을 통해서 방사능오염이나 탈핵운동과 관련한 지식도 많이 얻었다.

그런데 역설적인 건, 내가 일년을 보낸 나스지역은 사고발생지점에서 100KM정도 남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200KM이상 떨어진 토쿄보다 오히려 방사능 오염이 훨씬 심한 곳이었다. 이 센터의 운영목표중에는 중간정도 오염이 된 지역에서도 안전하게 생활하는 방법에 대한 실험들이 있었다. 오랜기간 준비하고 조성해온 장소를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엔지니어출신인 노령의 대표가 센터의 운영방침과 목표에 이 영역을 추가시킨 것이었다. 그렇게 내 모험은 리스크지수가 한단계 높아졌다. 일년 정도만 지낼 예정이었기 때문에, 사실 이 실험은 결과를 알 수 없는 것이었고, 내게는 어쩌면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운 것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일상생활에서 늘 이 문제를 깊이 의식하고 일종의 안전수칙같은 것을 고려하며 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이를테면 장작을 태우고 난 재를 (농촌생활과 바이오매스에 대한 고려가 있었기 때문에 목재 스토브를 많이 사용했다) 매우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고 배웠다. 바람을 따라 숲에 내려온 방사능 물질이 나무와 목재표면에 붙어있고, 많은 목재를 태워서 남은 재는 상당히 고농축된 방사능물질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정기적으로 우리가 재배한 농작물이나 토양 등을 근처의 시민방사능측정센터 등에서 검사해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음식물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내 개인적인 모험과는 별개로 나는 일본에 오고 싶어하는 친지와 친구들에게 가급적 일본여행을 자제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마침 여자대학생인 친척 조카가 츠쿠바대학으로 유학을 오고싶어했고 우선 단기 연수를 온 김에 당시 토쿄에 머무르던 내게 조언을 청했는데 나는 재고해볼 것을 권했다. 위험하기도 하고 상당한 불확실성의 리스크가 있는 상황에서 굳이 일본으로 올 필요가 있냐고 되물었다. 2011년이므로 한국에서 여전히 일본문화가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은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한 것이었다. 물론, 40대 남성과 20대 여성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 스스로의 모험을 정당화한 이유였다. 내가 나스로 이주한 후에 조카가 내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일본으로 유학을 왔다는 사실을 나중에 전해들었다. 그리고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대부분의 일본인 동료들도, 단기간에 눈에 띄는 위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토쿄에 남아서 일상을 유지했다. 실질적으로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들은 그렇게 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회원으로 활동하던 에코문화NGO의 회원들, 그 중에서도 어린 아이를 가진 부부들중에는, 상대적으로 안전한다고 여겨지는 큐슈쪽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지금도 후쿠오카를 포함한 남부에 정착하여 10년 넘게 거주하고 있다. 나를 포함해서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거나 거주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모종의 결정을 내렸는데, 다들 자기의 상황과 양식에 따른 판단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삶이 바뀐 소수의 사람들의 결정을 가볍게만 볼 수도 없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내가 열성적으로 탈핵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탈핵운동을 하는 분들과 가깝게 지냈다. 탈핵 자체보다는 포스트후쿠시마라는 의제가 설정되면서, 기후변화로 시작된 생태주의가 시민운동/진보교육계에 확산되는 것에 참여하기도 하고, 그 과정과 참여자들의 다양한 면모를 관찰할 수 있었다. 이미 10년이 지났으니까, 조금은 냉정하게 당시를 돌아보면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에도 한국과 일본을 막론하고 핵발전과 관련해서 “선동적이고 과격한 언사”를 구사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아서 거부감을 느꼈다. 근거가 불분명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나 사진을 공유하면서 공포심을 자극하는 사람들은 특히 걱정됐다. 분명히 일종의 생태근본주의적인 태도나 선정주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10년이 지났지만 다수 사람들의 삶은 바뀌지 않았고, 그들의 삶이 후쿠시마 사태로 더 위험해졌다는 실증적 증거가 찬성론자와 반대론자가 합의하는 형태로 제시된 적이 없다. 분명히 당시 방사능오염의 위험성 주장에는 과장된 면이 적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쿠시마현을 비롯한 사고현장의 근처로 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측했던대로 이 지역 아이들의 갑상선암 발병율이 급증했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들이 있고 (30KM 권역내 바람의 방향 등의 이유로 오염이 심한 지역, https://www.pref.fukushima.lg.jp/site/portal-ko/ko03-08.html), 원자로는 여전히 처리가 불가능한 잠재적 위험상태로 놓여있다. 설사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해도, 그들이 몇세대에 걸쳐 돌려 받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건 안전하고 자유로운 일상적 삶이다. 최근 용산공원개방 규정이 공원 체류시간을 두시간이내로 한정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아이들이 마음놓고 옥외에서 긴 시간을 뛰어 놀 수 없다. 연간 피폭량을 안전기준 이내로 유지해야 하고 (일본 정부는 이 마저도 국제기준인 1밀리시버트의 20배가 넘는 수치로 조정해야 했다), 방사능 물질이 고여있는 핫스팟들이 여기저기 지뢰처럼 존재하기 때문이다. 탈핵운동의 와중에 일종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차피 원래 밥그릇이 너무 작다. 사회운동이나 정치가 어느 정도 연극적인 혹은 리츄얼의 측면이 있으니까 어쩌면 필요악인지도 모른다. 좋아하진 않지만,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도 핵발전이 미래의 주요한 에너지가 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시 제기되던 여러 문제들이 뭔가 혁신적인 기술에 의해서 해결됐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걸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는 주장을 들었을 뿐이다.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야기들이 있지만, 기술적으로 상당부분 검증이 끝나서 사회적, 산업적으로 전면적인 지지를 받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지난 몇년간 급격히 진행되는 기후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발발 때문에, 러시아의 천연가스와 석유에 의존하던 유럽의 에너지 정책이 혼선을 빚으면서, 핵발전의 과도기적 역할을 넘어 (기존의 핵발전소를 가능하면 오래 유지한다) 신규핵발전소 건설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소수 의견이다 ( #CNBC Why Nuclear Energy Is On The Verge Of A Renaissance? https://www.youtube.com/watch?v=NfNgRc4sJt8&t=226s).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중에 비전문가들은 또, 공통적으로 핵발전을 거쳐 미래의 핵융합기술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 (Could we see a nuclear power renaissance? https://www.ubs.com/global/en/wealth-management/our-approach/marketnews/article.1563394.html), 이런 언설 자체가 매우 정치적 수사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핵분열작용에서 발생하는 열을 이용해 고온의 증기로 터빈을 돌리는 매우 단순한 원리에 의존하는 현재의 핵발전소 기술과 핵융합기술은 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아마 신재생에너지 지지자들중에서 핵융합발전 기술투자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기때문에 이런 진영적대립과 원자력 발전이라는 개념의 혼돈을 이용한 화법이라고 보인다.

기술적인 이니시어티브를 가진 국가들중, 핵발전을 중시하는 나라는 아직 소수에 불과하다. 중국이나 러시아, 프랑스(?) 반면에 재생에너지나 관련 기술은 지난 10년간 꽤 많은 진전을 이루고 있다. 과학기술 발전이 정치적 관점, 산업의 구조와 연계돼 있는데, 서구의 주류 사회가 이런 선택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결과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한다.그림3) SMR은 기존의 대형원전에 비해 안전도가 매우 높다고 주장되고 있다. 현재 미국을 중심으로 개발이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 실전 배치된 사례는 없다 (사진출처, 매일경제)

핵발전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내가, 다시 열린 마음으로 핵발전을 바라보려고 노력했던 이유는 돌이켜 보건데 10년전 탈핵진영의 언설에 과장이 있다고 느끼기도 했고, 작년에 중국의 핵발전소 현황이나 투자와 관련한 언론의 보도를 접했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 기술의 수준이나 투자측면에서 세계정상급인 중국이 여전히 핵발전을 중시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내가 이해한 중국인들의 보편적 가치관은 태평천하(太平天下)라는 중화문명의 이상향이 보여주는 것처럼 매우 보수적이다. 생존과 안정을 최우선 순위로 자리매김한다. 과거의 공산주의 국가들중, 특히 현재의 러시아와 중국은 권위주의 국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문명적으로 핵과 같은 기술을 수용함에 있어서 감수성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급속히 도시화와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해도 농경을 근간으로하는 중화문명은 경작가능한 농경지를 근본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핵발전기술을 필요 이상으로 중시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토지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관념은 국제적인 지명도를 가진 SF작가 류츠신(劉慈欣)의 대표작인 <<유랑지구(流浪地球)>>라는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미국인들은 <<인터스텔라(inter-stellar)>>에서 지구를 버리고 떠나지만, 중국인들은 지구를 끌고 새로운 항성계를 찾아 나선다. 중국인들의 땅에 대한 문화적 집착이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중국이 핵발전 에너지 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 그리고 리스크 관리에 대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일까?

내 짐작으로 중국에서 핵발전이 여전히 현실적인 발언권을 갖는 이유는 체제의 특성과 국토의 크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정권은 국가주의 서사에 기대어서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고 한편으로는 소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존재하는 반대파들의 견제와 이에 동조하는 여론, 여기에 수반하는 사회적 합의를 위한 경제적 비용을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 특히, 대중문화에 드러나는 핵기술 예찬을 보면, 결국 핵발전이나 핵무기가 국가주의 서사와 연관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건국70주년을 기념해 2019년에 만들어졌던 “대놓고 애국주의” 상업영화 “나와 나의 조국(我和我的祖國)”의 한 에피소드에서는 중국 최초의 원자탄개발 당시의 이야기가 나온다. 핵누출사고가 발생했는데 한 연구원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영웅적으로 사고현장에 뛰어들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서 개발이 성공했다는 줄거리이다. 이와 다른 체제를 가진 한국에서도 “강철비”라는 영화에서 남북한이 주변 강대국에 맞서기 위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등장하는데, 이는 여전히 국가/민족주의 서사가 핵기술을 보유하기 위한 가장 유효한 수단임을 인증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또 “판도라”라는 핵발전사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핵발전의 위험성에 대한 공론장에서의 논의가 거의 불가능한 중국과 대조적이다.

또, 중국은 땅덩어리의 크기가 훨씬 더 많은 선택지를 부여한다. 우선 핵발전소나 방폐장과 같은 시설을 설치함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거나 사회적 발언권이 약한 약자들이 사는 지역을 선택하기가 쉽다. 최악의 경우에 사고가 발생해도, 인근 지역을 폐쇄하고, 주민들을 강제이전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중국국가의 집중화된 자원동원 능력과 이를 뒷받침하는 테크놀로지 수준이 상상을 초월한다. 그렇게 해도 나라가 망하지는 않을 거라는 이야기이다. 얼마전 초거대 도시 상하이를 두달간 완전봉쇄하기도 하고 전파력이 강한 오미크론에 대해서 여전히 청정정책을 유지하는 사례를 보면서,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타격이 적지 않을 것이다. 소련의 붕괴나 일본의 쇠락이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한국은? 특히 10개의 원자로가 밀집된 고리핵발전소가 있는 부산, 울산 지역은 어떠한가? 핵발전소 반경 30KM이내에 인구 300만이 넘는 대도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것은 과연 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리스크인가? 만일 사고가 일어난다면 10개의 원자로 대부분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고 여기서 누출되는 방사능의 분량은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많을 것이다. 최소한 경상남도와 부산을 100년간 우리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 방사능은 또, 바람을 타고 이웃 일본의 큐슈를 직격할 것이다. 우리랑 여러면에서 비슷한 타이완이 핵발전소의 건설을 중지한 것도 같은 이유때문이다. 국토가 좁은데 인구는 많으니까. 내 실존적 경험과 한반도의 지형적 특성과 제약, 그리고 한국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리스크(?)를 고려해서 “현실주의”적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문재인 정부가 핵발전과 관련해서 취한 정책들이 편향적이거나 비합리적이라는 주장들이 그래서 나는 오히려 과격하게 느껴진다. 아래 뉴스타파 보도를 보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https://www.youtube.com/watch?v=BHBuumxvhiQ&t=1626s )문재인 정부는 가장 오래된데다 수명연한이 다된 고리1호기를 중지시키는 상식적인 결정을 내리고 이를 집행한 것 뿐인데도, 이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나마도 원래 연장결정이 제대로 규정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미비점이 절차적 정당성의 시비 대상이 되고 있다. 그야말로 꼬리도 아니고 꼬리의 털끝 한자락이 개를 흔들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조금만 더 천천히 일을 진행할 것이지, 왜 못참고 서둘러서 역공의 빌미를 제공했느냐는 비판도 받는다. 뇌피셜을 적용해보자면,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이자 퇴임후 돌아가서 살게 될 바로 그 지역이 위험에 빠질 것에 대한 위기의식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그림4)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정책을 선언했지만, 논란끝에 고리1호기를 영구정지한 것 외에 실질적인 탈원전정책을 집행하지는 못했다.

나는 소위 “한국의 보수”나 윤석열 대통령에게 갈수록 실망을 하고 있다. 어렵게 집권을 했는데도 책임감을 가지고, 실력과 노력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계속 자기들 열성지지층이나 좋아할 선동적이며 비합리적인 행위들과 이를 변호하기 위한 말장난을 하든지, 하드한 공권력장악에만 골몰하는 것으로 보인다. 탈원전정책에 대한 찬반입장을 넘어 “원자력발전기술의 진흥을 위해 안전쯤은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대통령의 표현은 누가 봐도 수위를 한참 넘은 반지성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이다. 보수라는 가치도 대단히 스펙트럼이 넓은 것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는 민주당이 소위 이념적 보수 (예) 민족주의)이고, 국민의 힘에서 이야기하는 ‘보수’는 그냥 현실주의논리라고 생각한다.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의 논리 말이다. 어쨌든, 이런 논리를 그냥 비윤리적이고 몰가치하다고 일방적으로 비판할 생각은 없다. 공허함보다는 차라리 알고 취하는 거짓이 더 참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최근에 번역을 마무리하고 있는 중국학자 샹뱌오의 글을 조금 인용해보자.

예를 들어 “진(真)”과 “실(試)”, “가(假)”와 “허(虛)”가 있습니다. 원래 우리가 주로 접하게 되는 것은 “허(虛)”이지 “가(假)”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거짓말(假話)을 하려면 전제는 진실이 뭔지 알아야 명확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뭐가 진짜(真)이고 뭐가 가짜(假)인지 모르면 횡설수설하게 됩니다. 이게 바로 “허(虛)”의 상태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싫어하는 건 바로 이런 “허(虛)”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거짓말(假)을 해도 받아들일 겁니다. 필요할 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죠. 하지만 공소한(虛) 이야기를 하는 건 안됩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사람들이 반감을 갖는 건, 이런 이념이 틀렸거나 거짓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너무 속빈 강정(虛) 같다는 것이죠. 직접적으로 표현해야하는 자기자신은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참된(誠實) 자아가 있는데 정직하지만 위축된 자아입니다. 그래도 속이 비고(虛) 허우대만 멀쩡한 자아보다는 백배 낫습니다.

하지만 참된(誠實)후에 진실에 대해서 다시 한 걸음 더 깊이 생각해보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참되다는 것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죠. 그래서 도대체 무엇이 “진(真)”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게 뭔지 직접적으로는 느낌이 오지 않지만 보호하고 추구해야 하는 원칙같은 것이죠. 그리고 무엇이 “실(試)”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자기 생활경험에서 오는 것이고,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것인데, 분명하지가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선배들을 거스르고,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서 반감을 느끼는 건 그래서 참된 것(誠實)입니다. 하지만 이 참된 마음이 정말로 현재의 실천에 대한 더 좋은 이해를 대표할까요? 우리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표현합니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들 포퓰리즘이 전세계적 현상이 됐다고 느낍니다. 이건 상당부분 그 “성(誠)”과 “진(真)”의 균열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에게 표를 주는 사람들 상당수가 성실한 생활인들입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학자로서 제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사고의 도구와 표현의 도구가 충분히 다양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산층의 정치적 올바름이나 보편가치가 거의 공공담론을 독점하고 있고, “진(真)”에 대한 유일한 표현방식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모두가 “참된 마음(誠)”에서 시작해서 천천히 참된(誠實) 방식으로 자기 경험을 써내려가기 시작합니다. 많이 쓰다보면 진짜가 남게 될 겁니다. 그때 “쪼잔하게” 다투는 식의 “참된 태도(誠實)”는 지나가고 천천히 참된 느낌과 정말 중요한 일들을 결합해서 볼 수 있게 되겠죠. 이게 제가 희망하는 겁니다 (샹뱌오 “방법으로서의 자기”)

200년전엔 이 논리에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온 세계가 식민지 경쟁에 골몰한 시절도 있다. 지금도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기저에 이 논리가 여여히 흐른다. 큰 구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 개체로서 생존을 추구하면서 이 논리를 많든 적든 받아들이고, 삶에 적용한다. 그건 아무리 이상주의적인 사람이고, 진보주의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용한 현실주의 때문에 말과 삶이 달라지며 ‘위선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현실주의자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위선자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찐한국보수”는 거짓말장이가 될 수는 있어도, 위선자는 아니다. 이에 비하면 내가 살고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의 공산당은 전통적 관념에 더해 서구에서 받아들인 공리주의적인 사고나 (다수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성과를 중시), 개별적 인간이나 생명의 가치보다 기능을 중시하는 도구이성, 그리고 분배를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색채가 더해진 보수주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윤정부가 핵발전을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에 성공했으니, 이걸 추진한다고 해서 근본적으로 막을 방도는 없을 것이다. 원하는 대로 진행해보시길 바란다. 법절차와 규정을 제발 준수하고, 어쨌든, 조금 더 정제된 언어로, 반대하는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을 하기 바란다. 왜 한국이 세계의 주류적 흐름과 달리 가야 하는지 말이다. 또, 작년에 민주당에서도 송영길 대표가 신기술인 SMR(중소형 원자로)에 대한 지지여부를 논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계속 검토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하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런 얘기도 덮어놓고 반대할만큼 우리 국민들 대다수가 반지성적이지 않다. 아직은 빈약한 K담론을 좋아하지도 않지만, 이것도 K라고 한다면, 글쎄 그런 K는 “광기어린 폭주열차”의 다른 이름이라고 밖에 나는 이해가 안된다.



*사족

나는 핵발전에 대한 심오한 성찰에 기반해 반대에 나선 몇몇 일본인 연구자들의 담론을 접하고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그중 하나는 핵발전은 늘 약자의 희생을 바탕으로 강자들이 이익을 누리는 정의롭지 못한 구조에 기반한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핵발전소내에서도 가장 위험한 일을 맡는 사람들은 고급 엔지니어가 아니라, 하청용역 노동자들이다. 후쿠시마에서도 사고현장을 정리하는 데 동원됐던 건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해서, 홈리스에 가까운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사람들이었다. 높은 일당으로 그들을 유혹했지만, 수많은 단계를 거치는 하청과 재도급을 통해서, 생명을 건 노동의 댓가중 일부만이 그들에게 돌아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서사이다. 자신이 사회적 약자이거나 약자의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여전히 귀를 기울여 볼만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에 대한 본능을 좇아 심리적으로 안전한 길을 택하는데, 그것은 내가 약자나 소수자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강자들의 논리를 수용하고 내면화하는 것이다. 그게 앞서 이야기한 “현실주의”논리이다.

또, 이런 현실주의라면, 내가 위에서 주장한 “현실주의” 논리도 아마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서울중심주의가 갈수록 강화되는 가운데 지방이 소멸하고, 식량도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토피아이든 디스토피아이든 메트로폴리스의 물리적 환경이나 가상현실에 기반한 K-컬쳐와 K-테크놀로지가 주류의 정서로 자리잡는 상황이 강화된다면 대다수 한국인들의 “현실”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10년전 토쿄와 나스에서의 경험을 공유한 것은 이분들의 상상력과 공감을 조금 자극해보려는 의도가 있다. 꼭 공포감과 비장함을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별탈없이 잘 살고 있는데, 나스의 생활이 내게 남긴 가장 큰 자산은 중년이후의 삶이라면 대도시보다는 소박하고 단순한 시골살이 혹은 교외살이가 훨씬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점이다. 그게 지금의 내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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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패권에 대응하여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중국과 BRICS.

김유익


和&同 青春草堂대표. 부지런히 쏘다니며 주로 다른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가진 이들을 짝지어주는 중매쟁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아저씨. 중국 광저우의 도시와 농촌이 공존하는 오래된 마을에 거주하고 있는데 젊은이들이 함께 공부, 노동, 놀이를 통해서 어울릴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나가고 싶어한다. 여생의 모토는 “시시한일을 즐겁게 오래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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