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이우창 "신자유주의 지배체제 한병철
21t70 lOcnotorbt8er i201g144 ·
* A4 3쪽이 좀 안 되는 분량. 페북으로 읽기 힘든 분들은 블로그를 참조.
http://begray.tistory.com/166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는 전혀 다르게 짜여져 있다. 여기서는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이 더이상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나는 한병철의 저술 및 그 주장에 대해 지금까지 어떠한 지적 매력도 느껴본 적이 없다.
이번 글을 통해 내 입장을 수정하지 않아도 됨을 확인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현실에 대한 분석이 아닌 관념론적인 스케치에 머물고 있음은 이 기고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오늘날 남한사회--다행히도 그는 남한 사회를 자신의 주요한 사례로 들고 있는데--를 살고 있는 이들 중 지배적인 권력이 억압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순진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드물 거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은 개개인의 자기소진을 유발할 뿐 (그래서 저항적 다중multitude의 발생을 불가능하게 만들 뿐) 직접적으로 억압적인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한병철의 분석은 당연히 남한사회의 현실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그 자신도 이를 아예 무시할 수 없었는지 남한사회를 언급하면서 최초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도입기에 억압적 권력이 작동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듯 물러선다--그리고 오늘날 가시화된 지배권력의 억압적 성격을 지적하는 대신 마치 오늘날의 남한사회에는 시민주체들의 가열한 자기소진 및 서로 간의 적대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한 마디로 억압적이지 않은 권력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그래서 실질적으로 어떠한 저항도 불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직설적으로 말하자. 왜 한병철이 심지어 보수적인 사람들을 포함해서 인기를 끄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 중 하나로 그가 사회를 분석하는 대신 몇 가지 인상에 기초한 스케치를 그리기 때문에, 사회의 실질적인 지배구조를 논하는 대신 도래한 파국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임을 꼽고 싶다; 한 마디로 그의 분석은 진정으로 지적인 것, 진실을 직시하는 것과 거리가 먼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그는 위험을 이야기하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실질적인 어려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권력을 이야기하지만, 어느새 권력은 슬쩍 사라지고 거기에 무력화된 주체만이 남는다. 푸코가 권력을 편재하게 만들어 저항을 무력화시켰다는 오해를 그렇게나 많이 받았지만, 사실 한병철의 논의야말로 진정으로 권력의 전능화와 주체의 무력화에 가깝다; 그리고 그 일관된 입장에서 그는 또 다른 대안적 모델이 (물론 나는 리프킨의 주장이 실제로 유효한 제안인지 검토하지 않았다) 불가능함을 주장하며 그 끝은 전혀 지적이지 않은 수사들로 채워진다. 그는 지배가 무엇인지, 지배체제가 무엇인지 전혀 분석하지 않는다. 요컨대 단지 파국이 왔고, 우리는 이 파국을 (마치 <피로사회>의 후반부에 나오는 기분좋은 피로처럼) 다소 마조히스틱하게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처럼 매력적인 '종말론'이 인기를 끄는 게 지금의 한국사회에 특별히 놀랄 일은 전혀 아니다. 사람들이 지적인 분석과 고통스러운 실천보다는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안락함에 파묻히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니까.
신자유주의적 지배체제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남한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조금만 시도해보면 한병철의 논리를 완전히 뒤엎는 건 전혀 어려운 게 아니다(나는 남한 "사회"라고 한정짓지 않는데, 왜냐하면 저 단어는 한병철이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국가"/"정부"라는 주체를 사실상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분명 그가 지적하듯 남한의 시민주체들이 경쟁구도에 놓여 '소진'될 때까지 노동을 착취당하는--물론 그는 이 노동의 결과물이 실제로 누구의 이익이 되는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기경영주체"의 탄생과 함께 이러한 조건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지배권력의 작동을, 즉 국가와 대자본의 결탁을 봐야만 한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경제적 구조에 조금이라도 익숙한 사람은 잘 알고 있듯이 기본적으로 우리는 대기업 위주의 수출주도형 체제에 속해 있다. 쉽게 말해 시민주체들의 노동력을 착취해 대자본에 부와 자원을 집중하고, 대신 이렇게 얻은 이윤을 (낙수효과 등에 따라) 시민주체에 재분배한다. 98년부터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요점은 자본의 국제적인 경쟁압력의 심화에 따라 부가 대자본으로 집중되는 경향은 가속화되는 반면 집중된 부/이윤의 재분배는 심각하게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오늘날 한국의 정치경제적 구조는 낙수효과가 아니라 뿌리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한껏 빨아들여 맨 윗가지의 꽃을 피우는데만 집중하는 나무에 조금 더 가깝다. 이때 노동착취를 가속화시키기 위해 (한병철이 말한) 신자유주의적 경쟁구도의 심화가 제공된다. 즉 실업자들, 산업예비군들의 폭증에 의해 자본가들은 더 적은 비용을 지불하고 더 많은 것을 착취한다. 당연히 반작용으로 저항이 발생하는데,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시민주체들의 원자화를 촉진시키는 이데올로기와 함께) 자본과 결탁한 국가가 전면에 등장한다. 오늘날의 정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국가/정부는 직접적으로 시위를 진압할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저항세력들을 감시 및 억압한다. 전교조 및 노조를 포함한 전통적인 '중간세력'은 합법적이거나 법을 우회하는 갖가지 수단을 통해 공격한다. 이를 억압적인 권력이라 부를 수 없다면 우리는 사전에서 억압이라는 단어 자체를 지워야 할 것이다.
한병철이 말하는 '소진된 주체'는 적어도 남한의 맥락에서는 저항을 분쇄시키는 원인만이 아니라 분쇄된 저항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몇 차례의 대규모 반정부시위는 국가권력의 대처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으며,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하려는 시도는 실패했고(물론 이 선거에 국가정보기관과 군대의 직접적인 개입이 있었음을 기억하자; 여기에서도 권력은 충분히 가시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합법적인' 권력을 틀어쥔 우파들은 자본의 시민사회에 대한 착취를 보다 강화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활약한다; 휴일수당을 삭감하고 연장노동시간을 늘리는 것, 한 마디로 더 많이 일하고 더 적게 받으라는 의지가 선명히 드러난 법의 추진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단순히 무한경쟁구도만이 아니라 이러한 패배감과 무력감이 사람들을 소진burn-out시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경제적 구조가 가속화된 착취와 생활수준하락을 통해 행복은 물론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이들을 양산한다면, 지배권력의 역할은 시민주체들을 정치적 저항의 주체가 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적 지배체제에서 (가라타니 고진의 표현을 빌리면) 자본=국가=네이션은 이데올로기와 가시화된 권력의 층위 모두에서 능동적으로 시민사회의 주체화를 억압한다.
한병철은 여기에서 자본과 국가의 실질적인 작동을, 다시 말해 억압을 지워버린다. 남는 것은 주체가 되지 못하는, 곧 착취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시민들 뿐이다. 억압 및 억압의 주체가 지워진 한병철의 이데올로기적 세계관에서 유일하게 남은 항은 (주체가 되지 못한) 시민-덩어리들일 뿐이며, 단 하나의 항만 존재하는 세계에 어떤 실질적인 저항이나 사회의 변혁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사태의 변증법적 전개는 모순을 설명하기 위한 최소 두 개 이상의 항을 요구하는데, 한병철에게는 오로지 시민-덩어리들만이 남아있으니 이 세계의 종말 말고 그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게 논리적으로 또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당연히 이러한 체제를 만들어낸 권력과 제도, 자본의 작동에 대한 논의도 애초에 있을 수가 없다. 그가 신자유주의는 맑스주의로 분석될 수 없다고 말하는 건 당연하다; 애초에 정치경제적인 영역, 물질적인 것을 다루지 않는데 맑스주의적 분석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자연스레 한병철의 충실한 독자들은 실질적으로 사회에 개입하는 지배권력의 작동을 망각하며 이미 도래한 파국에 슬퍼하거나 즐겁게 살아가거나 할 수 있을 뿐이다(그가 <피로사회>에서 피로가 원자화된 주체들을 갈라놓는 간극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독특한 대안을 이야기할 때 그는 '묶음'이라는 단어에서 기원한 파시즘에 한걸음 더 다가간다). 이게 이데올로기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결론은 무엇인가? 쉽지 않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한병철이 반-유물론적으로 떠드는 것과 달리 우리에겐 사태를 이해하고 변화시킬 가능성이 실제적으로 존재한다. 이데올로기와 물질의 층위 양자에서 우리를 탈-주체화로 이끄는 지배권력의 작동을 직시하고, 그러한 권력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와 실천을 무력화시키면 된다(굳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이론적인 파악을 도와주는 사상가가 필요하다면, 2014년의 한병철보다 1978년의 미셸 푸코의 강의록들이 훨씬 도움이 된다--<안전, 영토, 인구> 및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훨씬 짧은 분량이고 도식적이지만 사토 요시유키의 <신자유주의와 권력>도 좋은 정리다). 적은 분명하다. 맑스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그게 신자유주의건 고전적 자유주의건 간에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 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분할선을 그린다는 것, 그래서 그렇게 구조적으로 만들어지는 사회적 적대와 모순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계급투쟁의 계기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나는 모두가 굳이 맑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으며, 동시에 지금 당장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자본주의를 포기할 준비가 되었냐고 물을 생각도 없다. 요점은 지금 우리는 사람이 살만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으며 세상을 이렇게 만드는 구조가 존재하고 그 구조는 바뀔 수 있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나는 적어도 단기적으로 피케티주의자들--그런 게 있다면--하고도 얼마든지 협력할 수 있다).
===
한겨레
21t60 lOcnotorbt8er i201g144 ·
<한계비용 제로사회>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을 비롯해 ‘나눔 경제’ 또는 협력적 (공동체) 공유경제가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는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담론이 최근 번지고 있는데요.
하지만 한병철 베를린예술대 교수는 실현 불가능하며 오히려 전면적인 상품화·자본화를 재촉할뿐이라고 반박합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0120.html
===
“친절마저 상품이 된 시대, 혁명은 없다”
등록 :2014-10-16
한병철 독일 베를린예술대 교수, ‘나눔경제’ 담론에 반박하다
이번주 방한한 <한계비용 제로사회>의 저자 제레미 리프킨을 비롯해, 소유보다는 점유를 지향하는 ‘나눔 경제’ 또는 협력적 (공동체) 공유경제가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는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담론이 최근 번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실현 불가능하며 오히려 전면적인 상품화·자본화를 재촉할뿐이라는 반박 또한 나오고 있다. 최근 유럽 사회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한병철 베를린예술대 교수의 글이 대표적이다.
한 교수는 지난 9월2일치 독일 유력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에 실은 기고 ‘오늘날 왜 혁명은 불가능한가?’에서, 신자유주의체제 아래에서 친절과 베풂도 더 나은 평점을 얻기 위한 상품화논리에 함몰당한다며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시점에 완벽해진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 이것이 혁명이 맞이할 종말”이라고 썼다.
그는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유혹을 통해 대중을 통제”하는 지금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제국>의 공저자 안토니오 네그리가 말한 혁명적 저항 주체로서의 다중(멀티튜드) 개념 같은 것은 성립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기고는 지금까지 1만8000여 개의 추천과 1000개가 넘는 리트위트를 기록하며, 스페인 <엘파이스>(10월3일치)에도 번역 게재됐다.
“어째서 신자유주의 지배체제가 그토록 안정적인가? 어째서 이에 맞서는 저항들이 그토록 적은가? 어째서 이 저항들은 모두 그토록 빨리 수포로 끝나고 마는가? 어째서 점점 더 커지는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가?”
한 교수는 이런 질문의 답이 신자유주의체제 권력과 지배 작동방식에 있다고 본다. 신자유주의의 선구적 투사 마거릿 대처 정권은 노조를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고 공권력 등 폭력을 동원해 굴복시켰다. 통제된 산업사회에서 권력은 체제 유지를 위해 억압적이었고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 착취는 저항과 반기로 이어졌다.
신자유주의 빈부차 키우지만
권력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
적이 없기에 자신과의 싸움만
혁명 일으킬 군중 없는 상황서
나눔경제는 해방은커녕
우리삶 더 상품화시킬 수도
하지만, 지금의 신자유주의에서 “권력은 더는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스스로를 경영하는 자유로운 경영자(자기-경영자)가 되기 때문에 “저항해야 할 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이면서 동시에 노예다. 계급 투쟁은 자기 스스로와의 내적 싸움으로 변화한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탓하고 부끄러워한다. 사회가 아닌 자신을 문제로 여긴다. 큰 힘을 들여가며,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규칙과 금기로 옥죄는 통제적 권력은 비효율적이다. 본질적으로 더 효율적인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지배 관계에 종속하게끔 만드는 권력 기술이다.”
굴복당하는 주체가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게 만드는 이 효과적인 지배 기술은 저항을 중화한다.
그는 오늘날 한국에서도 자본에 대한 저항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국제통화기금(IMF)이 한국에 강요한 신자유주의 체제 탓이며, 한국이 우울증과 소진(번아웃)현상이 만연하고 자살율이 가장 높은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신 자기 스스로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혁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외부를 향한 공격은 자신을 향한 공격 앞에 힘을 잃고 있다.”
이에 따라 “오늘날 하나의 세계적 저항 혁명의 군중으로 일어설 수 있을 만한, 서로 협조하고, 얽혀 있는 다중(멀티튜드)은 없다.” 한 교수는 특히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는 나눔 경제는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은커녕 오히려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상품화하게 될 것이라고 봤다. “돈이 없는 사람은 나눔에로 접근도 할 수 없다. 접근의 시대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어 있는 ‘수용소’ 에 살고 있다. 모든 개인 주거공간을 호텔로 바꾸어 주는 커뮤니티 시장 에어비엔비(Airbnb)는 손님에 대한 환대마저도 상업화시킨다. 공동체 또는 협력적 공유경제의 이념이 공동체를 전부 자본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 서로 평점을 주고 받는 사회에서는 친절함도 상품화된다.”
==
한병철 교수 기고 전문은 인터넷한겨레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쥐트도이체 차이퉁> ‘오늘날 왜 혁명은 불가능한가?’ 전문
일 년 전 베를린에서 안토니오 네그리와 내가 서로 토론을 벌였을 때, 두 가지 서로 다른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네그리는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라는 ‘제국’에 대해 범세계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들에 심취하고 있었다. 그는 공산주의적 혁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나를 회의주의자 교수로 일컬었다. 네그리는 저항적이고 혁명적인 서로 얽혀 있는 대중, 즉 ‘다중(멀티튜드)’을 강조하며 얘기했는데, 그는 분명 이것으로 이 신자유주의라는 제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에게는 공산주의적 혁명가가 취하는 이러한 입장이 너무나도 순진해 보였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나는 네그리에게 어째서 오늘날 혁명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지 설명하려고 했다.
어째서 신자유주의 지배체제가 그토록 안정적인가? 어째서 이에 맞서는 저항들이 그토록 적은가? 어째서 이 저항들은 모두 그토록 빨리 수포로 끝나고 마는가? 어째서 점점 더 커지는 빈부격차에도 불구하고 혁명이 더이상 가능하지 않은가?
이를 설명하려면, 권력과 지배가 오늘날 어떻게 작동하는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지배체제를 설치하려는 사람은 저항을 없애야만 한다. 이는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에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지배체제를 설치하려면, 눌러앉히는 권력(setzende Macht)이 필요하고 이러한 권력은 자주 폭력을 동반한다. 하지만 눌러앉히는 권력은 체제를 내부로 안정화시키는 권력과 동일하지 않다. 마거릿 대처가 신자유주의의 선구적 투사로서 노조를 ‘내부의 적’으로 다루고 폭력적으로 퇴치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신 자유주의 어젠다를 관철시키기 위한 폭력적인 개입은 체제를 유지하는 그러한 권력은 아니다.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은 더이상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통제된 산업사회에서 체제를 유지하던 권력은 억압적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은 공장 소유주들에 의해 잔인하게 착취를 당했다. 그리하여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폭력적인 착취는 저항과 반기로 이어졌다. 여기서는 지배적인 생산관계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혁명이 가능했다. 이 억압적인 체제에서는 억압도 눈에 보이고, 억압을 하는 이들도 눈에 보인다. 저항을 해야 하는 구체적인 상대, 보이는 적이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는 전혀 다르게 짜여져 있다. 여기서는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이 더이상 억압적이지 않고, 유혹적이다. 이 권력은 통제적인 지배 때와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구체적인 상대가 없고, 자유를 억누르는 적, 저항해야 할 적이 없다. 신자유주의는 억압받는 노동자로부터, 스스로를 경영하는 자유로운 경영자(자기-경영자)를 만들어 낸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스스로를 착취하는 노동자다. 누구나 주인이면서 동시에 노예다. 계급투쟁은 자기 스스로와의 내적 싸움으로 변화한다. 오늘날 실패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탓하고 부끄러워한다. 사회가 아닌 자신을 문제로 여긴다.
굴복된 주체는 자신이 굴복당하고 있다는 점조차 모르고 있다.
큰 힘을 들여가며, 사람들을 폭력적으로 규칙과 금기로 옥죄는 통제적 권력은 비효율적이다. 본질적으로 더 효율적인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지배관계에 종속하게끔 만드는 권력 기술이다. 이 권력 기술이 가진 특별한 효율성은 이것이 금지와 박탈을 통해서가 아니라, 선호와 충족을 통해 작용한다는 점에 기인한다. 이 기술은 사람들을 복종시키는 대신에 의존적으로 만들려고 한다.
신자유주의가 가진 이 효율성 논리는 감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에는 사람들은 인구조사에 강렬히 반대하였다. 심지어 학생들도 거리로 몰려 나왔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 이것이 혁명의 종말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직업, 학력 또는 일터까지의 거리와 같은 필수적 기입 내용들은 거의 우스울 정도로 여겨진다. 국가가 시민들한테서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정보를 빼앗아 간다고 여기던 시대가 있었다. 그런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나갔다.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자유로이 발가벗어 노출하고 있다.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느끼는 자유다. 인구 조사에 저항하던 시대와 달리 우리는 좀처럼 감시에 저항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발가벗기는 자유로운 착취와 똑같은 효율성 논리를 따르고 있다. 이 역설적 상황을 미국의 개념 예술가 제니 홀처는 ‘진실주의(truism)’로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원하는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줘.”
‘눌러앉히는 권력’과 ‘유지하는 권력’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은 오늘날 스마트하고 친근한 형태를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보이지 않게 되며 잡을 수 없게 된다. 굴복당하는 주체는 여기서 굴복당하고 있다는 점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굴복당하는 주체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잘못 믿고 있다. 이 지배 기술은 매우 효과적인 방법으로 저항을 중화시킨다. 자유를 억누르고 공격하는 지배는 안정적이지 않다. 신자유주의 지배가 안정적이고 모든 저항에서 면역되어 있는 까닭은, 그것이 자유를 억누르는 대신 자유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빠르게 저항을 자극하지만, 자유를 이용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아시아 위기 이후 남한사회는 마비되었고 큰 충격을 받았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남한 국민들에게 돈을 꾸어 주었다. 그 댓가로 정부는 저항에 폭력적으로 맞서 가며 신자유주의 어젠다를 관철시켜야만 했다. 이 억압적인 권력이 자주 폭력을 쓰는 눌러앉히는 권력이다. 하지만 눌러앉히는 권력은, 신자유주의 지배에서 심지어 자유라고 자처하는 ‘체제를 유지하는 권력’과는 다르다. 나오미 클라인은 남한 또는 그리스의 재정위기와 같은 재난 이후의 사회적 충격 상태가 사회를 폭력적인 방법으로써 근본적으로 다시 프로그래밍할 수 있는 기회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남한에는 좀처럼 저항을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우울증과 번 아웃(Burn Out, 소진)에 대한 커다란 순응과 공감대가 만연돼 있다. 남한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자살율이 가장 높은 나라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신 자기 스스로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혁명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외부를 향한 공격은 자신을 향한 공격 앞에 힘을 잃고 있다.
오늘날 하나의 세계적 저항 혁명의 군중으로 일어설 수 있을 만한, 서로 협조하고, 얽혀 있는 다중(멀티튜드)은 없다. 오히려 홀로 고립되고 개별화된 자기-경영자라는 고독인(솔리튜드)이 현대의 생산방식을 이루고 있다. 예전에는 기업들이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다. 기업 내부에는 반대로 연대가 가능했다. 오늘날에는 개개인이 서로 경쟁한다. 이는 기업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절대적인 경쟁은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키지만, 연대와 공공의식을 파괴한다. 지치고, 우울하고 개별화된 개인들로부터는 혁명대중이 형성될 수 없다. 신자유주의를 마르크스적 이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신자유주의 내부에는 그 유명한 노동으로부터의 ‘소외(Entfremdung)’조차도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완전히 소진(Burn Out) 될 때까지 병적 쾌감으로 일에 파 묻힌다. 번아웃 증후군의 첫째 단계가 바로 병적 쾌감이다. 번 아웃과 혁명은 서로를 배제한다. 따라서 다중(멀티튜드)이 이 기생적인 제국을 무너뜨리고 공산주의 사회를 세울 것이라는 믿음은 오류다.
나눔의 경제는 삶의 완전한 상품화로 이어진다.
오늘날 공산주의는 어떠한가? 어디서나 나눔(Sharing)과 공동체(Community)를 신봉하고 있다. 나눔 경제가 소유와 점유의 경제를 대신할 것이라고 한다. “나눔은 돌봄이다”, “나눔은 치유다” 라는 말은 데이브 에거즈의 소설 <써클>(The Circle)에서 써클인들이 내세우는 원칙이다. 써클 회사 본사로 가는 길에 덮여 있는 길바닥에는 “공동체를 찾아 나서라” 또는 “참여하라”라는 문구들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원래는 “돌봄은 죽임이다” 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우리 모두를 택시 기사로 만드는 디지털 차량 공유 센터 (Wunder Car)도 이 공동체 아이디어를 가지고 홍보한다.
하지만 제레미 리프킨이 최근 저서 <한계비용 제로 사회>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나눔 경제가 자본주의의 종말을 유도하여, 세계적인 공동체 지향의 사회, 다시 말해 나눔이 가짐보다 더 가치 있는 그런 사회를 이끌어내리라고 믿는 것은 오류다. 그 반대로 나눔 경제는 결국 우리 삶을 전체적으로 상품화하게 될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이 칭송하는 소유로부터 ‘접근’에로의 전환은 우리를 자본주의로부터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 돈이 없는 사람은 나눔에로 접근도 할 수 없다. 접근의 시대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배제되어 있는 ‘수용소’에 살고 있다. 모든 개인 주거공간을 호텔로 바꾸어 주는 커뮤니티 시장 에어비엔비(Airbnb)는 손님에 대한 환대마저도 상업화시킨다. 공동체 또는 협력적 공유경제의 이념이 공동체를 전부 자본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목적없이 베푸는 친절함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서로 평점을 주고 받는 사회에서는 친절함도 상품화된다. 더 나은 평점을 받기 위해 친절해진다. 협조적인 경제의 한복판에서도 자본주의의 딱딱한 논리가 팽배한다. 이 아름다운 ‘나눔’에서 역설적이게도 아무도 자발적으로 무언가를 내놓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시점에 완벽해진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 이것이 혁명이 맞이할 종말이다.
한병철/베를린예술대 교수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660120.html?fbclid=IwAR0qsYQMnPHknWSi2Ghz7NuZCKfzz27vrWtBzNeVzQ6B4VtSqP5rxCvgs8Y#csidxc3f2cfb78733af7ac90ed048faa6ea0
===
28 comments
이우창
우동현 예전 <신자유주의와 권력> 서평을 쓴 적이 있습니다. http://begray.tistory.com/80
나름 후마니타스 웹진에 소개된 서평이죠ㅋ(근데 후마니타스는 저한테는 한 마디 언질도 없었...)
· 7 y
이우창
우동현 그게 푸코가 아주 명확하게 개념정의는 하지 않고 죽어서 ㅋㅋㅋ 그냥 심플하게 제 식대로 도식적으로 정리하자면, 지배적 권력의 구체적인 실천/제도/장치 등을 연결시켰을 때 발견할 수 있는 그것들을 관통하는 경향/논리를 말한다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이후 통치성 학파 등에서 어떻게 전유하는지 모르겠는데 일단 <안전, 영토, 인구>를 읽으면서는 대략 그렇게 정리했다는. 패러다임/에피스테메 같은 걸 권력에 적용하면 조금 비슷할까요.
· 7 y
이우창
우동현 푸코가 자기 틀을 만들던 중에 죽어서...푸코를 잘 이해하고 활용하려면 꽤 공을 들여야 합니다(솔직히 말해 지금까지 한국에서 푸코 언급한 책들 중 상당수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근데 그만한 가치는 있어요^^
· 7 y
Jeiil Lee
좋네요^^ 어제 짧게 한병철을 까는 글을 쓸까 하다가 짧게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엇보다 나눔 경제는 틀렸다고 생각해서 포기했는데 이렇게 다른 논점의 비슷한 주장을 읽게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저는 한병철을 매력적인 저자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의 빈곤한 사회 분석은 좀 안타깝습니다. 자기 영역이 어딘지를 아는 건 그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쉽지 않은 일인 모양입니다^^;;;
· 7 y
이우창
이제일 사회에 대한 인상비평 자체를 탓할 생각은 없지만, 인상비평으로 역사적/구조적 분석을 대체한 다음 '예쁘게 포장한' 결론을 슬쩍 내미는 꼴은 솔직히 엉성하죠. 하이데거 계보에 있는 사람들이 종종 보여주는 정태적 분석-> 논리적 비약의 삽질테크에서도 자유롭지 않고... 결정적으로 다른 이론가들을 너무 이해를 잘 못해요-_-;; 솔직히 예쁘게 글 쓰는 걸 말고 장점이 뭔지 모르겠는데 이런 게 히트를 친다니 독일이나 한국이나 좀 안타깝죠 ㅠㅠ
· 7 y
Seung Soo Kim
이 글 공유해도 될까요? 성실하고 좋은 비평을 제 주위 연구자들도 봤음해서요.
· 7 y
Jeiil Lee
에세이스트죠 ㅋ 거기 딱 머무르면 좋겠습니다^^;;,
· 7 y
Seung Soo Kim
제가 읽고 퍼가기만 하고, 도움이 되는 적은 별로 없었는데, 마침 제가 푸코 통치성 개념을 짧게 정리한 글이 있는데 댓글에 공유해도 될까요? 물론, 푸코에 대해 자신이 있어 드리는 말씀은 아닙니다.
· 7 y
이우창
김승수 둘 다 물론입니다 ㅎㅎ 아마 그냥 공유하기를 클릭하면 저 기사만 옮겨질테니 블로그링크를 활용하셔도 좋겠습니다~^^ + 학적인 내용의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에요!
· 7 y
이우창
이제일 사실 에세이라는 개념에 특별한 애착이 있는 저로서는 그 명칭을 주는 것도 아깝습니다 ㅠㅠ ㅋㅋㅋ
· 7 y
DK Lee
한병철씨가 어떻게 교수가 될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하이데거가 더더욱 미워질 지경입니다.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글쓰기의 전형이에요. 욕 잘 하는 친구가 재수 없는 상사를 대신 욕해준 것마냥 시원하네요.
· 7 y
Seung Soo Kim
http://cairos.tistory.com/229 이 글입니다^^.
· 7 y
이우창
김승수 감사합니다^^ 인용하신 렘케의 글은 구해놓기만 하고 정작 읽어보질 못하고 있네요. 이제 <안전, 영토, 인구>랑 <생명관리정치의 탄생>까지 나왔으니 업그레이드도 가능하겠는데요? ㅎㅎㅎ / 개인적으로는 대략의 감은 잡되 유연하게 쓸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게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ㅋ
· 7 y
이우창
DK Lee 욕 잘하는 친구 ㅋㅋㅋㅋㅋ 오랜 키보드워리어 경력으로 ㅠㅠ ㅋㅋㅋㅋ / 저는 그가 어떻게 교수가 되었는지 모르는데, 나름의 맥락이 있나요?ㅎㅎ
· 7 y
Seung Soo Kim
그러게요. 푸코를 해석한 2차텍스트말고 푸코 강의를 중심으로 다시 쓴다면, 조금 더 내밀하고 쫀쫀한 글이 될수 있을듯 합니다. 제가 알기론 문화연구쪽에서도 통치성 개념이 한 때 굉장히 유행해서 연구가 많이 됐었는데, 이 개념틀이 가진 유연성 때문이기도 한것 같습니다. 저도 이 통치성 개념을 홀의 정체성 이론이랑 절합해서 신자유주의 질서 하에 살아가는 개신교 선교단체 청년들 정체성을 구성하는 담론이 무엇인지 연구했었습니다.
· 7 y
이우창
김승수 흥미로운 주제인데요?! / 유연한 개념의 단점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물에 물탄듯한 논의가 되기 쉽다는 건데, 푸코의 개념은 그렇게 소비되기는 너무 아까운지라 앞으로도 계속 발전적으로 활용되기를 희망합니다(근데 역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푸코처럼 생각하려면 일단 많이 읽어야 하는 것 같긴 해요 ㅠㅠ)
· 7 y
이우창
김승수 사실 저는 사상가를 공부할 때 그가 남긴 개념 자체를 활용하는 것보다는 늘 그가 사유하는 방법 자체를 배우는 쪽에 더 흥미를 갖고는 합니다-
· 7 y
Seung Soo Kim
우창씨는 사상가의 사유 방법 자체를 독해하는데 흥미만을 가지신게 아니라 뛰어난 능력(물론 무수한 읽기/쓰기가 있으셨겠지만)도 있으신것 같습니다. 블로그 댓글에 다신 이야기중에, 푸코가 개별 지배자나 권력장치에 내재된 '의도(관념)'에 관심갖기 보다, 그 법/장치/담론이 발생시키는 권력효과의 물적 특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여느 어설픈 맑시스트보다 더 "유물론적"이라고 한 부분에서, 맘속으로 박수를 탁 쳤습니다.
여튼, 저도 열심히 읽고 써야겠습니다. 자극 받으니 좋네요.
· 7 y
이우창
김승수 여기저기서 폄하(?)당하는 문학전공이 제공하는 가장 강력한 훈련은 읽기 그 자체니까 그거라도 조금은 해야죠 ㅎㅎ 하지만 아직 공부하는 학생일 뿐이라서 갈 길이 머네요^^;; / 넵,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ㅎㅎ
· 7 y
Sue-Hyun Mun
이 글 재밌음! 한병철의 인기가 늘 의심스러웠는데 찰지게 까줘서 감사:)
· 7 y
이우창
문수현 "이런 저자라도 있는 게 어디냐"는 말로 이론도, 분석도 결여된 엉성한 글쓰기를 봐줄 때는 지났지 ㅎㅎ 일단 한병철은...책을 너무 못 읽음;;;
· 7 y
Bosik Kim
이런 글은 좀 한겨레에 오피니언이나 아니면 좀 매체에 실어서 널리 보게 하면 안되나요? 혹시 오마이뉴스같은데라도!!! 우창씨 글 우리만 보기 아깝다 ㅎㅎㅎ
· 7 y · Edited
이우창
Bosik Kim 언론들이 관심이 있고 쓸만하다고 생각하면 어떻게든 연락을 하겠죠 ㅋ 저야 일단 글을 쓰는 거고... 블로그엔 방문객들이 갑자기 많이들 들어오곤 있네요;; 여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 7 y
김석준
피로사회를 읽어볼까 하다가 선생님의 글을 다시한번 읽습니다^^ 탄핵이 되고 평창올림픽이 개막한 지금 시점에서 읽으니 '지금의 사회가 3년 전과 다름없이 피로하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라고 피로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제가 느끼는 체감에는 이전과 비교하기 어렵습니다 ㅎ
· 3 y · Edited
이우창
김석준 헉 3년 전의...저 자신의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보면 많이 낯선 언어군요 ㅎㅎㅎ 그때와는 분명 많이 다르고요, 다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피로유발요인'을 아무래도 상관없는 걸로 치부해버리지 않는 게 중요해보입니다. 터널을 나온 뒤의 진짜 과제는 이제부터 쌓인 문제들을 하나씩 풀어가는 걸테니까요 ㅎㅎ
· 3 y
Seoungyeol Park
선생님 제 댓글에 댓글 하나만 달아주시겠어요? ㅜ 갈무리 기능이 지금 좀 이상해서...
· 3 y
이우창
Seoungyeol Park 이 포스팅이 3-4년 전 거라서 그런지 댓글에 댓글달기가 지원되지 않네요 ㅠㅠ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