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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류동민 (지은이)위즈덤하우스2012-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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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주간 1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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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사회과학적 전망과 인문학적 상상력을 결합한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실패한 신자유주의에 대해 누구도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는 자본의 모순을 가장 깊숙이 파헤칠 수 있는 도구인 동시에 인간성 회복을 위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인간성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고, 마르크스 사상의 핵을 이루는 ‘한 줄’ 문장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고찰하고 있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저자 류동민 교수는 젊은 층을 대상으로 퍼지고 있는 희망 예찬과 위로 코드를 염려하며, 사회구조는 개선하지 않은 채 근거 없이 희망을 강요하거나 개인적 고뇌는 성찰하지 않은 채 구조만 개혁할 것을 주장해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책은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적 이론을 견지한 채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전면에 내세워 사회구조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 모두를 통찰하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에 대해 알고는 있으나 그의 원전을 읽어본 적 없는 독자들을 위해 매 장마다 한 줄 원문을 제시해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지니고 있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시대적 고민과 개인적 허무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을 품고 있는 3040세대 모두에게 단비와도 같은 책이 될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프롤로그
말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은 말해 줘도 모른다 ∥ 여정의 출발: 낯선 파티장에서
1. ‘나’를 ‘나’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꽃에 대한 말들
내가 생산하는 방식이 바로 나다
페티시즘, 허상이자 위안이 되는 아이러니
2. ‘나’와 ‘너’는 물질의 변화에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
우연한 마주침
진리는 저승이 아니라 이승에 있다
그럼에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론이 사람을 사로잡는 순간
새로운 미래, 오래된 습속
세상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관계의 바깥에서 관계를 들여다보기
최대의 영광이자 최대의 치욕
3. ‘너’와 ‘사회’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는 것
사랑, 그것은 목숨을 건 도약
모든 견고한 것은 녹아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자유, 평등, 소유 그리고 벤담?
끊임없이 혁명을 일으켜야 하는 계급
소비자는 노동자의 적인가?
4. 능력, 공정함 그리고 정의
옛날 옛적, 그 판타지
여기가 로두스 섬이다, 자 여기서 뛰어보라!
사회적 생산력에서 자본의 생산력으로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설 때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5. 관계의 비대칭성, 권력 그리고 민주주의
그대 생각하다 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국가, 부르주아 계급의 집행위원회
삼성에게 좋은 것은 한국에도 좋은 것?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첫 번째는 비극으로, 두 번째는 소극으로
6.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꿈: 희망 그리고 공산주의
역사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
부정의 부정
코뮤니즘, 그 현실성
각자의 자유, 모든 이의 자유
사랑을 놓치다
코뮤니즘, 사랑의 재발명
에필로그
나는 이렇게 읽었다: 열 명의 저자와 한 편의 영화에 관한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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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감히 추측하건대 ‘불혹’이라는 말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실증적인 명제가 아니라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규범적인 명제, 심지어는 ‘흔들리고 싶지 않다’는 소망의 표현이었을 듯합니다. 아마 공자 자신도 나이 마흔이 될 때까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흔들리는 자신을 경계하고 싶어 이러한 정의를 내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 더보기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자신의 몸도,
그의 바깥에 존재하는 자연도, 그의 정신적 본질, 그의 인간적 본질도 소외시킨다.”
마르크스와 주류경제학의 차이라면, 시대와 사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언제나 일하는 것을 싫어하느냐 하는 물음에 어떠한 대답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하는 노동이 항상 우리에게 불... 더보기
“하나의 특정한 생산양식 또는 산업적 단계는
항상 하나의 특정한 협업방식 또는 사회적 단계와 결합한다.”
사랑에 빠진 연인들은 서로의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 사랑이 갖는 진정한 한계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 관계 밖에서, 즉 사랑이라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의 체계 밖에서 그 체계를 성찰할... 더보기
인간은 유적 존재라는 마르크스의 명제는 결국 우리 개개인은 유전체, 즉 인간 전체와 관계를 맺음으로써만 자신과 관계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인간 전체로부터 동떨어져서 나 홀로 규정될 수 있는 그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p43-44) - JUNE
그러므로 이론이 대중을 사로잡아 물질적 힘이 되는 것은, 그것이 물질적 힘이 될 수 있는 현실의 물질적 변화가 먼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론이 비판의 무기를 넘어 실제 무기의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이론 자체의 논리적 일관성은 물론, 사회적 조건이 변해야 합니다. (p113) - J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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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류동민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리미 신청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분야는 노동가치론의 수리적 해석이다.
최근작 : <[큰글씨책] 경제학들의 귀환>,<이상하고 아름다운 밥벌이의 경제학>,<9명의 경제학자들> … 총 38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모든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제2의 대공황이라 불린 2008년 미국발 금융대란 이후, 전 세계는 시장 전반의 대대적인 거품 붕괴와 대규모 실업, 비정규직의 양산 및 임금 저하, 빈곤의 무차별 확대 및 빈부 격차 심화를 경험했다. 사람들은 고작 몇몇의 금융가와 은행가들로 전 세계 경제가 마비되고 붕괴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충격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금융대란의 원인을 집중조명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인사이드 잡Inside Job」을 보면 경악을 금치 못할 장면이 나온다. 대공황을 초래한 금융가와 은행가들이 파산 직전 천문학적인 액수의 상여금 잔치를 벌인 일이 과연 정당한 것이었는가 묻는 질문에 인터뷰에 응한 관계자가 “시스템이 그렇다면 받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런 사회 시스템에서 살고 있다. 우리 사회의 모든 이들, 특히 젊은이들은 소수에게 부와 권력이 편중되는 사회에 조금도 저항하지 못한 채 무차별적인 경쟁을 강요받고 있고, 정당한 실력으로만 평가받을 수 없는 불공정한 경쟁 구조로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러한 때에 독일을 중심으로 마르크스 강의가 부활하고, 일본에서 마르크스 관련 서적이 30만 부를 넘는 경이적인 판매고를 기록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실패한 신자유주의에 대해 누구도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연구는 자본의 모순을 가장 깊숙이 파헤칠 수 있는 도구인 동시에 인간성 회복을 위한 실마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위즈덤하우스 刊)는 인간성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해하고, 마르크스 사상의 핵을 이루는 ‘한 줄’ 문장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고찰하고자 노력한 마르크스 해설서이다.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저자 류동민 교수는 젊은 층을 대상으로 퍼지고 있는 희망 예찬과 위로 코드를 염려하며, 사회구조는 개선하지 않은 채 근거 없이 희망을 강요하거나 개인적 고뇌는 성찰하지 않은 채 구조만 개혁할 것을 주장해서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진단한다. 책은 마르크스의 사회과학적 이론을 견지한 채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를 전면에 내세워 사회구조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 모두를 통찰하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에 대해 알고는 있으나 그의 원전을 읽어본 적 없는 독자들을 위해 매 장마다 한 줄 원문을 제시해 마르크스 사상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지니고 있던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도록 도왔다. 시대적 고민과 개인적 허무 사이에서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마르크스에 대한 미련을 품고 있는 3040세대 모두에게 단비와도 같은 책이 될 것이다.
사회과학적 전망과 인문학적 상상력을 결합한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논리가 촘촘하게 세상을 얽어맬수록, 우리는 그때그때의 경쟁에 압도당하여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살아가는 데만도 버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때일수록 되풀이되는 일상에 파묻히지 않고 개인이 사회 전체의 구조와 연결되는 지점과 방식을 이해하는 사회과학적 시야를 가지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나아가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보람을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워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정치적 입장이야 어떻든지, 마르크스가 사회과학적 소양과 인문학적 전망을 결합하고자 했던 보기 드문 사상가라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개인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하여 사회관계와 구조를 생각한 다음, 다시 개인에게 돌아오는 구성으로, 사회과학적 전망과 인문학적 상상력을 적절하게 결합한 에세이이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를 매우 쉽고 매력적인 언어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한 편의 에세이를 읽는 듯한 편안한 느낌으로 마르크스 깊이 있게 사상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줄 문장으로 만나는 깊이 있는 마르크스
이 책은 한 줄 문장을 통해 고전을 이해하는 위즈덤하우스의 인문교양 시리즈 ‘한 줄 클래식’의 첫 번째 도서이다. 고전을 단순 요약·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핵심적인 사상을 대표하는 문장을 찾아 이를 심도 깊게 해석하여, 고전을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거리낌 없이 사상의 지평을 넓힐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시리즈의 취지이다.
시리즈의 첫 권으로 야심차게 출발한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전문 학자들의 성역이라고만 여겼던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직접 만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 유명한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낳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나 인류 역사상 가장 혁신적인 저서인『자본론』, 『경제학·철학 초고』, 『헤겔 법철학 비판』은 물론, 우리에게 다소 생소하지만 마르크스의 핵심사상을 제대로 대변하고 있는 『독일 이데올로기』(“인간들이 무엇인가는 그들이 무엇을 생산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생산하는가와 일치한다.”),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까지 폭넓게 다루고 있어 마르크스를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도 깊이 있는 시선을 제공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형도, 김훈, 홍상수, 알랭 드 보통 등 일반 대중에게도 친근한 작가들의 작품을 인용해 에세이적 재미를 더하고 있으며, 장하준, 마오쩌둥, 슬라보예 지젝 등 학문적 연장선상에 있는 대표적 학자들을 소개함으로써 폭넓은 지식을 향유할 수 있도록 도왔다.
김수행, 홍세화, 우석훈 추천! 젊은이들에게도 탈출할 권리는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인의 실천적 지식인들이 모두 입을 모아 “이 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추천하는 데에서 이미 이 책의 효력이 드러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마르크스 학자인 김수행 교수는 “우리를 병들게 만드는 경쟁의 논리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달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미래가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사회”임을 강조했으며,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는 오랜만에 서슴없이 추천할 수 있는 책이 출간된 것을 기뻐하며, “이 시대 젊은이들이 소외된 개인에서 벗어나 동시대와의 참된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쌓기를” 바란다는 애정 어린 충고를 전했다. 최근 젊은이들의 각성을 요구하며 『88만원 세대』의 절판을 선언한 우석훈 교수는 “마르크스가 창업과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할지라도, 부당하게 강요당한 스펙 경쟁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할 것”이라며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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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서는 지금 나에게 필요한 책일 거 같아 구매해 봄
여기 2014-11-03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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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우면서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마시멜로한? 이왕 알랭 드 보통 지향을 밝힌 저자) 마르크스 해설. 최근 실물로 만난 책들 중 가장 예쁜 디자인!
에르고숨 2012-05-0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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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소외에서 시작하여 사회 구조에 대한 성찰로 옮겨가는 흐름이 인상적이다. 알랭 드 보통의 글쓰기로 마르크스의 사상을 풀어낼 수 있다니!
빙과 2012-04-20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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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아직 마르크스가 어렵지만, 조금 더 알고 본다면 충분한 위로가 될 수 있는 책인듯 .
마카롱 2012-05-11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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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에 대해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관련된 책을 좀 더 읽고싶다.
Juni 2015-03-1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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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민의 문장이 참 좋다. 2040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책읽개 2014-10-2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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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책,영화등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 가는 방식이 좋다.
개암나무 2014-03-20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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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잘 읽힙니다. 학생들에게 추천하거나 철학 입문서로 읽히면 좋을 듯해요
heru25 2013-10-22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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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와 닿아서 구매했어요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기대되네요^^
sharah0608 2012-04-29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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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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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올해의 시작은 정말 최악이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인생에서 이런 일까지 실제로 겪은 것은 처음이었다. 대학교 때 친하게 지낸 동기친구가 우연한 사고라 하기에 너무 부조리한 비극을 맞이했다. 인간의 비극에서 최악의 상황은 살아있는 삶으로부터 박탈이다. 그 비극적인 슬픔을 내 친구에게 닥쳤다. 죽음이란 어둠, 사실 죽는다는 것은 인간의 관념적인 영역에서 매우 두려운 요소다. 동물은 죽음에 대한 예지는 하지 않는다. 단지 야생의 천적으로부터 잡혀 먹는 것을 두려워 순간 도망치다, 일정 안정권에 도달하면 긴장감이 풀린다. 물론 인간도 위기의 순간을 넘으면 안도의 여유를 보이나, 그런다고 죽음 그 자체를 잊지를 않는다.
위기의 순간에 자기가 아닌 타인의 죽음을 기억하면서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인간도 있다. 동물에게 그 정도의 트라우마가 있다면, 이미 야생의 모든 동물은 멸종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아닌 타인의 죽음에서 죽음의 세계를 발견하고, 그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혹은 환희를 느낀다. 삶에 대한 욕망인 에로스와 더불어 죽음에 대한 충동적 욕망 타나토스는 우리 생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그런다고 무의식적인 죽음충동이 온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이성에서 죽음은 언제나 두려운 것들이다. 그러나 막상 인간이 죽는 순간, 자신이 죽는 것을 미리 예견하는 것보다 불의의 순간들이 많다.
내 친구의 죽음이 불의의 비극인 이유는 그 친구는 산업재해로 죽었다. 미혼이고, 애인도 없기에 자신의 혈육을 남기지 못했다. 결혼한 여동생과 처남은 있어도 내 친구의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하다못해 이름을 어느 정도 알렸다면, 그를 기려주는 사람들은 많겠지만, 그 친구에게 가족과 친척, 대학교 친구 정도였다. 친구의 관을 2016년 1월 1일 오전에 운구하면서 화장터까지 따라가고, 그의 육신 하얀 재로 변하는 것까지 본 후, 마지막에 땅에 묻히는 순간까지 지켜보았다.
내 인생에서 몇 안 되는 트라우마 중에 하나였다. 같이 운구행렬에 따라가던 친구와 추모공원에서 돌아와 시내로 돌아올 때 같이 소주 4병을 마셨다. 평소에 술을 좋아하지 않은 내 성격이나,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괴로웠다. 이때 나에게 갑자기 생각나던 책 한 권이 있었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라고 말이다. 책 제목에 갑자기 내 심정을 이렇게도 잘 찔렀는지 생각지도 못했다. 원래 이 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에 한 번 읽어보았다. 마르크스가 나오므로, 결론은 노동문제와 현실의 경제적 문제를 다룬 서적이었다. <자본>을 읽어봤다면, 혹은 더 앞서서 <국부론>을 읽어도 노동문제에 대한부분을 반드시 나온다. 왜 나오는가? 노동자에게 자신의 화폐를 유지할 수 없으면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하여 고용주로부터 임금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고용의 관계는 사회적인 관계, 즉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다. 계약의 조건은 두 입장이 서로 공평하거나 대등해야 하나, 막상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친구가 근무한 곳은 분명 2인 1조야 하고, 사실 밀폐된 공간이라면 환기시설의 안정성은 물론 안전보호구를 완벽하게 지참해야 한다. 하지만 안전보호구는커녕 혼자 가서 일을 보고, 게다가 자신의 회사가 아닌 그 회사의 하도 받은 업체로 파견근무를 나갔다. 도대체 뭐라고 생각해야 할지 의문이다. 혹자라면 운이 없거나 혹은 그 사람의 어쩔 수 운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이때까지 겪어보지 못했고, 자신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기만적 사고가 바탕 되어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일이 터지면 뭔가 대안을 마련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혹은 이런 비극으로 상처받은 가족에게 진심의 위로를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친구가 평소 무슨 약을 먹는 이유로 배상비를 가지고 몇 십 %를 깎아보자는 식으로 나왔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도리어 돈으로 해결하고, 그 돈조차 아끼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돈의 가치 아래 절하된 사건을 옆에서 일어난 것이다. 사람이 소중하다면서 항상 돈을 택하는 게 이 사회다. 물론 자신과 가족이 당장 옆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그런 비정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개인적인 이익의 추구인 개별의지, 그리고 회사나 사회라는 거대한 집단의 이기심이 일치하는 전체의지, 이게 우리나라의 현실이었다. 우리에게 공공선에 대한 올바른 판단과 이성적 선택을 하는 일반의지는 증발된 게 아닌가 싶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어보듯이 내가 아픈 것은 친구의 죽음도 그렇지만, 친구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병폐이기도하다. 친구의 죽음은 우연한 사고 내지 급성 종양이나 불치병이 아니다. 그저 우리 사회의 허술한 제도에 의해서였다. 산업재해는 기본적으로 안전사고이다. 안전이 미비하다는 점은 충분히 사전에 조치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는 200년 전의 마르크스가 살던 영국과 유럽세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 인간은 항상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 의해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 본연의 인식과 존재적인 사유로서 파악하는 관념적인 영역만이 아니다. 그게 되는 것은 니체와 같은 사고를 지닌 자일 것이다. 니체가 아닌 다른 자는 니체주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런다고 그 타인과는 무관한 존재는 아니다. 언제나 타인과의 관계성에서 우리의 사회성이 구축된다.
내가 만일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나 혹은 아프리카에 태어난다면, 혹은 거기서 중산층인지 빈곤층인지 아니라면 노예인지 주인인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흔히 자신의 운명은 자신이 개척한다는 발언에서 실효성은 있다. 어느 마을에 폭격기가 출몰하여 폭탄을 투하하여 10만 명 인구 중에 10명 살아도 살아남은 사람은 있다. 그런다고 그게 생존에 대한 사실성에 보편적인 관계성을 가지는가? 한국에서 아마 이런 보편적이지 못한 상황에 등장한 하나의 사례를 전체적으로 확장하는 논리오류가 있다.
우리의 생활에서 폭격기가 떨어지더라도 저 공격이 오는지, 와도 어디에 숨을 곳이 있는지를 알고 있는가? 혹은 숨으려 해도 그곳에 물리적으로 멀리 있든지 혹은 정원이 다 차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성공신화나 누군가의 잘난 이야기는 결국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우리는 그들만의 리그에 마치 자신들이 그 좌석에 배정받은 것 같다는 착각을 한다. 한국사회의 이런 착각, 그리고 노동문제 등등 우리는 언제나 좋은 자리에 앉아 편하게 갈 수 없다. 그럴 확률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나, 그것이 자신에게 올 것이란 착각을 그것을 향하여 무조건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젖어 있다. 게다가 자신과 무관해도 그 신화를 바라보면서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자랑스러워하는 이상한 꼰대들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적인 사고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미신 아닌 미신에 자신의 이성을 상실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주장한 의견들은 모두 환상의 세계가 아니오, 망상의 약속도 아니다. 한국전쟁 당시 마치 북한군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마법의 요술램프로 생각하던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오히려 한국전쟁에서 전쟁이라는 그 자체를 멈추게 하는 마법이 필요했다. 그래서일까? 한국에서 아직도 마르크스하면 이상한 시선이 다가온다. 책에서 2011년 어느 해군 장교가 <헤겔 법철학 연구>라는 마르크스의 저작을 들고 있다는 이유로 군수사관으로부터 고소당한 일이 있다.
지금 도서관에서 유명한 서점에서 가도 <공산당 선언>이 버젓하게 팔리는 판국인데, 한국의 인식이 그런 것이다. 세계문화유산재단인 유네스코에서도 마르크스의 <자본>을 인류가 보전하고 기려야 할 문화재산으로 올렸다. 우리는 세계의 변화에 따라 움직였지만, 세계의 흐름을 전혀 따라잡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그게 오늘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항상 민생경제를 외친다. 민생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민생이 필요한 생활의 질을 올리는 것이다.
이미 트리클다운이란 낙수효과는 지나가버린 낡은 시대다. 유럽에서 경제공황이 일어나고 미국에서 경제공황에 휘말린 이유는 생산은 언제나 과잉이나, 그것을 소비하는 주체가 없다. 한국경제에서 시장소비 감축을 보면 알 수 있다. 늘 주머니의 지갑이 닫혀있다 혹은 잠겨있다고 한다. 돈의 유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중산층 아래에 위치한 대다수의 경제적 약자들은 자신의 생계수단을 위해 최소한의 소비만 할뿐이다. 소비의 대상과 범주가 너무 단순하고 광범위하지 못하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다.
현대사회는 이른바 문화콘텐츠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 하는 시대다.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은 이미 충분히 시중에 나와 있고, 단순히 자본력이나 노동력의 단위로 승부하는 과거 유럽의 19세기 자본주의는 한계라는 점이다. 어떤 상품을 소비하려면 다른 상품이 소비해야 하나, 어느 지정된 상품만 있다면 다른 상품이 팔려야 하는데, 그것이 가능한 것은 전혀 다른 색다른 분야로 물꼬를 트는 것이다. 레드 오션에 치중한 한국 경제구조로서 기계의 발달, 기술의 발전은 10명의 노동자를 1명으로 대체가능한 시대가. 나머지 9명이 취업을 하지 않거나, 임금이 적으면 결국 인구 재생산이란 위기에 봉착한다.
한국에서 차후 경제적 총생산량이 축소 때문에 문제화 되고 있다. 인구의 감소는 가정을 이루어야 하는 결혼비율이 줄어든 것도 있으나, 결혼 후 출산이 1명 내외인 점이다. 한국의 재생산력을 유지하려면 부부마다 2명을 가져야 한다. 물론 모든 남녀가 결혼하지 않고, 자녀들이 태어나도 불운의 사고로 죽어도 수명의 연장으로 충분히 노동력이 유지된다. 하지만 생각하면 국가의 최고로 중요한 정책 중에 하나가 국방력에선 심각한 타격이 온다는 점이다. 징병제를 시행하는 한국에서 남성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전체 인구가 줄어드는 영향에서 시작된다.
현재의 인구감소속도, 노령화에 따라 한국은 2100년이 되면 과연 국가로서 존재할 수 있을까 싶다고 한다. 미국처럼 다인종 국가가 아니라 한국은 단일민족이란 이름을 내세우는 국가다. 단일민족이란 이름은 국가주의나 전체주의에 이용되기도 하나, 그만큼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쉽게 버릴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국 같은 나라에서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의 존속조차 위협이 되는 문제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의 말만으로 아이를 3명을 낳는 게 도리라 하나, 막상 중산층 이하의 많은 국민입장에서 결혼 자체가 부담스럽고, 출산조차 어렵다.
결혼의 조건은 경제적 기반이어야 하나, 그 경제적 기반이 무산되면 결혼을 해야 하는 젊은 사람들은 오직 좌절과 현실도피만 있을 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현실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국가의 문제에 대해 다들 “문제네, 문제야”라고 말하지 실제로 현실에서는 그런 젊은이들을 궁지로 몰아간다. 마르크스가 목표인 세상은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주장한 것을 좀 더 확장한 것이다. 루소는 모든 사람이 너무 가난해서 자신을 팔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신을 판다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넘어 그 사람의 인권과 삶의 가치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 문제를 노동이란 것을 본 이유는 많은 노동자들이 비참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문제점으로 모두가 대기업이나 판검사, 혹은 좋은 직장을 원하지만, 그런 자리는 솔직히 15% 내외이다. 그 외는 자영업, 중소기업 등과 같은 서민이다. 본인이 서민이고도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의료비가 올라 병원에서 진료 받은 분들이 병원비가 오른 것은 병원 원무과 직원에게 항의하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아프면 청춘이 아니라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집에서 쉬어야 한다. 현실의 고통이 아프게 만들었지만, 현실은 그 아픔조차도 고통을 가하여 통증을 잊게 만든다. 어째보면 그것이 더 무서운 게 아닌가 싶다. 아픈데도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이제는 아프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일 때 말이다. 누구나 태어날 때 사랑을 받기 위해라고 말하나, 왠지 그 사랑이란 이름은 가식과 허울 좋은 변명에 지나친 거짓인 것 같다. 마르크스가 다시 내게 물어본다. 아프냐고 말이다. 마음이 아파도 현실은 늘 냉정하다 못해 살벌하다.
현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 <사회계약론>에서 10만 명의 투표로 선출된 정치가는 막강한 힘을 가지나, 그 대상이 되어야 하는 국민 1명의 존재는 겨우 1/100,000에 해당된다. 보잘 것 없는 한 개인이 세상을 바꾸기란 어렵다. 단지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거름이나 하나의 동기는 될 수 있다. 세상의 덕목에 대해 생각하자면, 겉으로는 인간의 도리를 말하면서 타인의 고통과 부조리 앞에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자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아마 홉스가 주장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삶의 지침을 여기는 사람이 많다.
물론 내 일상생활에서도 직장동료나 옛날 친구들도 그렇다. 나보고 미련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이기심을 합리적으로 여기는 전체의지에서 그들조차도 그 안에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서 뒤쳐진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자기 아이는 좋은 학교를 가서 좋은 직장에 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제로섬 게임이다. 앞으로 더 심한 경쟁으로 모순과 부조리가 우리를 조우할 것이다. 그때 가서도 과연 지금의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인간은 오만스러운 존재이다. 나 역시 가끔 내가 오만스럽다고 생각한 점이 많다. 하지만 그 오만함을 다시 돌아보고 거기서 또 시작하는 점에서 또 다른 나로서 성장할 수 있다.
현실 일상생활에서 내가 이런 생각을 한다고 누구나 알아주거나 하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도 옆 사람은 그들만의 논리를 제시한다. 어느 부분에 대해 내가 모르는 부분은 있지만, 적어도 정확히 문제가 되는 부분에 대해 다들 그 현실적 문제를 부정하는 게 보인다. 겉으로는 좋은 사람인척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기심을 남들도 같다고 말하는 전체의지적인 발언에서 이 사회의 누군가는 희생되고 소외되어 간다. 문제는 본인 자신도 그런 희생과 소외의 대상이란 사실조차 각인하지 못하는 점이다. 어떻게 보자면,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어본 후 내가 “그렇다”라고 말하는 편이 행복할 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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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6-02-01 공감(11) 댓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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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를 위한 마르크스 읽기
마르크스가 활동한 시기는 1800년대 중·후반이지만 정작 우리가 아무런 재제 없이, 자유로이 그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군사정권 시대는 두 말할 것도 없고, '보통사람'의 시대인 1990년도만 해도 <자본론> 제1권(만)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고 하니, 마르크스는 그 당시에도 여전히 특별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후 김수행 교수 번역의 <자본론>이 제3권까지 완결된 시기가 2004년 즈음이고(1권의 출간은 훨씬 이른 시기였지만), 2006년에는 고등학생들의 논술 학습서에까지 <자본론>이 등장한 것을 보면 대략 10여 년 전쯤부터 마르크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힘겹게 이뤄진 마르크스와의 상봉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거리감은 여전히 존재했다. 경제위기의 여파로 대부분의 관심은 마르크스를 통해 어떻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는가에 있었고, 많은 지식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르크스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며 글을 맺곤 했지만 정작 하루의 끼니를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저 멀리서 들려오는 관념의 메아리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마르크스라는 위대한 학자와 불후의 명저 <자본론>을 조금은 멀찌감치 밀어 놓는다. 그 대신 마르크스의 청년시절로 돌아가 그의 휴머니스트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경제학 철학 초고>와 유물론에 열광했던 시절 쓴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문장들을 발췌하고 <헤겔 법철학 비판>,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고타강령비판>을 비롯 엥겔스와 공저한 <독일 이데올로기>나 <신성가족> 등 (대중들에게) 친숙하지 않은 저서들마저 불러내 마르크스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생각들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대표작인 <자본론>을 제외시킨 것은 아니지만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경제, 정치를 포함한 사회, 그리고 역사에 이르렀다가 다시 개인으로 수렴되는 사유의 과정 속에서 <자본론>이 차지하는 부분은 의외로 적은 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마르크스로 접근했던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 그의 인간애를 출발점으로 접근해 간다면 실존과 현실에 대한 우리들의 고민에 색다른 조언들이 들려올 것이다.
마르크스가 바라 본 인간이란 독립된 개별적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데카르트의 입장에서는 이의를 제기할만한 정의(definition)겠지만 마르크스는 '생각' 또한 관계로부터 유입되는 바, 사회 속에서 관계 맺지 않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가 '소외'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소외가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인데, 여기서 소외란 단지 타인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외톨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적(類的) 존재'로서의 인간이 겪는 노동으로부터의 소외, 더 나아가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까지 이어지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인간적 본질은 각각의 개인들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ensemble이다.(p.33)
소외된 노동은 인간에게서 자신의 몸도, 그의 바깥에 존재하는 자연도, 그의 정신적 본질, 그의 인간적 본질도 소외시킨다. 자신들의 노동생산물, 자신들의 생활 활동, 자신들의 유적 본질로부터 인간이 소외되었다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귀결은 인간의 다른 인간으로부터의 소외다. 각각의 인간은 다른 인간들로부터 소외되고, 모두는 인간의 본질적 자연으로부터 소외된다.(p.52)
인간을 무리 속에 살아가는 유적 존재로 보고 인간의 유적 본질을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으로 여겼던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노동의 소외를 초래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의 소외란 쉽게 말해 노동의 수확과 실행과정에서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감정상태를 의미하는데, 자본주의의 사유재산제도 하에서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에게 모든 노동의 결과물이 종속되므로 노동자는 이것을 직접 소유·처분할 권리를 박탈 당하고 더 나아가 노동은 무의미한 반복 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또한 마르크스의 ‘노동’을 <자본론>에서의 의미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의 철학적 사유 전반을 통해 지적, 육체적 활동으로 간주할 때, 이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직장인들이 토로하는 ‘지겨운 밥벌이’와 일맥상통하며, 그 ‘지겨운 밥벌이’가 우리의 삶, 우리의 사고방식까지 규정하는 ‘생산양식’임을 밝힌 마르크스를 통해 현실을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물질적 생활은 물론 사유 방식에 있어서도 독립적인 인격체가 되길 바랬다. 그래서 차안(this world)보다는 피안(that world)을 바라보고 현실의 고통을 신(神)에게 의탁하게 하는 종교와 주객이 전도되는 결과를 빚어내는 물신성(fetishism)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여기서 물신성이란 사전적 의미를 너머 인간의 사고로 어떤 대상을 신격화하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것임을 망각한 채 이에 지배당하는 현상을 의미하는데, 종교 역시 무신론자인 마르크스의 입장에서는 물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물신의 문제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고 소외시키는 ‘세속적’ 방식을 교묘하게 은폐하는데 있다(비록 종교의 경우 자기소외의 ‘신성한’ 형태라고 별도로 칭했지만).
어떤 사람이 왕인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신하로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신하라고 생각한다.(p.67)
저자는 물신의 지배 ‘아래’서 주술에 걸린 듯 일하고, 소비하고, 사고하는 우리들을 마르크스의 이론에 태워 ‘위’쪽으로 끌어올리고 마치 조감도를 보듯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물신의 지배 영역에서 벗어난 우리들은 끊임없이 경쟁에 허덕이는 자본가들을 내려다 보고, 소비자로서의 갈등을 겪는 노동자의 마음을 엿보며, 사회가 법에 기초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사회에 기초하는 원리를 알게 되고,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가의 모습을 확인한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 무한 경쟁의 사회풍조, 대형마트의 열풍, 행정수도 위헌소송, 삼성사건 등을 떠올리면서 19세기 한 철학자와 같은 심정으로 21세기의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이제 ‘마르크스의 주장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의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어도(마르크스의 주저인 <자본론>을 심층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므로) 그의 이론이 비춰낸 자본주의의 전반의 문제점들이 현대 사회의 당면문제들을 예고했음을 알 수 있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철학의 역할은 공허한 관념세계의 구축이 아니라 철저히 현실을 비판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완성되는 절대 진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진리는 오히려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검증되고 재형성 되가는 것이라 여겼다. 그의 묘비명 조차도 철학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라는 신념을 나타내고 있으니 그가 얼마나 현실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p.83)
현실성과 실천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의 철학은 ‘지금’, ‘여기’를 위한 고민에 커다란 힘이 된다. 현실에 대한 비판 없이 깨달음 혹은 위로를 제공하는 ‘인생철학’은 이 시대의 부조리를 견딜 수 있게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더 나은 사회를 위한 도전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마르크스의 이상(理想)을 좇아 공산주의 사회를 꿈꾸거나 노동혁명을 위해 투쟁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 때문에 공산주의 국가를 설립했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조차도 국유화를 비롯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구체적인 정책을 찾기 힘들었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오히려 ‘현재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주적 운동’(p.248)으로 묘사되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공산주의는 생산의 국유화라는 형식적인 관점을 너머 자본주의 하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사회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마르크스의 철학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의 개인과 사회의 문제점들을 진단해 보고 이를 변화시켜나갈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동안 일반적으로 정치·사회적으로 통용됐던 그의 이론들을 개인이라는 미시적 영역에까지 적용시켜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했다는 점이 참신했다. 이와 관련해 기억하고 싶은 것은 개인이라는 수준에서의 공산주의란 인간의 소외가 없는 상태, 즉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이 달성되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는 용어보다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와 같은 표현을 선호했다는 것과도 잘 어울리는 해석이다.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갈 사회가 어떤 모습이 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겠지만 마르크스의 철학이 혁명이나 투쟁보다는 연합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를 변화시켜 나갔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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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하 2012-05-02 공감(20) 댓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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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의 원리가 작동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세계를 그리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의 전제가 아닐까? 그리고 ‘나’는 이러한 세계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명확히 인식하고, 이 자각(自覺) 하에 지향하고자 하는 사회를 위해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 수순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자본주의’사회라는 세계(생태계)의 속성이 무엇인지, 개인이란 존재는 사회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어떤 요인들이 인간 서로를 좌절케 하고 소외시키고 있는지를 마르크스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궁극에 도달해야 할 사회형태와 지향되어야 할 인간의 의식을 탐색한다.
1. 물신성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많은 저작들의 개념을 집약하여 오늘의 현실을 설명한 이 책을 몇 글자로 다시 표현 한다는 것은 어쭙잖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소비사회, 물질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우리가 놓인 생태계의 본질적 특성을 압축적으로 대변하는 ‘물신성’이란 어휘만큼은 정확하게 납득하여야 할 것 같다.
'물신=페티쉬(fetish)'이란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만으로 위안을 받지 못한 인간들이 나무나 돌을 쪼아 신의 형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빈다는 기원에서 시작된다. 결국 신성이 덧씌워진 물질을 숭배하는 역전된 의식의 전형이랄 수 있다. 오늘의 소비주의를 견인하는 힘은 바로 이 물신성이기에 내재된 무모함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된다. 이 같은 물신성은 종교나 돈, 상품은 물론이고 권력도 지니고 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인정에 의해서 비로소 주어지는 권력이 일상화되면 권력을 가진 자가 스스로 자신의 내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면서 물신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이 독재화되고 안하무인으로 변질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물신성 때문이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물신성을 고착화시켜주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특정한 삶의 방식, 생활양식이라 할 것인데, 삶을 지탱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느냐 하는 생산양식에 의해 삶은 물론 사고방식까지도 규정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인간의 의식이란 것이 사회적 관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을 받아 형성되고 유지되는 것이기에 “의식이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세계의 어떤 변화는 인간 개개인이 생각을 고쳐먹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 생산양식, 즉 ‘물질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물신성을 우리들이 어떻게 깨뜨리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만족스러운 이 세계를 변화시키고자 할 때 항상 부딪히는 딜레마 때문이다. 개인의 변화가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인지, 아니면 사회구조의 변화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인지라는 수순의 장벽에 봉착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음은 “사회는 개인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개인이 참여하는 관계의 총합을 표시하는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말로부터 잘못된 의문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개인의 총합이 사회라고 생각한 단순함의 어리석음 탓일 게다. 전통적인 생각, 행동방식, 관습 등이 하나의 패턴을 이루어 구조화되고 그것이 오늘의 나와 우리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구조라는 무수한 관계들의 총합이 세계임을 생각할 때 개인과 구조의 비교의 문제가 아니라 물질적 근거의 토대위에 놓인 물신성이란 사회 조건 의 변화에 관한 문제라는 점이다. 사회조건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발견은 내겐 중대한 수확이라 할 수 있다. 모든 대상의 물질화에 따른 가치의 전도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실천의 진리를.
2. 경쟁에서 호혜의 원리로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철저한 시장 경쟁의 논리를 신봉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 모두가 자신을, 상품을 팔기위해 죽기 살기로 경쟁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상품이야 팔고나면 그 후에는 치열한 경쟁의 지위에서 해방되지만 “인간의 노동력이란 것은 판매된 뒤에도 구매자인 자본가의 통제에 놓인 채 일해야 할뿐 아니라 노동자 서로 간에도 경쟁”에 내몰린다. 경쟁을 통해 우수한 것을 얻어낸다는 논리의 미화를 통해 경쟁 뒤에 감춰진 현실의 어둠이 은폐된다. 즉 ‘경쟁’그 자체도 하나의 물신이 되어 숭배된다.
그러나 경쟁의 중요한 심리적 기반인 질투, 즉 적극적 욕망은 물론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수동적 욕망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배경으로 인간 상호간의 협력을 불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남에게 잘 보이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경쟁의 속성으로 인해 ‘너’의 기대와, ‘사회’의 기대에 따라 행동할 뿐 정작‘나’는 소외된 인간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오늘의 개인들은 더욱 외롭고 아프지만 소통할 대상, 서로의 이해가 같은 소통체계를 찾지 못해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이 물신성에 장악된 자본주의 문제의 본질은 ‘사적소유’이다. 개인이 자기의 물질적 소유를 무한히 늘리려는 욕망에 기인한다. 그렇다면 이의 안티테제(Antithese)로서 모두 공공적 소유로 전환하면 해결 될 것인가? 사실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며 불완전한 실험이었지만 일부 국가에서 1세기도 넘기지 못하고 실패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진테제(Synthese)로서 자본주의 특징인 사적 소유를 유지하되 생산수단은 공공적으로 전환함으로써 삶의 양식을 규정하는 생산양식의 변화를 견인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세계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쟁이란 물신사회의 속성은 누그러지고 증여와 답례로 이루어지는 호혜의 시대를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충돌이 진정으로 해결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가 활성화되는 공동체의 구성은 그래서 더욱 실현해야 할 가치일 것이다.
3. 이 책에 대해서
이 책은『헤겔 법철학 비판』, 『독일 이데올로기』,『경제 철학 수고』등 비교적 감성적인 마르크스 초기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그의 주저인『공산당 선언』,『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자본론』을 망라하여 인간 호혜의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론을 일상의 언어로 알기 쉽게 풀어 쓰고 있다.
결혼 그리고 육체적 관계가 사랑의 물질적 근거가 되는 일례와 같이 물신성의 이해를 도모하고, ‘목숨을 건 도약’이란 명제로부터 자본주의 사회의 끊임없는 혁명의 발생이유를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잉여가치가 정상적 교환형태인 등가교환이 아니라 부등가교환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그것이 바로 자본에 편입된 노동력에 있음을 직시하게도 한다. 그리곤 물신성, 경쟁, 사적소유, 역사 해석의 관점 등을 통해 궁극으로 지향하여야 할 원리로서 인간 상호의 사랑을 발견케 한다.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곳에 놓여있는가, 나는 왜 아픈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해야 하는가를 소음에서 한 걸음 떨어져 생각게 하는 사색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생산의 사회화를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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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12-05-02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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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단 하나뿐인 '진정한 나'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말하면,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여러 얼굴이 모두 '진정한 나'다. …… 분인(dividual)이란 대인 관계마다 드러나는 다양한 자기를 의미한다. (p13) …… 나는 분인의 집합체로 존재한다. 그것들은 모두 타자와의 만남의 산물이며,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다. 타자가 없다면 나의 다양한 분인도 없고, 요컨대 지금의 나라는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p127)
일본의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가 쓴 「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 나오는 구절들입니다. 2015년의 대한민국이, 이 책 속 이 구절들에 대하여 이른바 일컬어지는 '사상적 의문'이란 걸 던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었지요. 하지만!!! --- 제가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이제까지 (명칭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수 밖에 없는) "마르크스주의"를 바라보았던 시선(視線) 속엔 갖가지 사상적 의심, 심지어 종교적 의문까지가 깃들어 있었었음을 이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을 통해 창피한 감정, (이걸 왜 이제야 깨달은걸까?란) 안타까운 감정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까지의 저의 삶이 얼마나 단순했었던가를 반성하게 되었다는 것과 함께 털어놓을 수밖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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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 본질은 각각의 개인들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1"(p33)
마르크스의 (단지 경제학이라는 특정 학문에 한정된다라기보다는) 사상(思想) 역시 이처럼 ---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에서도 읽을 수 있었던, 바로 그 구절로부터 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책으로부터의 많은 인용구들을 각주로 돌려놓았습니다. 부디 그들에게도 관심 가져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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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저자 류동민은 '마르크스가 생각하는 인간의 유적(類的) 본질은 노동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데'(p52)있다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바로 이 점,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 불가능하기에 노동자, 더 나아가 인간이 (필연적으로) 소외를 경험하게될 수 밖에 없다2는 결론이 나온다라는 것이지요.3 대체 왜 자본주의 하에서는 '노동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라 주장되어지는 것일까요?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다.4"(p109)
이 인용구는, "I am what I eat!"류의 rhetoric으로 표현되곤 하는, '나'라는 개인이 속해있는 환경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정의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명제입니다.5 여기서, 물질적 환경이란 조건이 '나'라는 존재를 단지 물질적으로만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신적 본질까지도 규정하게 되어버린다는 점이 바로!!! '소외'를 가져오는 근본적 시작점이 되는 것이지요.6 "
【 물신7(物神),fetish 】
"어떤 사람이 왕인 것은 오직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신하로서 복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대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기들은 신하라고 생각한다.8"(p67)9
'수단과 목적의 전이(轉移)'가 초래하는 폐해(에 대하여는, 울궈먹어도 너무 울궈먹는 거 아니냔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적었었으나 한번 더!) 는 '물신성'에서도 예의 그 진가(?)를 발휘하고 맙니다.
화폐가 화폐인 것은 원래부터 화폐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너도 나도 상품을 그것과 바꾸려 욕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물신이 되어 버린 돈은 이제 사람들을 지배합니다.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를 손에 얻기 위한 수단이었던 돈이 그 자체로써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pp67-68) …… 화폐와 교환되었으므로, 즉 팔렸으므로 그것은 가치를 갖는 것으로 믿게 됩니다. 가치를 갖기 때문에 팔리는 것이 아니라 팔렸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지요.(pp131-132)
저자는 '정조(情操)를 지키기 위해 자결하는 것, 죽은 남편에 대한 성실의무를 다하기 위해 본능을 억압하고 수절하는 것'(p71) 등의 전근대사회를 지배했던 관습들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물신이 되어 거꾸로 인간성을 억압하는 비극적 결과10라 적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단과 목적의 전이'는 비단 과거의 일들만은 아니지요. '제대로 가르치고 배웠다는 증거'로서의 시험성적이란 수단이 거꾸로 목적이 되어, '오직 시험결과만으로 배움의 성취도를 평가'하게 되는 작금의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이 그지같은 현실11은 또 어떻습니까.12
그렇다면 이러한 '소외'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으며, 어떻게 극복되어질 수 있는 걸까요? 이 과정에 대한 오해야말로 --- 이제까지 제가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마르크스 경제학'에 대한 잘못된 시선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결정적 원인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 물질의 변화 】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하느 상황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하에서 만든다.13"(pp102-103)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의 총합으로 개인의 본질이 규정되지만,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개인이 모든 사회적 관계를 개인 마음대로 선택할 수는 없다는 점'(p109)이라는 것, 즉! ---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사회적) 구조가 존재하여, 개개인의 행동반경의 상한과 하한을 제약한다라는, 쉽게 말해 '용이 개천에서 태어날 수는 없다'라는 구조 속 인간의 한계란 것이 명확하게 존재한다라는 겁니다.14 인간은 이, 마치 삼장법사의 손바닥과도 같은 이 한계를 과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 걸까요?
상부구조물은 그 하부에 있는 구조, 즉 토대 없이 혼자서는 서 있을 수 없습니다. 토대가 무너지면 상부구조물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토대가 A에서 B로 바뀌면 그에 대응하는 상부구조물도 A'에서 B'로 바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세상 모든 일이 마음먹기에 달렸다, 즉 일체유심조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러나 '마음먹기'가 어느 특출한 개인이나 철학자의 머릿속에서 스스로 만들어지는 생각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상식조차도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지금 여기'의 물질적인 조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요. 노예는 노예다운 생각을 할 수밖게 없으며 자본가는 자본가다운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독재자에 의해 정치적으로, 또는 종교적 신념에 의해 정신적으로 철저하게 통제된 체제에 어느 순간 균열이 생겨나고 결국에는 무너지는 것도, 그저 사람들이 생각을 고쳐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을 고쳐먹게끔 만드는 물질적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pp112-113)
이처럼 물질적 환경이 인간의 정신적 본질까지도 규정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물질적 변화'는 과연 어떻게 사회의 토대를 바꿀 수 있는 걸까요? 토대가 바뀔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이 갖추어지기 전까지는, '생각을 고쳐먹은 누군가'가 제기하는 이 '문제적 상황에 대한 문제 제기'는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그저 사회로부터의 왕따가 되고 맙니다.15 하지만!!!
"①새로운 더욱 높은 생산관계를 그 물질적 존재조건들이 낡은 사회 자체의 품에서 부화되기 전에는 결코 대신 등장하지 않는다. ②따라서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 자세히 보면 과업 자체가 그 해결을 위한 물질적인 조건들이 이미 주어져 있거나 적어도 생성과정 중에 있는 곳에서만 출현하기 때문이다."(p239) -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 중.
①번과 ②번 문장이야말로, (우리가 잘못 배웠었기에 오해할 수 밖에 없었었던) '역사발전 5단계론'에 대한 마르크스의 본뜻을 담고있다라 생각됩니다. 이에 대한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류동민 교수의 설명은 다음과 같지요. --- "인간은 항상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는 문장의 의미를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제기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해당 사회가 이미 일정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갖춘 수준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문제가 '문제'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해결을 위한 과정이 진행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p241)
즉! 러시아라는 후진농업사회가에서 선도적 정치의식을 지닌 소수의 직업혁명가에 의해 시작되었던 20세기 '사회주의 혁명'과 그 실패를 가리켜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실패'라 규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오해이며, 오히려! --- 마르크스 역사이론의 (정당한) 입증이라 평가받아야 한다라는 것이지요.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라는 것이 있다면, 그 또한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생산력이 충분히 발전하기 전까지는 성립하기 어려우며 우연히 성립하더라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p121)
【 공산주의 】
존재론적으로 현실이 그러하든 그렇지 않든 많은 사람들이 당위론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 것, 나아가 현실도 결국에는 당위를 향해 움직여 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16. 만약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현실은 물론 그렇지 않거니와 앞으로도 당위로부터 점점 더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회는 정상적으로 유지되지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p169)
제가 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공산주의는,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란 역사의 발전과정을 기계론적으로 정의해 놓은 '역사발전 5단계설'이 거의 전부가 아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 가설은 정말 유치합니다. 예의!!! --- 이는 소련이라는 특정 사회에 의해 의도적·자의적으로 변질된 마르크스의 사상이라는 것이 저자 류동민 교수의 주장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 부른다."(p248)
- 마르크스·엥겔스 共著, 「독일 이데올로기」중.
저자 류동민을 이를 가리켜 "현실에서 완전하게 달성될 수는 없으나 현실이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가까워지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이념적 원형"(p249)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 '공산주의'란 이념을 (우리가 흔히 떠올리게 되는, 사유재산을 전면부정하는 그런 류의 가공된 시뻘건 이미지가 아닌) 현실의 변화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이 구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 연장선상을 따라가 보자면 뜻밖에도! '심지어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도 다양한 수준에서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을'(p250)수도 있다라는 것이 저자의 (반박할 수 없는) 주장이지요.
"공산주의는 단지 사적 소유(사유 재산)를 철폐하고 국가계획을 도입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본질이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지는 상태, 인간과 인간의 충돌이 진정으로 해결되는 상태여야 하는 것입니다."(p265)
【 마르크스의 꿈 】
이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를 읽고 나니 결국!!! --- 마르크스를 '인간의 자기 소외, 더 나아가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 전체의 소외라는 불행을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는가하는 가를 말하고 싶었던 인물'로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제시했던 해결책이 바로 '인간의 자기소외가 없는 상태'로 정의되는 공산주의라는 것이었지요.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란 표현이야말로 --- (자본주의 하에서) 아파하고 있는 우리에게 마르크스가 진작에 제시했던 하나의 처방전을 소개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위에 소개한 '소외, 물신, 공산주의'라는 개념들 이외에도 이 책은 '국가17, 종교18'등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상과 대중의 오해를 소개 및 교정해주고 있습니다. 자! 이제 마르크스가 얼마나 인간의 소외 문제에 대하여 천착했었던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문장을 인용하는 것으로, (어찌보면 저 스스로의 공부를 위한 정리일 뿐인) 이 감상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마르크스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에 대한 오해를 교정해주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라는 인물을 사뭇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란 생각을 갖게 해주신, 이 책의 저자 류동민 교수님께 여전히 변함없는 감사의 말씀을 이 감상문에서도 역시 빼놓을 수는 없네요.
"네가 사랑을 알면서도 되돌아오는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사랑으로서의 너의 사랑이 되돌아오는 사랑을 생산하지 못한다면, 네가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너의 생활표현을 통해서 너를 사랑받는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너의 사랑은 무력하며 하나의 불행이다."(p260)
- 「경제학·철학 초고」중
▶ 짧은 한두 마디 : "난 아직 젊기도 하며, 또한 그 시절을 보낸 40대 중후반이기도 합니다!" --- '젊어서 마르크스에 빠지지 않으면 바보지만, 그 시절을 보내고도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으면 더 바보'라 말한 칼 포퍼에게 건네는 나의 한 마디.
※ 반드시! 함께 읽어보길 권하는 책들
- 홍기빈 著,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 류동민 著, 「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
※ 읽어본, 류동민 교수님의 다른 책들 :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 「기억의 몽타주」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중 여섯번째 테제.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추구하던 목표를 이루지 못하였을 때,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관계의 총체 중에서 어느 한 측면을 잃게 됩니다."(pp36-37)
"마르크스와 주류경제학의 차이라면, 시대와 사회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언제가 일하는 것을 싫어하느냐하는 물음에 어떠한 대답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p53) …… 마르크스가 다루는 것은 노동력의 매매 과정입니다. 즉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것은 노동자이고 권력은 그 노동력을 사줄 자본가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본질적인 문제는 '파는 순간'의 얘기가 아니라 '팔고 나서'의 얘기라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른바 자유무역론자들은 다른 상품이나 노동력이나 별로 차이가 없는 똑같은 상품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파는 순간'과 '팔고 나서'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노동력과 다른 일반적인 상품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마르크스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p145)"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 중.
"마르크스의 사상은 인간이 하나의 동물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먹고 마시며 살아가느냐 하는 특정한 생활양식, 그것을 지탱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느냐 하는 생산양식이 우리의 삶, 나아가 우리의 사고방식까지도 규정하게 된다는 것, 이 점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야말로 마르크스의 공헌이라 할 수 있습니다."(p63)
"노동의 개념을 정신적 활동으로까지 확장한다면, 인간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대한 사유조차도 자신의 독립된 사유로 만들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독립적인 하나의 존재가 되는 셈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정해 놓은 사유의 방식에다 자신의 사유를 끼워 맞추는 사람은 독립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스스로의 힘으로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그는 하나의 독자적인 인격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p64)
"사람은 나면서부터 유한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갖지 못한 모든 미덕을 완전하게 갖춘 존재를 갈망하며 상상했습니다.…… 신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믿음만으로는 충분한 위안이 되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돌이나 나무를 쪼아 신의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물건으로 만들어진 신, 즉 물신=페티시fetish입니다."(pp65-66)
「자본론」 1권 중.
"권력을 갖는 자는 실상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권력을 인정해 주기 때문에 비로소 권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력의 인정이 일상화하면, 권력을 가진 자는 자신의 권력이 스스로의 내적 특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 반대로 권력에 지배당하는 이들은 스스로가 그 권력을 부여한 원천임을 깨닫지 못하고 일상적으로는 권력을 두려워하고 그에 기꺼이 복종합니다."(p69) --- 얼마 전 읽었던 에티엔 드 라 보에시 著, 「자발적 복종」의 명쾌한 요약!
"화폐는 원래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기(represent)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상품은 그것과 교환됨으로써만 가치가 있음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폐로 교환되지 않는 모든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 마찬가지로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결혼이나 성교가 이제는 그것으로 표현되지 않는 모든 사랑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릅니다."(pp178-179)
"마르크스는 경쟁이 원인과 결과가 뒤바뀐 의식을 낳으며 결국 현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 경쟁은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필요한 것인데, 거꾸로 경쟁을 거쳤으므로 성과 역시 틀림없이 좋을 것이라는 식의 뒤집어진 의식이 생겨나곤 하는 것이지요. 또는 성과가 좋지 않은 것은 경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현상 때문에 정작 내재되어 있는 현실의 문제를 왜곡하거나 은폐하기까지 합니다."(pp159-160)
"흔히 말하는 '역사는 민중의 힘으로 발전한다'는 명제는 피지배자들의 저항이 임계점에 이르러 권력의 물신성을 깨뜨리는 순간에 성립하는 것입니다. 독재자들의 동상이 거리에 내팽개쳐지는 장면들은 바로 권력의 본질이 물신성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 (또한) 정조나 순결과 같은 개념 대신에 성적 자기결정권을 강조하는 것은 물신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첫걸음이 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pp70-71)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중.
"마당쇠나 언년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의식을 결코 가질 수 없을 것입니다. 노예는 스스로 노예됨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에만 고통스러운 삶을 그럭저럭 견딜 수 있기 때문이지요.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즉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순간, 노예는 개인적인 삶을 견디기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배제당하게 될 것입니다."(p112)
저자 류동민은 1990년대 초반, 성의 자유라는 문제를 제기했던 마광수 교수를 일례로 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성의 자유라는 문제가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회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그가 제기했었다"라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어떠한 특정) 명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존재론적 측면과, 비록 현실은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규범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당위론적 측면입니다. 앞의 것은 흔히 'sein의 문제'라고 부릅니다. 현실이 '그러하다'라는 뜻입니다. 뒤의 것은 역시 독일어로 'sollen의 문제'라고 부르는데 …… '마땅히 그러해야만 한다'는 뜻이지요.(pp168-169)
"국가가 무색무취한 중립적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환상입니다. 마치 국가대표 축구팀이 외국 대표팀과 일대일로 맞붙는 A매치 경기를 볼 때처럼, 국가가 동질적인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그것은 국가가 특정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관측일 따름입니다. 국가기구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국가라는 이름으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는 끊임없는 견제와 토론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에만 국가가 공공의 명분으로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pp208-209)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폐기는 바로 인민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청이다. 인민의 상황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라는 요청은, 이 환상을 필요로 하느 상황을 포기하라는 요청이다. 그러므로 종교에 대한 비판은 그 기원에서 본다면, 종교를 자신의 후광으로 삼고있는 간난의 삶에 대한 비판이다."(p206)- <헤겔 법철학 비판>의 서문 중 : 권력의 소유자가 신격화되고 정확하게는 물신이 되면, 그 앞에 엎드리는 이들은 현실의 불확실성과 미래의 불투명성 때문에 생겨나는 고통을 권력의 소유자에게 맡겨 버림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권력에 대한 복종이 그저 환상이라고 깨우쳐 주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이해하고 그에 기초하여 극복을 도모할 때 비로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그러므로 종교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모든 물신과 환상에 대한 비판입니다. 동시에 그것들을 낳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먼저 이루어져야 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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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살가죽 2016-03-06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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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내게 뻘쭘하냐고 물었다.
무수한 미래의 꿈나무 중 하나였던 나는, 드디어 청춘의 장(場)에 들어가게 되었다. 푸를 청(靑)! 그리고 봄 춘(春)! 청춘(靑春)이라는 말에는 이처럼 뭔가 샤방샤방하고 상큼할 것 같은 이미지가 담겨있다. 그리하여, 나는 기꺼이 청춘의 장으로 들어서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과연, 샤방샤방과 상큼함을 넘어, 블링블링한 모습이 풍경으로 펼쳐졌으니! 이 시대의 청춘들은 각자 저마다의 칵테일을 한 잔 식 손에 들고는, 끝내주는 ‘스펙’ 상품의 옷을 걸치고 있었더랬다. 오, 역시 청춘은 ‘파티’란 말인가?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블링블링한 모습의 청춘들은 열심히, 죽도록, 자신이 ‘가장 끝내주는 청춘’임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건, 간택되기를 기다리는 무엇 같았다. 또한 그건, 팔리기를 기원하는 무엇 같았다. 어쩌면 그건, 떨이가 되는 걸 두려워하는 무엇 같기도 했다. 결국 여긴, 파티장이 아니라, 경연장(競演場)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쨌든 그들은 긍정적이고, 도전적이며, 가끔 아파하기도 하는(그러나 언젠간 다 나을 것이 분명했다!) 이 시대의 모범 청춘임에 분명했다. 왜냐면,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낼 정도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청춘이 아닌 이들’은, 항상 자신들이 청춘을 그렇게 (긍정적이고, 도전적이며, 아파하면서!) 보냈다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블링블링함에 정신이 아득해지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 내 꼴을 보니, 놀라 자빠질 뻔 했다. 내 손은 칵테일이 아니라 냉수 한 잔을 들고 있었고, 입고 있는 옷은 ‘스펙’제가 아닌 후줄그레뎅뎅했다. 과연, 나는 블링블링은커녕, 어둠컴컴하지도 못한, 무색무취의 유령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그 오묘한 파티장, 아니 경연장에서는 ‘너 같은 것은 청춘도 아니야!’라는 무언의 후려침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나는, 예선 탈락이었다. 뭔가, 죄송해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고작 그것밖에 못해서 예선탈락이냐!’ 라는 질책의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예선 탈락한 청춘이라 죄송합니다, 라고 어딘가에 사죄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블링블링 청춘들은 자신들의 블링블링함을 쉬크함을, 간지를, 똘똘함을, 하여간 뭐든지 간에 비싸게 평가받아야 한다고 힘껏 뽐내고 있었다. 나는 멍청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털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찾아와서 냅다 말을 건넸다.
“자네 뻘쭘한가?”
이상한 코스프레를 한 듯한(마르크스 코스프레라 했다. 근데, 마르크스가 누구야?) 아저씨는 내게 주절주절 말을 꺼냈다. 아저씨는 내 상태가 ‘소외’라고 말했다. (요즘에는 그걸 ‘루저’라고 부르죠.) 그리고 저 블링블링한 청춘들도 실은, ‘소외’된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루저가 아닌데요?) 아무리 ‘혼자서’ 블링블링 한다고 한들, 소외되는 것은 똑같다고 했다. 내가 냉수 한잔이 아니라 칵테일을 들고, 후줄그레댕댕 옷이 아니라 삐까뿌르리리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무색무취의 유령이 되거나, 블링블링한 상품이 되는 것 말고, 청춘의 장(場)에서 재밌게 사는 법을 쑥덕쑥덕 일러주었다. 그건, 이곳을 경연장(競演場)에서 파티장으로 바꿔버리는 마법 같은 이야기였다.
괴상쩍은 코스프레 아저씨의 말을 그대로 믿기엔, 수상쩍은 느낌이 들었지만, 뻘쭘하게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과연, 저기 또 한 명의 냉수 한 잔을 들고 있는 이가 보였다. 나는 다가가서 말을 건네기로 했다. 파티는, 말을 건네는 것부터 시작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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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레인 2012-05-25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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