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석 2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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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준 선생님정도 되면 사람 성격 정말 좋은거다. 나로서는 따라가기 어려운 훌륭한 인품을 갖고 계신다. 연배가 우리 아버지랑 비슷하신데, 그 연배의 아저씨들이 자기 자식뻘 정말 그야말로 자식뻘(자제분이 나랑 비슷한 연배)의 사람한테 내가 실수했다, 미안하다, 이렇게 말하는거 쉽지 않다. 아니, 심지어 자식한테도 미안하다고 말하기 쉽지 않다. 내가 그걸 모를 정도로 못되지는 않았다. 저정도의 인품이시면 가끔 말을 좀 심하게 하셨더라도 넘어가고 얘기를 나눌 수 있다.
술자리에서 재밌는 말씀도 많이 하셨다. <뉴라이트열전>을 쓰는데 있어 선생의 말씀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을 쓰면서 관련 인터뷰를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데 선생님 '증언' 덕분에 최소한의 면피는 할 수 있어 다행인 듯하다. 박현채 선생과 안병직 선생에 대한 당대의 생생한 평가는 내 착각을 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물론 선생께서 내게 하셨던 실수는 가벼운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사과한다고 끝날 일도 사실은 아니다. 우리 개인 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구자라는 건 사회적 분업체계의 한 부분에 속한 사람으로, 육체노동 같은 가치창출행위를 하지 않는 대신 정신노동에 종사하며 남들을 "대신"하여 지식을 생산, 유통하는 걸 직업으로 하는 이들이다. 나같은 글쟁이도 마찬가지이다. 이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도 품질이라는 게 있어서 사회적 분업체계가 잘 확립된 선진사회라는 건 품질이 좋은 지적 생산물이 연구자 혹은 연구공동체로서의 학계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며 잘 유통되고, 그렇지 못한 질낮은 것들은 도태되는 과정을 거친다. 일반인들이 학자의, 연구자의 권위에 일단은 한번 숙이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건 이런 맥락이다. 그렇기에 연구자가 타인의 저작에 관해 비평한다는 건 이 지적 생산물의 품질을 검증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벼운 일일까?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연구자의 자격을 걸고 참여하는 걸 의미한다. 단 하나의 실수조차도 있어서는 안될 그런 엄중한 행위다. 일반인들이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이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연구자는 다르다. 막말로 학위는 고스톱 쳐서 땄나? 저작 비평 과정에서의 연구자의 무능력, 무지, 실수 등의 행위들은 사회적 분업을 교란하는 행위로 그 사회적 해악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하다. 물론 나야 연구자는 고사하고 작가라고 하기도 사실 민망한 사람이고, 이미 졸저의 사회적 평판과 신뢰성에 심각한 침해가 발생했다고 한들 그 사회적 해악도가 그리 크지는 않겠지만 연구자로서의 의무라는 게 있다. 단 하나의 사실관계라도 틀린다면, 학위까지 반납하겠다는 그런 태도로 비평을 해야 한다. 선생께서는 아마 이것들이 범생이라 그런다고 한탄하실지 모르겠지만, 연구자들이 주례사 비평을 하게 되는 건, 꼭 다른 연구자와의 관계를 고려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선생의 지적에 과할정도로 화를 냈던 건 이런 맥락이다. 제3자가 보기에는 그냥 비난받고 상처받은 걸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매일 먹는 욕 하루 더 먹는다고 어떻게 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도 임명묵, 임정빈 등과 화해를 하라 말씀하시는데, 화해하고 말 것이 없다. 이들의 글에 반응하지 않는 건 내가 보기에 이들이 연구자로서의 기초적인 자질조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내가 수준이 너무 높고 그런 게 아니라 임정빈의 비평글 하나만 보더라도 오류가 너무 많다. 가령 임정빈은 중층적 소유구조와 화폐자본의 모순적 관계를 다룬 내 모델에 "화폐자본이라는 용어를 왜 쓰는지 모르겠다"며 화폐자본은 곧 화폐거래자본을 의미하고 그것은 상인자본의 일부인데, 어째서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을 합하여 화폐자본이라 하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가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마르크스 문헌을 10년 공부한" 사람인지 의심스럽다.
왜 그런가. 이 비판 하나만으로도 임정빈은 <자본론>을 전혀 꼼꼼하게 읽지 않았을 뿐더러 이 주제에 관해 비평할 지적 역량이 없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이들에게는 임정빈의 지적이 타당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 이전의 세계>의 해당 부분에 나온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제형태>에서 본원적 축적을 다루며 마르크스는 분명하게 화폐적 부가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관점을 일관되게 적용하여 <자본론>을 서술하고 있다. 예컨대 <자본론> 1권의 본원적 축적장에서 마르크스는 명확하게 "중세는 두 가지 서로 다른 형태의 자본을 남겨놓았는데, 그것은 ... 곧 고리대자본과 상인자본이다. .... 고리대와 상업을 통해 형성된 '화폐자본(Geldkapital)'(강조는 인용자주)은, 농촌에서는 봉건제도 때문에 도시에서는 동직조합제도 때문에, 산업자본으로 전화되지 못하고 있었다."(칼 마르크스, 『자본』Ⅰ-3, 김영민 역, 이론과실천, 1991, pp. 904-905.)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는 고리대자본과 상인자본을 통해 형성된 화폐적 부 혹은 화폐자본이 산업자본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본원적 축적의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화폐적 부와 화폐자본의 차이는 무엇인가. 마르크스는 화폐자본을 <자본론>의 2권과 3권의 맥락에서(나는 임정빈이 어째서 2권만 참고하고 정작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의 역사적 전개를 다룬 3권을 언급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명확하게 M-C-M'(G-W-G')의 순환과정의 맥락에서 언급하고 있다. 전자본제 사회에서는 화폐의 자본으로의 전화가 생각만큼 자주 일어나지 않았기에 대부분의 경우 화폐자본은 화폐적 부의 형태로, 축장된 화폐의 형태로 상인의 손에 주로 머물러 있었다. 마르크스는 매우 적절하게 전자본제 사회에서의 화폐가 대부분 토지의 매입에 사용되며 토지자산의 형태로 존재했음을 지적한다. 그것이 상인자본, 혹은 고리대자본으로 전화되는 경우조차도 생각만큼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마르크스는 3권에서 거듭하여 지적하고 있다. <자본론> 1~3권에 나오는 "화폐자본"의 모든 용례를 국역본, 일어판, 독어판 등으로 비교하였기 때문에 딱 하나의 사례를 제외하면 최소한 <자본론>의 용례에서는 이러한 구분이 틀릴 일은 없을 것이다.
딱 하나의 용례란, <자본론> 3권에서 마르크스가 "고리는 소비적인 부에 비하면 그 자신 자본의 성립과정으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고리대자본과 상인재산은 토지소유에 의존하지 않는 화폐재산의 형성을 매개한다. 생산물의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발전하여 있지 않으면 않을수록, 교환가치가 생산을 그의 충분한 넓이와 깊이로 정복하고 있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더 화폐는 사용가치로의 부의 국한된 표현양식에 대립하여 본래의 부 그 자체로서, 일반적인 부로서 나타난다. 이것이 화폐축장의 기초이다. ... 특히 화폐가 상품의 절대적 형태로서 나타나게되는 것은 바로 지불수단의 형태에서이다. 또 특히 지불수단으로서의 화폐의 기능이야말로 이자를, 따라서 화폐자본을 발전시키는 것이다."(칼 마르크스, 『자본』 Ⅲ-2, 강신준 역, 이론과실천, 1990, p. 742.) 이상의 인용에서 마르크스는 상인자본도 상인재산이라 표현하는 등, 위의 용례 구별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의미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용례에 있어서는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이렇기에 전자본제 사회에서 중층적 소유구조와 대립하는,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용가치로의 부의 국한된 표현양식"에 대립하여 "본래의 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고리대자본과 상인자본을 "화폐자본"이라 명명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이 화폐자본이 어떻게 산업자본으로 전화되는지를 다루는 게 <자본론> 1권의 본원적 축적장의 내용이고, 또 3권의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의 역사적 전개를 다룬 제20장과 제36장의 맥락에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자의적인 판단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가령 루돌프 힐퍼딩은 1910년에 출간한 『금융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 발생기에는 화폐자본이 고리대자본과 상인자본의 형태로 자본의 축적에서 그리고 수공업적 생산을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전환시킬 때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루돌프 힐퍼딩, 『금융자본론』, 김수행 외 역, 비르투, 2011, p. 332.) 이외에도 카우츠키, 레닌 등의 여러 저작에서, 예컨대 레닌의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의 결합을 다루는 과정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나온다.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서 "소경영"이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이들은 카우츠키, 레닌 등의 저작들을 한번 찾아보기를 권한다. 소경영뿐만 아니라 대경영이라는 표현도 많이 나온다는 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탈린주의 이전의 마르크스주의 관련 문헌들에는 이런 개념어들의 사용이 보편적이었다.
임정빈의 지적은 연구사적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 화폐자본을 보다 엄밀하게 개념화하며 "전기적(前期的) 자본"에 관한 이론을 전개한 오츠카 히사오(大塚久雄)의 고전적인 저작, "소위 전기적 자본이란 범주에 대하여"(大塚久雄著作集 3권 참고), 이래로 전기적 자본과 화폐자본을 혼용하는 경우는 있을지라도 전자본제 사회에서의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을 화폐자본으로 묶는 게 말이 되냐고 비판하는 경우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박사학위를 받은 임정빈은 연구자로서 이 주제에 관해 마르크스의 <자본론>의 용례와 연구사를 충분히 습득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것인가. 그의 비평에서 제기된 사소한 지적 하나만으로도 이렇듯 연구사를 서술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는 내가 자신의 비판 전체에 답하지 않고 체리피킹한다고 항의하지만, 나는 그 이전에 앞서 자신이 이 주제를 비평할 역량이 되는지 되짚어보는 지적 겸손함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내가 구태여 반론하지 않은 부분들은 모두 그가 기초적인 사실관계, 해석조차도 틀린 부분들이다.
나는 그가 애초에 비평을 쓰기 이전에 <자본론> 1권부터 3권까지를 정독했는지부터 의심스럽다. <자본론> 2권의 논제 자체가 "화폐자본의 순환"이다. 마르크스는 화폐자본의 순환, 화폐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던 부가 더 큰 형태로 되돌아오는 과정 속에서 상인자본, 산업자본 등을 다루고 있으며 상인자본의 형태를 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으로 나누어 파악하는 것도 바로 이 전체 화폐자본의 순환과정의 특정한 국면, 예컨대 화폐거래자본을 마르크스는 종종 화폐자본이라 표현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화폐거래자본을 유통과정 내부에서의 한 국면을 의미함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임정빈은 이를 전체 화폐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전화 과정에 적용하여 둘의 용어상의 동일함의 적절함을 따져물으니 나로서는 그가 나와 함께 더불어 <자본론>을 놓고 논할 수 있는 사람인지 의심스럽다.
한 연구자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것일지 모르겠다. 연구자에게 있어 그를 무시하는 행위가 얼마나 치욕적인지에 대해서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알고 있고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그와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그의 태도 자체가 대화를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말투의 거침 등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나의 공부가 완벽하다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하나의 사례를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옳다 생각하지만 <잉여가치학설사>, <자본론 초고> 등의 다양한 문헌들 어디에서 또 어떻게 다른 용례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원래 공부란 이렇듯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것이다. 대수의 법칙이 적용될 정도만 되어도 연구자로서는 만족할만한 사안이 아닐까 한다. 이렇듯 연구가 위태로운 것이기에 연구자는 필연적으로 연구에 있어서는 지적 겸손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잘 아는 영역에서조차도 반례가 나올 수 있는 게 연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나는 임정빈의 글에서 지적 겸손보다는 만용과 오만함을 본다.
신현준 선생께서는 내가 그와의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표했을 때, 나만의 성채를 쌓고 그 안에 틀어박히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듯하다. 오해다. 그럴 거였다면 나는 이 책을 내지 않았을 것이며 이 책으로 강의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을 읽고 임정빈은 또 어쩌고저쩌고 주절주절 긴 글을 써오겠지만 나는 보지 않을 것이다. 왜 그런 시간낭비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가계정을 만들어 계속 내 개인 SNS를 염탐하고 좋아요를 누르거나 메시지를 보내는 그의 태도는 내가 만약 여성이었다면 스토킹으로 간주될만한 사안이라 생각하고는 한다. 대화를 거부하는 이에게 왜 집착하는지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그와 아름답게 이별하고자 최선을 다했고 내 나름의 성의 표시도 다 하였다. 둘 사이에 있었던 사적인 대화에 관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아무튼 나는 그에게 인간적인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나는 예전처럼 그에 대해 단 한 마디의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너무 많이 언급했다. 이것 자체가 나는 임정빈한테 실례라 생각한다.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도 언급하면 되겠는가. 내가 언급하지 않도록 주변분들이 도와주셨으면 한다. 임명묵 또한 마찬가지이다. 임명묵의 주변인들이 왜 그렇게 나와 그의 화해를 주선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임명묵 당사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주변인들을 단속하길 바란다. 그가 나와 겹칠 일도 없을 것이다. 종종 그가 나를 비난한다는 얘기를 전해듣지만 대응하지 않는다. 아마도 주변인들의 오해일 것이다. 임명묵도 명확하게 나에 관해 언급하는 일이 없음을 주변에 주지시켜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기를 권한다.
신현준 선생님께서 제시해주신 북토크를 거절하는 게 아니다. 말씀드렸듯이 그 패널로 임명묵, 임정빈 이 두 임씨를 부르겠다는 말에 거절을 표하는 것이다. 다른 새로운 이들이 참여한다면 기꺼이 선생의 제안에 따라 열심히 준비해볼 의향이 있다. 홍종욱 선생님의 말씀처럼 선생님께서도 패널에 참여하셨으면 좋겠다. 이정도면 내 의사는 충분히 전달되었을 듯하다. 나는 내 책이 마르크스를 잘 아는 이들만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논란이 되고 논쟁이 발생하기를, 그리하여 더 많은 이들에게 읽히기를 바란다. 이 책은 내가 썼지만 내 것이 아니다. 이 책에 관해 논하는 모든 이들의 것이다. 책을 내고 나서 느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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