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pril 7, 2022

알라딘: 미아로 산다는 것 - 워킹푸어의 시대, 우리가 짓고 싶은 세계 박노자 2021

알라딘: [전자책] 미아로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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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미아로 산다는 것 - 워킹푸어의 시대, 우리가 짓고 싶은 세계 
박노자 (지은이)한겨레출판2021-05-20 

책소개

우리가 돌아갈 집은 어디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가난과 고독이 일상의 풍경이 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액체 같은 사회를 뿌리 없이 허우적댄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이후 20년, “미아”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 박노자(朴露子)는 지금 자신의 자리를 되돌아본다. 소련에서 태어나고, 러시아에서 자라, 한국에서 공부하고, 노르웨이에서 가르치는 그는 어떻게 해서 “탈남(脫南)”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한국인 박노자는 스스로 집을 떠난 사람이 되어 2020년의 한국을 다시 사유한다. 저자에게 한국은 대다수 구성원이 ‘집’ 없이 미아로 살아가는 사회이다. 사회 구성원의 47퍼센트가 자기만의 집 없이 떠돌아야 하고, 대다수 청년이 자기만의 자리를 찾을 여유 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미아가 된 구성원들이 연대가 아닌 혐오로 고립을 벗어나려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그는 우리에게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안전한 ‘집’을 짓자고 제안한다.
목차
서문 | 미아의 단상

1장 편안함의 대가
최악의 독약, 권력 | 떠나온 나라들이 남긴 환상통 | 나의 집은 어디인가
중독론 | 덕후라는 운명 | 도대체 술을 왜 마시는가 | 탈남脫南이라는 선택

2장 남아 있는 상처
내면의 풍경 | 공부의 의미 | 출산율 제로 사회 | 한국인 되기 | 가족의 종말
섹스의 실종 | 그들은 바보인가 | 추태의 수출

3장 한국, 급級의 사회
급級의 사회 | 죽음의 등급 | 굿바이, 서울공화국 | 70퍼센트짜리 국민
내가 낙관하는 이유 | 영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 자기계발서 전성시대
전향의 나라 | 공적인 것을 지키지 못할 때 | 어느 20대가 꿈꾸는 세상
괴물을 낳는 피라미드 | 존엄할 권리 | 탈脫학벌, 완전하고도 철저한 파괴

4장 과거의 유령들
트라우마 해결의 전제조건 | 일본에 대한 기억의 지형 | 우리의 거울
과거가 돌아온다 | 세계사적 맥락에서 역사 보기 | 혁명의 조건 | 그래도 한국은
어떤 통일인가 | 폭력, 이 세계의 공통분모 | 상류층의 암호

5장 전쟁이자 어머니인 세계
질투의 힘 | 영구적인 전쟁 | 진실의 순간 | 개인의 범위 | 두려움의 내면
국가, 사람을 죽인다 | 악몽에서 깨어나려면 | 누구에게는 전쟁이지만 누구에게는 어머니다
아주 커다란 퇴보 | 강도들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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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저는 가끔 제 삶을 돌이켜볼 때면 이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미아'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P. 26
반면 한국에 가끔 들어갈 때면 뭔가 집으로 돌아간다는, 그런 느낌이 분명히 있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아주 실감나게 일체감을 느끼게 되죠. 그것도 저절로 말이죠. 물론 일체감을 느끼는 만큼 괴리감도 바로 느껴집니다. 예컨대 사립 대학 등 한국의 ‘조직’ 속에서 혹시나 밥통을 갖고 살게 될 경우에는 할 말, 못 할 말을 아주 잘 걸러서, 두세 번 생각하고 내뱉어야 한다는 것부터 바로 느끼게 됩니다. 한국의 ‘조직’들에는 법률과 공식적인 ‘룰’ 외에도 여러 가지 불문율들이 많으니까요.  접기
P. 30
중학교 시절 가장 큰 관심사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마야족 도시국가들의 사회경제적 형태였습니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가야사에 빠지고 말았죠. 참, 당장의 밥벌이나 입시 성적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유카탄 반도나 낙동강 유역의 고대사에 신경 쓸 수 있게 해준 구소련 체제에 다시 한 번 마음 깊이 감사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만약 제가 대한민국에서 같은 방식으로 자랐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접기
P. 62
코로나19로 학교들이 문을 닫아 전국의 아이들이 워킹맘들의 24시간 일감이 되었었죠. 그렇다고 해서 그 워킹맘들의 직장 일을 누가 줄여주었나요? 사실 양성 평등 정책 차원에서 당연히 워킹맘의 업무를 줄여주었어야 하지만 그렇게 해준 직장이 있었나요?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입니다. 그러니 제게 놀라운 것은 한국의 세계 최저 출산율, 즉 0.9 수준의 출산율이 아닙니다. 제게 놀라운 것은, 이와 같은 반여성적 환경에도 아직까지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것, 즉 출산율이 아예 0이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접기
P. 80
생각해보면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죠. 남자가 ‘피해자’라고? 산업화된 국가 가운데 가장 반여성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나라,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남성의 63퍼센트에 불과하고 여성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되어버린 이런 사회에서 남성들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 처음에는 거의 반신반의할 정도입니다.
P. 82
도대체 한국 남자들은 바보인가요? 신자유주의가 상황을 악화시켰다면 신자유주의를 상대로 투쟁하고 노동당이나 정의당에 대량 가입해야 답이죠, 신자유주의로 인해 남성보다 훨씬 많은 피해를 보는 여성들에게 도대체 왜 한풀이를 하는 것일까요? 강자에게 얻어맞고 약자를 때리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물론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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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노자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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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으로,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다. 2001년 귀화하여 ‘박노자’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되었다. 스승 미하일 박 교수의 성을 따르고, 러시아의 아들이라는 뜻의 ‘노자露子’를 이름으로 삼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극동사학과에서 조선사를 전공하고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교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한국사회의 뿌리 깊은 전근대성에 대한 근본 성찰을 가능케 하는 날카로운 칼럼들을 써왔으며, 역사학자로서 탈민족주의적 시각으로 한반도의 역사를 새롭게 보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접기
최근작 : <미아로 산다는 것> … 총 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당신들의 대한민국》 이후 20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박노자, 당신과 나, 우리의 오늘에 대해 질문하다

우리가 돌아갈 집은 어디일까?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가난과 고독이 일상의 풍경이 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액체 같은 사회를 뿌리 없이 허우적댄다. 《당신들의 대한민국》 이후 20년, “미아”로 살아가는 사람이 된 박노자(朴露子)는 지금 자신의 자리를 되돌아본다. 소련에서 태어나고, 러시아에서 자라, 한국에서 공부하고, 노르웨이에서 가르치는 그는 어떻게 해서 “탈남(脫南)”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한국인 박노자는 스스로 집을 떠난 사람이 되어 2020년의 한국을 다시 사유한다. 저자에게 한국은 대다수 구성원이 ‘집’ 없이 미아로 살아가는 사회이다. 사회 구성원의 47퍼센트가 자기만의 집 없이 떠돌아야 하고, 대다수 청년이 자기만의 자리를 찾을 여유 없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미아가 된 구성원들이 연대가 아닌 혐오로 고립을 벗어나려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그는 우리에게 인간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안전한 ‘집’을 짓자고 제안한다.

“저는 가끔 제 삶을 돌이켜볼 때면 이 삶을 정리할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미아’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인간이 군중 동물인 만큼 그가 속해온 군중의 ‘문화’ 역시 인간에게 집이 됩니다. 저는, 제가 한때 태생적으로 흡수한 문화를 저의 물리적인 자녀에게도, 저의 제도적 자녀, 즉 학생들에게도 전해줄 수 없습니다. … 그런데 생각해보면 ‘미아’로 산다는 게 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많은 20대 한국인들이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를 중소기업에 다니고, 고시원, 원룸,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장시간 노동으로 ‘연애’ 같은 장기적 관계를 유지할 에너지마저 갖지 못합니다. 그들은 뿌리 뽑힌 채 그 어떤 보장도 없이 ‘액체 근대’의 노도를 혼자 몸으로 헤엄쳐 보이지 않는 육지를 찾아야 합니다.”_7~9쪽

한국, 서열과 급의 사회

저자는 한국을 “급(級)의 사회”로 규정한다. 어느 사회든 서열이 있지만, “대한민국의 서열은 그냥 수직적인 직선”이고 “노르웨이에 서열이 있다면, 대한민국에는 서열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대가 사는 거주지의 크기, 학벌, 직업을 기준으로 관계의 친소(親疏)와 존대의 정도를 결정한다. 우리 사회의 급은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죽음에도 등급이 있다. 가난한 노인,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은 이름 없는 단신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다. 2007년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 외국인 보호소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사무소 직원들은 외국인 노동자가 도주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잠긴 문을 열지 않았다. 그 결과 외국인 노동자 열 명이 화재로 사망했고, 한국 정부는 어떤 사과나 약속도 없이 1인당 1억 원을 유가족에게 보상하고 사건을 마무리했다. 2018년 한국 노동연구원이 20~50대 직장인 2,500명을 조사한 결과 66.5퍼센트가 지난 5년 동안 직장 내에서 괴롭힘을 당했다고 대답했다. 직장 생활 중에 폭언을 한두 번 이상 들은 사람은 열 명 중 아홉 명이고, 폭력을 경험한 사람도 12~17퍼센트에 달했다.

새로운 가난, 관계 맺기 불능, 사색의 증발, 타자 혐오…
불안과 가난, 고독의 무게를 감당하며
미아 아닌 미아로 떠도는 시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1장에서 저자는 자신의 자리를 되돌아본다. 그는 러시아에서 태어났고, 한국에 귀화해 한국인이 되었지만, 노르웨이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저자는 자신이 왜 탈로(脫露, 탈러시아)와 탈남(脫南)을 선택했는지 돌아보며, 자신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담담히 서술한다. 더 이상 “갑질이 일상화된 한국 대학의 세계”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고, “교수님들이 벌이는 추태들”과 “조교들이 그들의 커피 심부름을 하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데 해방감을 느끼지만, 모어로 말하고 쓰지 못하는 삶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2장에서는 우리 사회의 가장 내밀한 곳, 즉 가족 질서의 실상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은 “산업화된 국가 가운데 가장 반여성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나라,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남성의 63퍼센트에 불과하고 여성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되어버린” 사회이다. 저자는 한국의 “성난 남성들”에게 왜 “강자에게 얻어맞고 약자를 때리는지” 묻는다.
3장에서 저자는 우리 사회를 “급의 사회”로 규정하며 모든 사회 구성원의 존엄할 권리를 절실하게 요구한다. 우리 사회에서 소득 상위 1퍼센트는 가구당 평균 6.5채의 주택을 소유하고 상위 10퍼센트는 전체 부동산의 절반을 소유하지만, 47퍼센트는 집 없이 월세와 전세를 전전한다. 한 사람이 국내총생산 19퍼센트를 차지하는 대형 기업을 세습하고, 교회의 담임목사 자리를 세습하고, 부동산을 세습한다.
4장에서는 역사적인 차원에서 한국 사회가 겪은 상처를 톺아본다. 저자는 “과거 청산은 예방 접종”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과거 청산을 요구해야 하는 이유는 개인이나 집단의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현재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원이 점점 커지듯이 ‘나’의 자리에서 시작된 사유가 5장에서 지구적 차원에 이른다. 인간 본성에 내재된 질투의 감정을 신자유주의와 연결하고, 전쟁과 자본주의의 관계를 휘발유와 자동차에 비유한다. 저자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를 겪는 모든 사회가 ‘진실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가 주목하는 것은 불평등과 격차이다. 모든 나라에서 공공 부문 종사자, 대기업 직접 피고용자들은 코로나19로 큰 불이익을 보지 않은 반면, 서비스 부문과 유통 부문의 영세 기업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 속담에 “Кому война, кому мать родна”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는 전쟁이지만 또 누구에게는 어머니 같다는 말입니다. 즉 전쟁은 누구에게는 그야말로 참사일 뿐이지만, 누구에게는 자비로운 어머니처럼 필요하고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이야기죠. 자본주의적 성장은 늘 전장에서의 살상을 포함한 각종 참극을 기반으로 합니다.”_239쪽

변화는 안으로부터 온다. 저자는 이 디스토피아 같은 세계에서 혁명은 결국 나와 우리를 회복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라고 말한다. 스스로에게 ‘나의 생각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우리가 함께’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혁명적인 발상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돌아갈 수 있는 집을 “공감과 연대, 협력”을 통해서 지어야 한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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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글에서는 박노자 교수의 확고한 신조, 방향성 같은 것이 느껴졌다면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듯 미아로 떠도는 듯한, 길을 잃은 듯한 인상을 준다. 액체 근대를 갸웃거리며 살아가는 주변인의 삶의 모습을 본다.  구매
깐따삐야 2020-12-10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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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독서노트부터.




신자유주의화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근 약 10년 동안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노동자 계층이 생깁니다. 바로 긱 노동자, 즉 형식상 노동자가 아닌 자영업자로의 변신을 강요당하고 노동자성 자체를 부정당하고 이제는 매일 출근할 ‘직장’이 없어진 노동자 말이죠. 구미권의 긱 노동자에 해당하는 한국적 용어는 ‘일당 잡부’나 ‘프리랜서’, 아니면 두 개념의 ‘사이’일 것입니다. 한국의 경우 육체노동을 담당하는 ‘일당 노동자’와 고숙련 ‘프리랜서’는 보통 직업의 서열에서는 서로 상당히 다른 입장에 처합니다. 구미권의 긱 노동자는 그 사이에 있습니다.
우버(Uber)의 운전기사, 딜리버루(Deliveroo)의 배달부, 태스크래빗(Taskrabbit)의 각종 도우미……. 공사장의 일당 노동자나 프리랜서 동시통역사와 달리 긱 노동자들은 인간의 모습을 한 뚜렷한 ‘사용자’ 자체가 없습니다. 인터넷 플랫폼이 운전기사, 배달부, 쇼핑 도우미, 목수 등을 고객과 ‘맞추어주고’ 수입의 20~30퍼센트를 떼어갈 뿐, 그 외의 책임은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긱 노동자에게는 직장이 없기에 휴가도 연금 저축도 병가도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19세기 중반 런던의 일당 노동자는 그나마 하루 벌이였지만 긱 노동자의 벌이는 어떨 때는 건당, 어떨 때는 시간당입니다. 평생, 1년, 한 달은 그렇다 치고, 하루조차 내다볼 수 없고 계획할 수 없는, 그런 노동과 삶의 형태죠. 97%

요 앞에 우리 역시 전쟁특수로 부국이 됐단 말에도 공감이 갔다.
프리랜서나 자영업자라는 말이 허울좋을 뿐이고(허울도 실속도 좋은 직업이 있지만 아 저런 사람도 프리랜서야? 싶었던 분들을 보면) 사실 불안하기 그지없고 보상/보장되는 것 없이 책임만 큰 거 같았는데 이런 노동자를 긱 노동자라고 하는 걸 처음 배웠다.

공장에도 그런 분들 꽤 있다. 사장님이라고 불리지만 일손이 필요한 곳에 가서 단기에 특정 요일에 불려서 일하시는 분들. 바지 사장이랑은 또 다르지만 말이다.




정말 내가 그동안 확고하게 생각하거나 당연하다고 느낀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쓰면 쓸 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박노자 교수님과 내 정치적 입장이 많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진 글을 읽고 생각이나 이해의 깊이? 넓이가 더 넓어진 기분이다. 입장이 다른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고 내 입장은 어떤지 혹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생각할 수 있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는 한국을 애틋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내쪽은 좀더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는 반면 교수님은 한국의 외부에서 러시아계 한국인으로서 한국을 바라보니까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보시는 것 같고. 그 뿌리가 사회주의라 좀 더 독특했던 것 같다.
아무튼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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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1-12-12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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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기대하는 나라와 내가 기대하는 나라는 같은가 새창으로 보기
 

내가 책을 미친 듯이 보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나의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다.



40년동안 알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전혀 알지 못함을 알았을 때.



그동안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진리가 아닌 하나의 가설임을 알았을 때.



지금까지 A라고 알고 있던 것이 사실은 B였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알아차림이 좋았다.



제대로 알고 싶었다.



그동안 알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반성을 많이 했다.



그래서 더 미친 듯이 매달리고 있다.



역사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경제에 대해서..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보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 읽은 [미아로 산다는 것]은 혼돈 그 자체였다.



도대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지?



난 이 사람의 말에 왜 자꾸 반박이 드는 것이지?



난 여전히 '세뇌'당한 사람인 것인가?



아니면 이 박노자라는 분이 '사회주의'라는 것에 지독히 '세뇌'당한 것일까?



통합과 연대를 이야기하면서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보면서 .. 과연 통합과 연대는 어디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내용을 전하면서도 문장에서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너무 극명하게 보였다.(나의 착각 혹은 오해일수도 있다.)



그 일례로





(209) 북파 공작원들이 북에서 살인, 파괴 등을 했으며, 북에서는 '공비'라고 불리는 공작원들이 남으로 내려오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북파 공작원들은 살인 파괴를 행한 자들이고, 북의 공작원들은 그냥 남으로 내려온 사람. 그들이 민간인도 학살했던 '무장공비'에 대해서도 그들의 행위보다는 그냥 98년이 마지막이다. 라는 문장이다. 그냥 사실을 전하는 것 같지만 문장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렇지가 않다. 나의 삐딱한 시선이 문제일까?





(75) 한국에서는 '사회주의'가 나쁜 것으로 이식되지만, 사회주의야말로 셋집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월세나 전세 부담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합니다.





셋집살이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박노자씨는 국민 모두라고 이야기하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무조건적인 약자 편들기라는 것은 공평한가? 셋집살이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는 무슨 뜻으로 다가올까?



무조건 반감만 들었던 것은 아니다. 3장 한국 급의 사회 편에서는 격하게 공감했다.



이러한 급의 사회를 해소해나가기 위한 교육혁명의 필요성도 충분히 공감한다.



정말 열심히 읽었다. 밑줄 쳐 가며..



(읽고 나서 누군가에게 나눔 할 예정이라 최대한 깨끗하게 보려고 노력하며..)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은..

한쪽의 지나치게 편향된 이야기. 연대와 통합을 말하고 있지만,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은 아닌 거 같다.

하지만 분명 이러한 이야기들은 필요하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절대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 목소리가 분명 나와야 한다.

그래야 기득권들이 자신들 마음대로 하려고 했던 것들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질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연대와 통합을 말하는 자들 또한 자신들의 생각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과 수용범위를 넓혀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냥 탁상공론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잠재울 수 있는 정말 혁신적인 대안을 제시해주기 바란다.

한편 인류의 역사상 진정한 평등이 이루어졌던 시대가 있었던가 생각해본다.

진정한 평등이 무엇인지?

만일 평등이 정말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좌파라고 말하는 이들의 생각의 한계도 느끼고

우파라고 말하는 이들의 편협함도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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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디나 2020-12-27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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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대한민국' 이후 박노자님의 글은 처음이네요. 그 때도 이번에도 느낀 거지만 국적이야 귀화해서 한국인이지만 태생은 러시아인데 국어를 너무 잘 구사하고 국사를 저보다 백배는 더 잘 아는 거 같아서 놀랍습니다. 박노자님도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다소 보수적인 성향을 띄게 되기 마련이던데 이 분은 전반적인 포지션이 그 때도 지금도 여전히 급진적인 느낌입니다. 우리나라는 좌파라해도 거의 중도 우파에 가깝던데 이 분은 확실히 좌파인 거 같아요.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있어서 그런지 언제나 부러운 북유럽의 정치경제문화복지와 대한민국의 그것을 비교해서 설명해주는 부분이 흥미로웠고,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은 잘 알겠는데 그 대안에 대해서는 말을 좀 아끼는 느낌이었어요. 머 현실적인 대안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부분이 좀 아쉬웠어요.




37.

이런 '자기 일에의 집중'은 때로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일반의 재가자(?)들은 덕후에게 좀 관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만큼 덕후는 아주 민감하고, 그만큼 덕후의 삶은 1분 1분이 세상 모르는 고통이 연속일 수도 있다는 것이죠. 덕후의 전형인 천재적 시인들이 하나같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원인은 뭘까요? 그들에게는 '사회'라는 것 자체가 엄청난 부담에 해당되고, 몸이라는 자기 자신의 궁극적인 물질성조차 감옥으로 느껴집니다. 시 창작 과정에서 '접신'과 같은 체험을 하는 시인에게는 죽음이야말로 해방이고 해탈입니다.


이 부분 읽고 저는 빵 터졌습니다. 박노자님이 어떤 사람인지 좀 알꺼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런 급진적인 성향의 정치경제를 주장하는 책에 이렇게 낭만적인 이야기라니ㅋㅋ 저도 이 단락에 공감합니다. 꼭 요절하는 시인 아니더라도 먹고 살기 힘들지만 포기하지 못하고 예술 안하면 죽을 꺼만 같은 예술가들에게 해당되는 말인 거 같네요. 정신적인 무엇가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활동와 신체라는 물질성에서 벗어나야 더 멋지고 위대한 작품이 탄생할 듯 합니다. 그런데 이 단락 바로 뒤를 이어서 '도대체 술을 왜 마시는가' 에서 스스로 완고한 초강경 금주가이고 술을 혐오한다는 말을 해서 약간 실망스럽습니다. 저는 술을 좋아하고 즐겨 마십니다. 술이 저런 '물질성'을 벗어나서 '정신성'으로 향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많이 되고 좋은대요. 이름난 시인이나 예술가들이 괜히 알콜중독자겠어요?ㅋㅋ


박노자님은 코로나19와 관련하여 발생할 심각한 경제 공황으로 인해서 '다시 마르크스로!' 회귀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답니다. 저는 이 주장이 왠지 약간 허무맹랑해보여요. 제가 나이가 들면서 너무 보수적인 성향을 갖게 됐나싶기도 하지만 아직도 경제제도에서 혁명이라고 표현될만한 변혁을 기대하는 사람이 있구나 싶은 것이 신기하기도 했구요. 경제 공황이 생길 수도 있지만 이미 많은 것들이 빨리 발전하고 대처되는 세상이니 조만간 백신이 개발되거나 좀 더 나은 방역법이나 치료법이 나오는 것이 경제제도가 바뀌는 거보다는 더 현실성 있는 주장 아닐까 합니다. 


또, 한국의 '열공 사회', '열공 강박증'의 단점을 제거하고 장점을 살리기 위해 '학벌 사회의 해체'를 주장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기업이나 대학에서 수도권 대학의 인재 한 명을 뽑으면 지방대의 인재 한 명도 반드시 같이 뽑는 식의 채용 방식을 예로 듭니다. 노르웨이에서는 그렇게 하나봅니다. 찬성합니다. 사실 고등학교 성적으로 인생의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버리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공부를 더 잘 하고 싶은 마음이 대학 가서 생길 수도 있고, 기업에꼭 필요한 인재가 공부만 잘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을까요? '출산율 제로 사회' 라는 꼭지는 통째로 여기다 옮겨두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듭니다. 북유럽 복지 선진국가 노르웨이와 우리나라의 각종 현상과 제도 중 가장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 남성의 하루 평균 가사 노동시간 (한국 18분, 노르웨이 2시간 36분)과 여성 역차별정책인 듯 하네요. 많이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미흡하고, 책에도 나오지만 가부장제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된 젊은 남성들의 상실감, 상대적 박탈감도 이해는 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가족, 영어, 계급, 인권, 학교폭력, 삼성, 북한, 통일등등 여러 분야의 대한민국의 현실에 대한 박노자님의 견해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 인식과 문제 제기는 좋았지만 해결 방안이나 대안 제시는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위정자들이나 거대 기업의 경영자들이 정책을 바꿔주길 기다리고만 있지 말고 '다같이 행복하게 살 권리'를 방해하는 각종 문제들을 개인 각자가 인식해서 내면에서부터 변화를 시켜보는 것이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변혁을 가져올 수 있다는 메세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진보'란 바로 법률의 진화 등이 뒷받침하는 암묵지와 통념의 점차적 '축적'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오래 걸리기 때문에 가끔은 느린 템포에 엄청난 답답함을 느끼게 됩니다. (···) 비록 느리다고 해도 암묵지나 통념의 진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진보'입니다. 느리게나마 그런 진보가 이루어진다면 특정 사회에 대해 그래도 낙관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 사회에 대해 장기적으로 낙관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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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딩투데이 지원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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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향 2020-12-28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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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로 산다는 것 새창으로 보기


소련에서 태어나 러시아에서 자라고 한국에서 공부한 후 노르웨이에서 정착한 한국 국적일 가진 학자 박노자가 바라본 대한민국의 현실을 함께 들여다본다. 
 
한국에서 부재한 보편적 2인칭 대명사를 들어 급級의 사회를 지적한다. 2인칭 대명사는 기득권층과 하층민을 극단적으로 나누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급'이 구분되면 관계의 친소와 말의 높낮이를 맞추고, 이를 처세의 기본 기술로 익혀 살아간다. 심지어 죽음에도 급이 있다. 가난한 독거 노인의 죽음, 비정규직 노동자의 산재 사망, 3D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 등 '급'이 없는 이들의 죽음에는 애도는 고사하고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각종 갑질에 질려 모국을 떠나는 이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직적 서열을 완화할 수 있는 길은 권력의 분산과 정책적 평준화다. 서열의 세습과 신분 피라미드를 당연시 여겨서는 안되며 대학 평준화, 의료 공공화, 재분배 시스템을 통한 재산 격차의 억제 등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최악의 독약은 권력이다. 권력은 타자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고 이를 타자에게 합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힘을 뜻한다. '권력'이라는 단어 안에도 불평등을 내재하고 있다. 권력을 아예 없앨수는 없더라도 권력을 최소화하고 분산시켜 견제해야 한다.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모든 사람은 모두 노동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동자'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대다수다. 인공지능 시대를 논하면서 대한민국 사회는 여전히 학벌로 서열을 정하는 극단적 학벌위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다. 개인 각자가 노후를 책임져야 하는 나라에서 자식의 학벌을 위해 경제력을 쏟아붓고, 이것이 부담스러우면 아이를 낳지 않는다. 출산율을 높이고 싶다면, 출산 및 양육지원금보다 사회 구성원의 일생이 오로지 성적과 취업만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인프라를 만드는 것, 여성 노동을 포함한 모든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는 사회 의식이 우선해야할 일이다. 
 
종종 '자국민'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자국민이란 제 나라 백성, 즉 해당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다른 민족보다 해외 국적을 취득하고 해당 나라에서 살고 있는 해외 이민자에 더 호의적이다. 민족적 정서를 기반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를 넘어선 순혈주의를 우려하는 것이며, 정작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둘러보면 좋겠다. 
 
극우 언론들은 사회적 '질시'에 기대어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한다. 신자유주의가 추구하는 메커니즘에는 무한하고 영구적인 '경쟁'을 기반한다. 여기에는 '공정'이 사라진 평가만을 인정한다. 수 년간 같은 자리에서 저임금 착취를 당하며 업무를 배우고 경력을 쌓아도 '시험 절차'에 따르지 않으면 '부정의'가 된다. 청소년기에 아무런 경험도 없이 잔인한 무한 경쟁 속에 던져져 오로지 시험으로 평가만 받아온 세대의 질시와 절망을 이용하는 것이다. 발표는 있어도 토론은 없는 교실과 강의실에서 연대의 개념도, 경험도 없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남을 끌어내리는 것 뿐이다. 같은 사회 안에서 공존해야 하는 구성원끼리도 이럴진대, 하물며 난민이나 기후 문제에 있어서 협력이 가능하겠는가. 
 
30대 이하, 경제적 계급이 중하층인 남성들이 분노하고 있다. 그 분노는 초과 경쟁 사회에서 자신들을 '인간 병기'로 만든 신자유주의가 아닌 여가부에 돈을 들이는 좌파 정권과 페미니즘을 향하고 있다. 그들에게 페미니즘은 '절대악'에 해당한다. 한국 남성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경제력을 바탕으로하는 '가족' 부양자'다. 그런데 현재 30대 이하 세대는 남성의 정체성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어 그 분노를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하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경제적 고립이라는 상황을 악화시켰다면 이를 상대로 투쟁하고 이에 저항하는 정당을 지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화살은 오히려 사회적 약자를 향하고 있다. 이는 '남성'이라는 특권의 상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회가 여성의 모든 노동에 값을 지불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양성평등은 불가능했다. 저자는 국가와 자본에게 새로운 병역 대상자와 노동자들이 필요하다면 육아 노동을 둘러싼 조건부터 본질적으로 달라져야함을 말한다. 
 
저자가 정의하는 '괜찮은 사회'란 사회적 적응을 거부하는 기인들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관용의 사회다. 관습이나 혹은 법으로 정해져 있는 않은 사회적 잣대에 맞춰 살지 않아도 최소한의 먹고 사는 일에 불편함이 없으며 정서적으로 고립되지 않는 사회를 의미한다. 
 

저자는 한국 교육과 교육조차 자본주의에 잠식당한 현실을 지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교의 역할은 더이상 '키움'이 아니다. 학교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전달하고 미래의 노동자를 육성하는 공간이 되었다. 단선적 신분 상승에 입각한 성적위주의 '공부'에 모든 것을 쏟는 대한민국의 공부 세태를 짚으며 오로지 입시를 위해 모든 욕구를 배제해야 하는 것은 개인의 낭비이며 사회적 낭비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성공 신화를 다루는 자기계발서가 베스트셀로로 자리매김한지는 오래다. 오로지 경제적 성공을 목표로 무한 경쟁의 굴레에 거침없이 제 몸을 던져넣는 세상에서 배려, 연대는 멸종 위기 단어가 됐다. 인생 목표가 '부자'인 사회, 이대로 괜찮을까? 
 
대학이 취업의 관문이 된 사회에서 이르면 초등학교부터 입시 위주의 공부를 해오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으로 정해진 현주소에서 대안적 인생이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온 가족이 수능이라는 시험에 인생을 걸 듯 한다. 자본주의가 유입되고 산업화를 진행하면서 대학은 대놓고 산학협력 체제를 구축했다. 대학은 더 이상 지성의 전당도 아니고 학문을 연구하는 곳도 아니다. 개성과 재능에 상관없이 취업이 잘 되는 학과를 선택하고, 대학 입학 후 전공이 무색하게 곧바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보직과 상관없이 대졸 증명서를 요구하거나 업무 능력과는 별개로 학력으로 보수를 책정하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스스로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저자는 '공'의 영역이지만 사유화된 한국의 대학들의 평준화가 시급함을 말한다. 한국처럼 학벌이 모든 사회생활의 중심 즉 사회적 존재의 중심이 되는 사회는 드물다. 학벌 피라미드 문제가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교육 정상화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12년 입시 지옥을 타파하자면 학벌 위계 질서 자체에 대한 철저한 파괴가 필요하다. 교육 혁명이 절실하다. 














2019년말에 시작되어 2020년 현재까지 현재진행중인 코로나19사태는 각 나라와 사회 전반에 가려져 있던 진실을 드러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공통적으로 각 국가마다 사회적 격차에 의한 피해 정도는 상당히 컸다. 코로나19 사태로 중산층 이상의 구성원들은 '불편함'을 느끼는 정도였지만, 중소기업 노동자, 불안 노동자, 자영업자 등과 소수자에 해당하는 이민족 외국인들은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를 통해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그다지 효율적이지 않음이 드러났다. 저자는 이제 전 지구적 차원에서 평등, 생태, 지속성을 지향하는 협동적 체제를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4차 산업혁명'과 그에 수반된 긱 이코노미는 안정성도 없고 시민사회에의 소속도 불가능한 완전한 타자가 되어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리는 '부품'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는 새로운 형태의 가난과 개개인의 고독이 만연해졌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장기적인 관계 맺기가 불가능해진 시대가 도래하면서 보장되고 안정감있는 삶이 전무해졌다는 점에서 무산자라고 지칭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이전 시대가 착취로 대변된다면, 21세기 현대 사회는 고립과 소외가 사회적 문제이자 개인의 고통이다. 관계와 연대가 사라진 경쟁만이 남은 세상에서 불안과 가난, 외로움의 무게를 온전히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으로 남았다. 페미니즘, 외국인 노동자 혐오, 이슬라모포비아 등은 강한 혐오와 소외, 고립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이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수가 공유하는 집단에 들기 위해 '타자 혐오'는 더 강력해진다. 연대을 잃은 자리에 혐오가 들어서는 것이다. 
 
과잉 생산과 과소 소비는 수면 시간 이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식민화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손에서 놓지 않고 이용하는 모든 콘텐츠와 네크워크는 자본의 이윤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생활이란 개념이 사라진지는 오래고, 사색과 사유는 갈 곳을 잃었으며 거의 대부분이 경제적 측면에서 작동하는 세계는 소설에서 보아왔던 디스토피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저자는 '혁명'을 외친다. 이 혁명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부터 시작하는 혁명이다. '나의 생각이 무엇이냐'라고 자문함으로써 우리는 혁명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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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창 2020-12-24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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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교수의 글 살아있다 새창으로 보기
대학생 때부터 즐겨 읽던 박노자 교수의 책들.

한국말을 너무 잘해서 강연도 신청했었는데 말보다는 글을 훨씬 잘 쓰는 사람이었다.

귀화를 해서 한국인이지만, 아마 사회적 편견 때문에 아무도 한국인으로 대해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차별이 덜한 북유럽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학력사회에 대한 고민도 동감한다. 학력이 곧 서열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는 미국과 참 닮아 있다. 이 학력 차별이 완화되지 않고서는 행복한 사회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한국이 출산률이 세계 최저인데, 그 원인을 제대로 위정자들이 파악하고 있을까? 저자는 오히려 반여성적 환경에도 아직까지 아이들이 태어난다는 것, 즉 출산율이 아예 0이 되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희망을 느껴야 출산도 하지,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한국사회에 남아 있나 보다. 

한국 사회는 탈학벌에 계속 실패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45퍼센트, 문재인 정부 때는 42퍼센트가 정부 고위직 서울대 출신 비율이다. 오히려 육사 출신 비율이 높았던 박근혜 정부 때는 33퍼센트. 

앞으로 1인 가구가 대세일 것이다. 덴마크의 1인 가구 비율은 37퍼센트, 노르웨이는 41퍼센다. 한국은 2019년 통계에 의하면 30퍼센트가 1인 가구다. 39세가 되어도 미혼 또는 비혼인 여성은 20퍼센트, 남성은 33퍼센트. 남자가 더 높다는 게 의외였다. 주변에 결혼 안 한 여성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한국 남성들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명쾌하다. 가부장제는 빨리 쓰레기통에 처박아야 할 역사의 유물인데 한국 남자들은 아직 이 유물을 붙잡고 있다. 본래 한국 남성의 기본적인 정체성은 군인도 있고, 국민도 있지만 일차적으로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사람'이다. 문제는 이 '남ㅈ마의 기초적 조건'은 갈수록 수많은 젊은 남성이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청년층과 노년청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어 있다. 외국어 연수와 대학원이라는 성지순례까지 모두 마쳐도 서른이 되도록 계속 '자리'를 잡지 못하는 단기 비정규직, 심지어'알바' 자리를 전전하는 젊은 남성들이 수두룩하다.  '모범적인 30대 초반의 한국형 남성'은 가면 갈수록 '예외'가 되어간다. 상위 20~25퍼센트를 제외하면 그런 사람을 보기가 점점 힘들어지낟. 그렇게 '그들'이 얻은 것ㅇ느 가나마 나름의 '지위 향상'을 경험한 여성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이다.

그렇다면 왜 신자유주의를 욕해야지 약자인 여성에게 분풀이를 하는걸까? 한국의 '페니스 파시즘'은 미국의 백인 특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고, 당장에 '상실'될 일이 없는데도 그들은 그 특권이 약화되는 '경향' 에 위기감을 느끼고 극우화하는 것이다.(83면)

또한 자기계발서에 대해서 명쾌하게 저자는 정의한다. 자기계발서의 세계에서는 만인이 만인의 경쟁자이다. 이런 경쟁 구도에서 최고의 무기는 속 생각의 은페와 위선 그리고 관계 관리와 타자의 도구화. 최종 목표는 부자 되세요다.

한국 사상사는 고조선 시대에 유교와 도교의 근본이 유입된 이후 약 2100~22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사리사욕이 개인 삶의 유일무이한 목표가 되고 교언영색이 성공을 향한 경쟁에서 당연하고 합법적인 무기가 되어버린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일이다. 2000년이 넘는 역사에서 처음 벌어진 일이다.

약자에 대한 차별, 1년에 약 1800-2000명의 노동자를 죽이는 최악의 산재 사망률, 만연되어 있는 과로사, 14퍼센트 이상의 직장 여성들이 당하는 성추행.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 신자유주의 하에서 연대 의식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공동체의식, 연대, 공감 능력을 회복할 수 있는 기재들이 필요하다.




각자가 스스로에게 ‘나의 생각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는 것은 아마도 현재로서 가장 혁명적인 질문일 것입니다. 500여 년 전 동양철학사상 가장 급진적이며 개성적인 사상가라고 할 이지(이탁오, 1527-1602)는 동신, 즉 주류의 의식이 ‘나‘에게 주입되기 전에 본래 진심을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습니다. 오늘날 이 외침은 더 절실하게 들립니다. - P12

공부에 진정한 흥미를 느끼는 사람 역시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그렇게 소수인 것이 정상이죠. 사회를 유지시키는 것은 소수의 ‘재능‘보다는 다수의 ‘노동‘이니까요. 한국을 오늘날처럼 부자 나라로 만든 것은 ‘교수님‘들의 그 잘난 ‘영어 논문‘이 아니라 조립 라인에서 나사를 돌리는 노동자들의 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고학력 인력이 존중받는 가운데, ‘노동자로 산다‘는 것이 저주처럼 들리는 이 괴이한 ‘학력 우대 사회‘에서 부모들이 굳이 원하지도 않는 아이들에게까지 마지막 돈을 투자해서 공부를 시키고 유학을 보냅니다. - P59

루마니아 주택 소유율 96퍼센트, 러시아 84, 노르웨이 82, 한국 53, 일본 61.
후지이 다케시 선생의 글
민영휘 손자 민병도 - 이승만 시절 한국은행 총재,
조병갑 - 조기숙 교수 증손녀,
일본은 통합은 되었지만 통일은 되지 않음.

2007년 여수출입국관리사무소의 외국인 보호소, 즉 가난한 나라 출신의 입국자들을 집어넣는 시설에 큰 불이 났다. 외국인 수인들이 살려달라고, 문을 열어달라고 필사적으로 절규했지만,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은 당연히?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도주 우려‘가 있었기 때문. 중국 동포나 스리랑카, 파키스탄 노도자가 불길 속에서 타 죽는 것이 도망가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 결국 열 명의 외노들이 불길 속에서 죽었따. 한국 정부는 1인당 1억 원을 주는 유가족들과 합의했다. 국가적 사과도 재발 방지를 위한 조치도 없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나 애도도 없었다. 애도하기에는 급이 너무 없는 사람들 - P97

안산은 외국인 인구 대비 비율이 국내 지자체 중 최고인 1@퍼센트, 8만 6천 명. 안산은 외국인에게 국내인의 70퍼센트 수준에서 재난기본소득 지급. 외국인은 국내인보다 반찬을 덜 먹나요? 옷을 덜 입나요? 아파트 관리비를 덜 내나요?

냉소주의 사막에서 빠져나가 좌파 진보적 입장에서 공익의 논리를 다시 재건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 우선 인간적 타자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지구 환경까지도 배려와 동감 그리고 연대의 대상으로 삼을 줄 알아야 한다. 과거 ‘공익‘ 이데올로기들의 인권 침해적 권력 남용을 허용했던 요소들도 철저하게 반성, 성찰해야 한다. 출세와 소비 욕망을 유일한 가치로 설정한 가치관이 결국 개인은 물론 인류 전체를 파멸의 문으로 끌고 가고 있기 때문이다. - P123

전향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하나의 주요 코드다. 그만큼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지금도 ‘계급‘과 같은 화두를 놓지 않는 사람들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비록 소수라고 해도 그들이 있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명문대 출신 소유자에겐 솔직히 모든 것을 벌리 각오로 이 가시밭길을 걷기가 쉽지 않겠죠? - P129

과반수의 한국 노동자들은 의식주보다, 성욕보다, 어쩌면 목숨보다 더 귀중할 수도 있는 ‘자존심‘을 포기하면서 밥벌이를 해야 한다는 것. 직장 생활 중에 폭언을 한두 번 들은 사람은 열 명 중 아홉 명이고, 폭력을 경험한 사람은, 조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12~17퍼센트.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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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제비 2021-05-21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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