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12, 2022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은 대한민국 정당사에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자유주의사회자유주의사회보수주의민주화 운동 세력 등이 서로 이합집산하면서 수차례 정계개편을 통해 이어져 온 대한민국의 정당들을 일컫는 말이다.

역사적으로 주로 군사정권과 독재권위주의의 반대를 포함한 반권위주의적, 자유주의적인 색채, 재야 운동권에 대한 호의 등을 드러내고 있다.[1]

2015년 9월 18일, 당시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은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를 1955년에 창당되었던 민주당으로 규정하고, 창당 6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2] 그러나 일각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의 시발점을 1945년 9월 16일 창당된 한국민주당과 그 후신인 민주국민당으로 보기도 한다.[출처 필요]

대한민국의 주요정당 계보

역사[편집]

평화민주당 창당에서 정권 교체까지[편집]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정통 야당의 맥과 역사는 1955년 자유당 정권의 사사오입 개헌 때 범야권의 결집으로 인해 시작되었지만, 현재 더불어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야당의 가장 큰 맥은 통일민주당이라 할 수 있다.[3]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에 반대하던 양김(김영삼김대중)이 탈당한 뒤 1987년 4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였다. 통일민주당은 당시 전두환의 제5공화국 정권에 항의하는 야당으로써 활동해 왔다. 한편 이러한 통일민주당의 시발점은 신민당과 1955년에 창당된 민주당의 모태인 민주국민당과 그 전신인 한국민주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한민주당 시절 때부터 사실상 당권을 장악했던 양김이 독자적으로 창당한 이 통일민주당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으며, 그 결과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냈다.[3] 그러나 김영삼이 이끄는 상도동계와 김대중이 이끄는 동교동계의 마찰이 계속됐고, 결국 대선을 눈앞에 두고 동교동계가 탈당하였다. 이들이 창당한 정당이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실질적인 뿌리가 되는 평화민주당이다.[3] 그러나 여기서 시작된 야권 분열은 물론, 부정선거로 추정되는 행위 등으로 인해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은 결국 대선에서 참패하고 말았으며, 이어 치러진 총선에서도 처참하게 패했다. 평민당은 3위의 득표율에도 원내 2당이자 제1야당으로 떠올라 정부를 견제할 힘을 얻었지만, 다른 야당이던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이 민주정의당과 합당하면서 그 힘을 잃게 되었다(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은 개헌선을 초과한 218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일부 통일민주당 의원들은 독자 행보를 걸고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평민당은 이후 신민주연합당으로 개명한 뒤 줄곧 활동해 왔으며, 이후 1992년 꼬마민주당을 흡수한 뒤 민주당을 창당했다. 새로운 민주당은 1992년 총선에서 패했으나 민자당의 위기 속에서 나름 선전을 했으며, 이후 같은 해 대선에 김대중을 후보로 내세워 도전했으나 패하여, 야당으로 계속 남게 되었다. 김대중의 은퇴로 김대중은 모든 당권을 내놓았으나, 동교동계의 당권 장악은 계속되었다. 1995년 지방선거에서 선전했고, 이어 정계에 복귀한 김대중 일대가 탈당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였다. 국민회의는 1996년 총선에서 부진했으나 1997년 대선에서 자유민주연합과의 연대로 승리하여, 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헌정 이후 최초이자 1960년 이후 38년만에 민주당계 정당이 집권하였다.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시기[편집]

1998년 2월 25일 김대중의 취임으로 국민의 정부가 탄생했고, 선거 당시 연대한 자유민주연합은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더불어 여당이 되었다. 당시 거대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국민회의와 자민련을 괴롭혀왔으나, 오히려 국민들의 반감을 사 1998년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였다. 이어 '의원 빼가기' 작전 끝에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 문제를 두고 여권 분열이 있었고, 여러 스캔들이 터져 민심 이반이 일어났다. 국민회의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으로 개편되어 해체되었고, 이어 총선에서 의석수는 늘어났으나 한나라당에 밀려 패했다. 이후 김대중은 리더십을 잃었고, 공동여당 공조 파기까지 일어나면서 정권의 국정 운영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민주당은 2002년 지방선거에서 패했고, 결국 김대중은 탈당하였다(2000년 총선 전 새천년민주당 창당). 그러나 동교동계는 여전히 당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해 대선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국민 경선제가 동교동계의 위기를 불러오기도 했는데, 당시 '노풍'의 결과로 노무현의 지지율이 급상승하면서 동교동계 후보 한화갑은 몰락했다. 결국, 대선 후보로는 노무현이 선출되었다. 대선 결과, 노무현의 당선으로 민주당은 정권을 연장했으나, 당시 당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동교동계와 노무현 간의 관계 악화는 계속되었고, 이 와중에 소위 '친노'라고 불리던 개혁파 당원들이 탈당하였다. 이들은 한나라당 탈당파들과 연대한 뒤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한편 노무현은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에도 한동안 남아있다가, 2003년 9월 30일 탈당하였다. 이로써 새천년민주당은 야당으로 전락하였고, 여당이 없는 중립내각이 출범하였다(하지만 노무현을 지지하는 열린우리당이 실질적인 여당 역할을 하였다). 노무현은 2004년 총선 직전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고, 이에 민주당은 한나라당, 자민련과 함께 '선거중립 위반'을 이유로 노무현을 탄핵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국민들의 반감을 샀으며,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152석을 차지하여 과반 의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민주당은 역으로 한나라당은 물론 비주류 정당이었던 민주노동당에게조차 밀려 9석짜리 미니정당으로 전락했다. 김종필의 은퇴까지 이어져 3김 시대는 끝났고, 동교동계도 정치적 실권을 잃게 되었다. 대신 새로 떠오른 열린우리당이 국민들의 기대를 모았다. 열린우리당은 친노무현 세력과 비노무현 세력으로 분류되었는데, 비노 계열의 경우 개혁 성향의 친김근태계 및 친고건계와 실용주의 성향의 친정동영계로 분류되었다.

열린우리당은 노무현의 입당으로 정식 여당이 되었고, 이어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으나, 계파 갈등과 야당의 반대 등으로 무산되었다. 보수주의 및 우익 세력들은 노무현을 종북이라고 비판했으며, 진보주의 및 좌익 세력들은 노무현을 친미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이 과정에서 민심 이반이 일어났으며,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참패하여 과반이 붕괴되었다. 게다가, 미니정당으로 전락한 민주당(2005년 '새천년'을 뺀 민주당으로 개명)이 차츰 힘을 얻었고, 결국 열린우리당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게도 밀리는 참패를 당했다(호남에서도 패했다). 2007년 2월 노무현 대통령이 탈당하였다(실질적으로는 여당). 이후 열린우리당은 계파 분열로 소수 정당으로 전락했으며, 8월 합당으로 원내 1당의 위치를 되찾았으나, 역으로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되어 자동 해체되었다. 또한 일부는 민주당으로 들어갔다.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 정동영은 당시 실추된 민심의 결과로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에게 패배하여, 다시 야당으로 되돌아갔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편집]

2008년 민주당을 흡수해 통합민주당을 창당해 총선에서 활약했으나 참패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미국산 소고기 문제로 반정부 시위가 터졌고, 이어 노무현의 서거로 인해 한나라당 정권의 지지율이 타격을 입어, 때마다 치러진 보궐 선거에서 승리하였다. 이어 2010년 지방 선거에서 민주당은 한나라당을 누르고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민주당은 2011년 민주통합당으로 개편하였다.

한편 2011년 재보궐 선거 무렵부터 안철수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유력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물론 2012년 총선에서 활동은 하지 않았고, 대신 대선에 출마하여 화제를 모았으나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의 단일화 중 돌연 사퇴하였다. 야권의 실질적인 단일 후보가 된 문재인은 안철수의 지지 유세 속에서 최선을 다했으나 패배하여, 계속 야당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안철수는 이미 '유력 대권주자'까지 부상했고, 이에 민주통합당은 2013년 보궐선거를 앞두고 안철수 영입을 고려했으나 거부당했다. '안철수 신당' 창당설이 나돌기 시작했으며, 드디어 11월 신당 창당을 본격 선언함으로써 '안철수 신당'은 구체화되었다. 이미 '안철수 신당'의 가상 지지율은 민주당의 지지율을 추월했고, 신당의 이름까지 '새정치연합'으로 결정되었으나, 결국 민주당(2013년 개명)과 연대를 선언하여 신당 창당은 무산되었다. 이로써 사실상 야권의 연대가 이루어졌고, 2014년 3월 26일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합당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이 출범했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누리당에 참패했고, 이로 인해 김한길, 안철수 지도부가 물러났다. 이후 2015년 초에 치뤄진 전당대회에서 문재인이 당대표로 선출되면서 계파 갈등이 더욱 심해졌다. 안철수를 중심으로 한 비노무현계 호남 의원들이 대거 탈당하여 국민의당을 창당하였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고, 김종인을 영입하여 당초 새누리당에 크게 참패할 거란 예상을 깨고 2016년 총선에서 원내 제1당으로 올라섰다. 국민의당도 38석을 얻으며 호남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며 전국에서 촛불 집회가 열렸고, 야권은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들과 힘을 함쳐 박근혜 탄핵소추안을 가결하였다. 2017년 3월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하면서 치뤄진 조기 대선에서 문재인이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안철수는 당초 예상과 달리 선거 과정에서의 실언, 논란 등으로 홍준표에게 밀려 3위를 기록하였다.

문재인 정부 이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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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은 낮은 지지율의 해결책으로 당대표 안철수가 당내 반발에도 불구하고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의결하여 바른미래당이 출범하였다. 이때 반발한 호남 의원들 일부가 탈당하여 민주평화당을 창당하였다. 2018년 더불어민주당은 문재인 정부의 성과(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개최) 등으로 인해 지방선거에서 압승하였으며, 바른미래당은 유의미한 성적을 내지 못했고, 민주평화당은 호남 일부 지역에서 기초단체장을 배출하였다. 지방선거 이후 출범한 바른미래당의 손학규 지도부는 2019년 재보궐선거 참패, 낮은 지지율로 사퇴 압박에 시달렸고, 민주평화당의 대안정치연대 의원들(주로 전남 지역)이 대거 탈당하였다(이후 대안신당 창당). 바른미래당 내 구 바른정당계 의원들이 탈당하여 새로운보수당을 창당하였고(이후 자유한국당과 합당), 안철수가 탈당하였다(국민의당 창당).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바른미래당, 대안신당, 민주평화당이 합당하여 민생당을 창당하였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한 정봉주가 주도하고 손혜원이 합류하여 열린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이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은 더불어시민당과 합쳐서 180석을 얻는 압승을 거두었고, 이후 더불어시민당과 합당했다. 한편, 창당한 이후 '비례 정당 지지율'이 10%를 상회한 열린민주당은, 여론조사 결과로 예측된 6석에 미치지 못한 3석의 비례 의석을 얻는 데 그쳤다. 이는 총선 막판 더불어민주당•더불어시민당의 선거 전략 등으로 인하여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이 대거 더불어시민당을 투표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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