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앤장·포스코와 싸워 이긴 30년 하청노동자의 눈물
[대우조선 파업 이후 ③-1]
그들이 노조 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에 선했다. 하청 노조 조직하기가 정규직보다 훨씬 어렵다. 하청 노동자들은 고용이 불안하다. 그러니 '평생 직장' 개념이 적을 수밖에 없다. '에잇, 더러우니 딴 데 가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굳이 앞에 총대 메고 싸울 필요가 있냐는 거다.
저는 우리 하청 노동자들도 이 생각은 좀 바꿨으면 좋겠다. 내가 일하는 곳 내가 안 고치면 누가 고치겠나. 포기하고 다른 데 옮겨간다고 해도 다를까. 똑같다. 대우조선이고 포스코고 대한민국 하청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이야 다 유사하다. 제철소나 조선소나 위험하고 힘들고 덥고 추운 일은 하청 노동자들이 한다.
요즘도 젊은 친구들이 대놓고 이런 얘길 한다. '다음에 어디 시험보고 좋은 데 공고 나면 거기로 가면 되지, 굳이 나서서 회사에 찍히기 싫다.' 저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아니다. 너가 포기하면 다른 사람들도 포기하고, 이 비참한 하청은 영원히 존재할 거다.' 자신이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노동자들이 언제든 떠날 마음을 품고 일하는 건 회사 입장에서도 전혀 좋지 않다고 본다. 신참 데려다 한참 가르쳐놨더니 더럽다고 다른 곳 가버리면 회사로서도 얼마나 낭비인가. 회사가 노동자를 귀하게 여기고 올바르게 대접하면 노동자는 떠나지 않는다. 하청 노동자도 애사심을 가지도록 유도해야 회사도 중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 근본적으로 대기업들이 원·하청을 나누는 이유가 뭘까.
"가장 큰 목적이 노동 통제라고 본다. 하청을 차별함으로써 막대한 노무비를 줄이고, 동시에 정규직들의 불만을 무마한다.
지금 대한민국 정규직들은 다 만족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들 옆에 하청이 없다면? 만족하지 못할 거다. 나는 그걸 100% 확신한다. 포스코 정규직만 봐도 그렇다. 자기들은 여름에 더우면 나갈 일 없고, 겨울에 추우면 나갈 일 없다. 그런데도 하청 노동자 임금의 배를 넘게 받고 하청엔 없는 복지·휴가 혜택까지 누린다.
그렇게 정규직들은 하청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나는 저들과 다르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 당연한 '정규직'이 마치 벼슬처럼 됐다. 그 울타리 속에 들어간 이들은 '노동자'라는 개념을 상실해간다. '저 밑에 하청 놈들도 사는데, 너는 훨씬 낫잖아? 지역 사회에서도 다르게 대우받잖아?' 하는 회사의 전략이 통한 거다."
▲ 양동운(62) 전 지회장은 30년간 포스코사내하청 노조를 지켰다. 포스코를 상대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내 11년만에 최종 승소 판결도 이끌었다. 하지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걸 보면 "우리가 30년간 뭘 한 건가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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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대우조선 파업 과정에서도 원·하청간 노노 갈등이 불거졌다.
"요즘 제가 조합원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30년 노조 했는데, 이룬 게 하나도 없는 세상인 것 같다'고. 발버둥은 쳤는데, 뒤돌아보니 개선한 것보다 오히려 나빠진 게 더 많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노조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누구나 취업해서 엇비슷하게는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계약직, 비정규직 이런 말 없었다.
근데 지금은 어떤가. 하청, 기간제, 인턴까지 너무 당연해졌다. 예전엔 수습 3개월이면 정규직 됐다. 요즘은 그런 기업 찾아보기 힘들다. 계약직으로 쓰다가, 기간 연장까지 하고 실컷 쓰다가, 마지막에 가서 또 정규직 전환 여부를 회사가 판단한다. 진짜 후퇴도 이런 후퇴가 없다.
결과가 이렇다면 우리 노동조합들도 그동안 사회를 올바로 보지 못한 것 아닌가 살펴볼 때가 아닐까. 그동안 민주노총은 복수노조 인정도 받았고, 조합원도 100만 명을 넘겼다. 한국노총도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노조가 이렇게 커졌는데, 대한민국 노조는 그동안 경총이나 사용자들의 전략에 뒷북만 울려온 것 아닌가 싶다. 사용자의 원·하청 분리 정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 아닌가 싶은 거다.
노조가 사회 전반을 돌아보지 못하고, 내 임금 올리겠다는 데만 함몰됐던 건 아닐까. 지금 있는 조합원만 챙기느라 후배들의 근로 조건을 제한하는 데에 너무 쉽게 동의했던 게 아닐까. 원청, 하청 노동자들도 어느새 그런 대기업들의 함정에 빠져 같이 빨려 들어갔던 건 아닐까. 평생 노조 열심히는 했는데, 정말 잘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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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상대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최종 승소한 양동운 전 지회장
22.08.23
김성욱(etsh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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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코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전 지회장. 지난 7월 28일 포스코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11년만에 최종 승소했지만, 정년이 지나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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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소송 문의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설명하고 노조 가입 원서 받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지난 16일 전남 광양시 광양읍 칠성리에 있는 포스코 사내하청 노조 사무실. 양동운(62)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전 지회장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도 웃었다. 50평 남짓한 사무실은 노조 가입과 소송 참여를 문의하러 온 하청 노동자들로 북적였다. 선풍기 한 대 없는 방엔 A4용지로 된 소송 자료 더미가 벽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지난 7월 28일, 양씨를 비롯한 하청 노동자 59명은 포스코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무려 11년 만에 최종 승소했다. 대법원이 포스코 사내하청은 '불법 파견'이라며 포스코가 이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판결에 따르면 포스코는 그간 하청 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지휘 명령하며 사용해왔으면서 직고용이 아닌 도급 계약만 맺어 파견법을 위반했다. 자동차가 아닌 제철업계에서 불법 파견이 인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판결 이후 포스코 하청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과 소송 참여 신청이 쏟아지고 있다. 사측의 탄압으로 한때 40명까지 졸아들었던 노조 조합원은 800명으로 늘었다. 포스코에는 광양·포항 제철소를 포함해 총 1만 8400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있다. 원청 정규직(1만 7000여 명)보다 많다. 아직 정확한 규모가 알려지지 않은 2·3차 하청 노동자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난다.
양씨는 스물 여덟이던 1987년 포스코 광양제철소 사내하청 업체에 입사했다. 공장 11미터 높이에 달린 천정크레인 기사로 일했다. 3조 3교대로, 한 달에 쉬는 날은 이틀뿐이었다. 명절도 없었다. 그렇게 일해도 하루 일당 6000원, 월급 20만 원대였다.
반면 당시 정규직은 4조 3교대, 한 달에 8일을 쉬고도 같은 연차 급여가 30만 원 대였다. 원·하청 노동자는 출퇴근복, 작업복, 안전모 색깔까지 모두 달랐다. 격차는 세월이 갈수록 벌어졌다. 노조에 따르면 현재 20년차 포스코 하청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연 5500만 원 정도로, 같은 연차 정규직 연봉(1억 3000만 원대)의 절반도 안 된다.
양씨는 1989년 스무명 동료들과 함께 포스코 사내하청 노조를 처음 세웠다. 포스코는 50년간 무노조 경영을 표방해왔다. 하청도 그에 발맞췄다. 사측은 버젓이 노조와해 문건을 만들다 발각됐고, 조합원이 지역 조폭에 의해 폭행을 당한 사건까지 있었다.
33년 동안 하청 노조를 지켜낸 양씨는 총 세 번(1998년, 2001년, 2015년) 해고됐다. 상황이 어려워 아무도 앞장서지 않을 때 거절하지 못하고 총 네 번(1990~1992년, 2001~2002년, 2011~2012년, 2014~2015년) 지회장을 맡았다. 2011년 5월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했던 것 역시 양씨를 포함한 15명이 처음이었다.
소송이 끝난 지금 양씨 머리는 하얗게 셌다. 어릴 때부터 아빠가 온갖 부당한 처사를 겪는 걸 봐온 양씨의 둘째 딸은 어느덧 다 커서 노무사가 됐다. 양씨는 이제 지회장직을 내려놓고 노조 법률국장으로 소송 지원을 도맡고 있다.
11년 소송 끝 승리했는데... 정년 넘겨 정규직 전환 안 된 그들
▲ 노조 불모지였던 포스코에서 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전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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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양씨는 이번 승소 판결을 적용 받지 못한다. 소송이 11년이나 지연되는 사이 정년을 넘겨버린 것이다. 양씨는 2021년 12월 31일부로 정년을 맞았다. 대법원은 양씨 등 4명에 대해 정년이 지나 소의 이익이 없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도 양씨는 연신 웃었다. "같이 노조 하느라 해고됐던 동지들이 길게는 15년이나 밖에서 노가다 판을 전전하고 다녔는데, 이번에 포스코 정규직 인사 명령 받고 사내 교육 받으러 복귀하는 걸 보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라"고 손뼉을 쳤다. 양씨 등 4명을 제외한 55명은 대법원 판결 당일 오후 포스코로부터 정규직 인사 발령을 받고 16일부터 포항 연수원에 입소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승소한 얘기를 하며 웃는 양씨에게 대법원 판결 때 가장 생각난 얼굴이 누구냐 물었다. "양우권 열사". 양씨는 고개를 떨구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포스코사내하청지회 이지테크분회장이었던 고 양우권씨는 지난 2015년 5월 '단결 투쟁'이 적힌 빨간 노조 머리띠를 목에 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 양우권씨가 일했던 하청업체 이지테크에는 50여 명 조합원이 있었지만, 사측의 해고와 징계, 따돌림, 회유로 결국 모두 나가고 고인 혼자 남은 상황이었다. 노조 한다고 해고됐던 고인 역시 힘겹게 복직됐지만, 빈 책상에 앉아 CCTV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받아야 했다.
고인은 결국 포스코 광양제철소가 내다보이는 인근 야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인은 하청 노조 조합원들을 향해 쓴 유서에서 "양동운 지회장을 위시하여 똘똘 뭉쳐 끝까지 싸워서 정규직화 소송, 해고자 문제 꼭 승리하십시오. 멀리서 하늘에서 연대하겠습니다"라는 유지를 남겼다.
양씨는 "이번 판결로 우권이의 유언을 이룬 것 같아 그 무엇보다 기쁘다"며 울었다. 양씨를 지난 16일 광양 노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포스코, 하청 노동자 없인 제품 단 하나도 생산 못한다"
▲ 16일 전남 광양 포스코사내하청 노조 사무실. 현재는 법률국장을 맡고 있는 양동운(오른쪽)전 지회장이 쇄도하는 소송 참여, 노조 가입 문의에 분주했다. 양 전 지회장은 지난 7월 28일 포스코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11년만에 최종 승소했지만, 정년이 지나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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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28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소감은.
"진짜 너무 행복했다. 11년이나 걸렸지만, 저희들이 옳았다는 걸 인정받은 것 같아서. 제철소 다니는 수많은 하청 노동자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 같아서.
사실 소송 준비하는 동안 정말 힘들었다. 저는 컴맹이었고 지금도 독수리 타법이다. 회사에서 노조 전임자를 인정해주지 않아 3교대 출근하면서 밤잠 줄여가며 노동조합 일을 봤다. 2근(오후 3시 ~ 밤 11시) 출근 하는 날이면 오전에 먼저 사무실 와서 소송 준비하고, 1근(오전 7시 ~ 오후 3시) 출근하는 날이면 그날 밤 순천 가는 10시 30분 막차 시간 전까지 노조 사무실에 남아 소송 준비를 했다. 그러고도 부족해 집에 가서 문서 작성을 했다. 컴퓨터가 한 대뿐이라 딸들과 많이도 싸웠다(웃음). 제 신념이 '엉덩이가 일을 한다'이다.
그렇게 컴퓨터도 못하는 하청 노동자들 힘으로 포스코 같은 거대 기업과 그를 대리하는 김앤장을 눌렀다. 돈은 없지만 남한테 고개 숙이지 않았고, 내 나름 열심히 살아온 삶이 인정 받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날 법정서 나올 때 재판관님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차별 받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셔서 정말 고맙다고."
- 하지만 정작 본인은 정년이 넘어 직접 고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4명이 정년을 지나 결국 포스코 옷을 입어보지 못하게 됐다. 나, 채규향 동지, 김명국 동지, 윤영록 동지다. 김 동지는 2019년이 정년이었고, 나머지는 동갑이라 작년이 정년이었다. 모두 오랫동안 싸웠는데 아쉽다.
이미 2010년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이 불법 파견이라는 최병승 동지 대법 판결이 있었기 때문에, 2011년 소송 시작할 때 6~7년 정도면 되겠지 하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포스코와 김앤장은 어떻게든 재판을 질질 끌려고 했다. 2심에서 여덟 번이나 선고가 밀렸고 대법원에서도 두 번 선고가 밀렸다. 우리를 고사시키겠다는 작전이었다. 당초 대법원 선고일도 작년 12월 30일이었다. 정년 맞기 하루 전날이었는데… 결국 해를 넘겨서 이렇게 됐다."
- 2011년 5월 처음 소송을 제기했던 이유는.
"하청 노동자 없이 포스코는 단 하나의 제품도 생산 못한다. 원료 하역부터 제품 출하까지 그 어떤 공정에서도 하청 노동자가 중단하면 생산이 중단된다. 예를 들어 만약 라인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희 같은 천정크레인 하청 노동자들이 들어가지 않으면 복구가 안 된다. 제철소에 있는 것들은 다 3톤 이상, 수십 톤에 이르는 중량물이다. 외부의 지게차나 큰 차들이 들어올 공간 자체가 없다. 천정크레인으로 들어내고, 다시 얹혀주는 과정이 필수다. 정규직들과 같이 일하고 그들의 지시를 받는 게 자연스럽다. 그렇게 30년 일했다.
제가 입사했을 땐 아침 조회도 같이 했다. 포스코 주임이 원하청 노동자를 한데 모아놓고 체조도 같이 시키고 훈시도 했다. 대기실도 함께 있어서 주임이 하청 노동자들에게 수시로 지시했다. 이게 법 위반이라는 걸 알고 우리가 2004년에 고용노동부 여수지청에 불법 파견 진정을 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불법 파견 판결이 없었던 시절이다. 회사에서도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그때부터 사무실과 대기실 사이에 칸막이를 쳤다. 직접 지시하는 대신 현장 반장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작업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2010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불법 파견 판결이 나왔다. 최병승 동지에게 곧바로 연락했다. 소송자료 좀 보게 해달라고. 최 동지가 허락해줘서 3000페이지 넘는 서류를 받았다. 그걸 밤새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우리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히려 확보한 증거는 우리가 더 충실해 보였다. 현대차처럼 제조 라인에 하청 노동자와 정규직이 옆에 붙어있진 않았지만, 우린 공장 상부에서 천정크레인 운전을 하고 정규직들은 그 아래에 있었다."
- 이번 판결로 직접 고용 대상이 된 55명의 현 상황은.
"7월 28일 판결 당일 오후에 바로 포스코로부터 인사 명령을 받았다. 오늘(16일)부터 포스코 포항 연수원에 3개월 교육 일정으로 입소했다. 55명 중에 특히 해고 상태였던 동지가 8명이다. 2007년에 3명, 2010년에 3명, 2015년에 2명이 노조 활동을 하다 해고됐다. 모두 그간 포스코에서 일 못하고 밖에 나가 건설 현장 노가다를 전전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소송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이 끝내 복직하는 것을 보니, 그것도 정규직으로 고용되는 걸 보니 정말 뛸 듯이 기쁘다. 행복하다."
- 이번에 승소한 노동자들이 주로 하던 업무는 무엇이었나.
"다 비슷하다. 천정크레인으로 작으면 3톤, 크면 35톤까지 가는 코일(정해진 두께에 따라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려진 상태의 철강 원재료)을 다음 공정으로 운반한다든지, 압연(회전하는 기계 사이에 쇠붙이를 넣어 다양한 종류의 철강 제품을 만드는 공정) 작업 중 발생한 불량 코일을 처리하기도 하고, 슬래브(쇳물을 가공해서 나온 널빤지 모양의 반제품)를 투입하고, 도금에 필요한 아연을 보급하는 등 필수적인 업무들을 했다.
모든 작업은 원청의 지시에 따라 진행된다. 모니터를 통한 실시간 작업 지시, 무전 지시, 수신호 지시, 그리고 MES(전자 생산관리시스템)까지 동원됐다. 대법원에서 MES가 원청 지시로 인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제철소뿐만 아니라 MES가 보편화돼 있는 제조업 전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사내하청 노동자만 1만 8400명... 정부, 사용자측 불법엔 왜 눈감나"
▲ 전남 광양 포스코사내하청 노조 사무실에 소송 자료가 쌓여있다. 지난7월 28일, 포스코사내하청 노조 조합원 59명은 포스코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무려 11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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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포스코 사내하청 노동자 숫자는 얼마나 되나.
"1차 사내하청이 98개 업체, 총 1만 8417명이다. 이 역시 소송을 통해 알게 된 숫자다. 포스코는 하청 업체 현황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2차, 3차 하청 업체들에 대한 정보는 노조도 갖고 있지 못하다. 조합원이 있는 2차 하청 업체가 아직 한군데밖에 없어서 그렇다. 2·3차 하청까지 합하면 포스코 하청 노동자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정규직은 1만 7000여명 정도다.
하청 노동자들, 지금 같은 여름이면 소금 먹어가며 일하는 사람들이다. 안 먹으면 쓰러지니까. 열연공장에서 조금만 일해도 등에 하얗게 소금꽃이 핀다. 1200℃ 넘는 빨간 쇠판이 계속 지나다니는데 얼마나 뜨겁겠나. 거기에 물을 쏴서 냉각하면서 압연을 하는데, 그러면 수증기가 생긴다. 습도가 높으니 온도는 더 오른다. 찜질방보다 뜨겁다.
그렇게 일해서 받는 돈은 정규직의 40% 선이다. 우리가 소송을 진행하면서 처음으로 정규직들의 연봉 수준을 정확히 알게 됐다. 정말 깜짝 놀랐다. 하청 조합원들에게 보여주면 다들 못 믿어 했다. 저는 입사 30년이 되도록 연봉 5000만 원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년차 정규직들 연봉이 1억 3000만 원대였다. 성과급이 800%였다. 현금성 복지 포인트 100만 원도 있었다. 하청 노동자들은 성과급도, 복지 포인트도 없었다."
- 이번 판결 이후 어떤 변화가 있나.
"이번 판결은 포스코가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법 위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현재 포스코는 오로지 판결문에 있는 55명에 대해서만 정규직 명령을 냈다. 그 55명이 속한 2개 하청 업체에 총 4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조차 정규직 인사명령을 내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인가. 소송하지 않으면 정규직은 없다는 뜻이다. 포스코의 이런 태도를 본 하청 노동자들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회사에 속았다는 거다. 노조 가입 문의도,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참여 신청도 크게 늘고 있다."
- 얼마나 늘었나.
"조합원은 1000명 정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소송 참여 인원도 비슷하게 늘 것 같다. 지금이 8차 소송단 모집인데, 앞서 1~7차 소송단 인원이 총 808명이다. 8차까지 1800여 명이라면 포스코 1차 사내하청 전체 노동자의 10% 정도가 소송에 참여하게 된다. 이번에 판결이 난 노동자들은 1차(15명)·2차(44명) 소송단이었다."
-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지만, 개별 소송을 진행하지 않으면 다른 하청 노동자들은 직접 고용될 수 없다는 얘기다.
"집단소송제(소송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도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가 없어서다. 이게 말이 되나. 분명히 포스코가 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판명 났는데, 노동자들은 개별 소송을 해야 정규직으로 채용될 수 있다는 게. 상식이 아니지 않나. 그럼 또 우리처럼 소송해서 11년 버티라는 건가. 그렇게 또 정년 지나고? 왜 정부와 검찰, 국가는 노동자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선 엄단하면서, 사용자들의 불법에 대해선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나.
포스코는 이 틈을 타 무슨 수를 써서든 하청 노동자들이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으로 가는 걸 막으려 한다. 급하게 하청 노동자 처우를 신경 쓰겠다고 회유하려 드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포스코가 최하 1500억원은 풀 거라고 본다. 하청 노동자들 임금 인상 해주고, 복지 포인트 100만 원에, 일시금으로 200만 원 부여한다는 얘기가 벌써 공공연히 나온다.
왜 그럴까? 그게 더 싸니까. 이번 소송에서 포스코가 낸 자료를 보면, 1만8417명 하청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면 1년에 9640억 원이 들어간다고 논문까지 제출했더라. 매년 1조 원이라는 거다. 포스코가 지금껏 그만큼의 불법적인 이익을 취했다는 뜻이다. 그게 하청 노동자들이 빼앗겨온 가치다.
2016년 8월 2심에서 승소했을 때도 회사는 똑같은 태도였다. 2013년 1월 1심에서 패소했을 땐 콧방귀도 안 뀌더니, 우리가 이기자마자 갑자기 하청 노동자들에게 두 자리 숫자 퍼센트 임금 인상안을 제시했다. 몇몇 하청 업체에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준비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자, 회사가 먼저 회유에 나선 것이다. 결국 그 과정에서 소송을 접은 하청 노동자들도 많았다.
그래도 소송 참여 움직임이 이어지자 포스코는 하청사 상생협의회라는 걸 만들어 정규직에만 주어지던 자녀 학자금 지급까지 약속했다. 그러면서 소송을 진행하는 하청 노동자들에 대해선 학자금 지급을 제외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소송을 중간에 포기한 하청 노동자들도 꽤있었다. 당장 학자금들이 급하니까. 회사가 이렇게 치사하다. 노조는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시정 신청을 해놓은 상태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요즘도 포스코는 지금 논의하고 있는 하청 노동자 복지 포인트 100만원 신설에 대해서도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 지급하지 않겠다고 여론전을 펴고 있더라. 하청 노동자들의 처우가 좋아진 건 늘 하청 노조 덕이었는데, 정작 하청 노조 조합원들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한다. 유감은 없다. 그러려고 노조 한 거니까."
[인터뷰②] "벼슬이 된 정규직... 노동운동, 원하청 분리 정책에 제대로 대응 못했다"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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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이 된 정규직... 노동운동, 원하청 분리 정책에 제대로 대응 못했다"
22.08.23
김성욱(etsh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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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코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 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전 지회장. 지난 7월 28일 포스코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11년만에 최종 승소했지만, 정년이 지나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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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소송 문의가 얼마나 많이 오는지, 설명하고 노조 가입 원서 받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지난 16일 전남 광양시 광양읍 칠성리에 있는 포스코 사내하청 노조 사무실. 양동운(62)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전 지회장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도 웃었다. 50평 남짓한 사무실은 노조 가입과 소송 참여를 문의하러 온 하청 노동자들로 북적였다. 선풍기 한 대 없는 방엔 A4용지로 된 소송 자료 더미가 벽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지난 7월 28일, 양씨를 비롯한 하청 노동자 59명은 포스코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무려 11년 만에 최종 승소했다. 대법원이 포스코 사내하청은 '불법 파견'이라며 포스코가 이들을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판결에 따르면 포스코는 그간 하청 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지휘 명령하며 사용해왔으면서 직고용이 아닌 도급 계약만 맺어 파견법을 위반했다. 자동차가 아닌 제철업계에서 불법 파견이 인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판결 이후 포스코 하청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과 소송 참여 신청이 쏟아지고 있다. 사측의 탄압으로 한때 40명까지 졸아들었던 노조 조합원은 800명으로 늘었다. 포스코에는 광양·포항 제철소를 포함해 총 1만 8400여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있다. 원청 정규직(1만 7000여 명)보다 많다. 아직 정확한 규모가 알려지지 않은 2·3차 하청 노동자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난다.
양씨는 스물 여덟이던 1987년 포스코 광양제철소 사내하청 업체에 입사했다. 공장 11미터 높이에 달린 천정크레인 기사로 일했다. 3조 3교대로, 한 달에 쉬는 날은 이틀뿐이었다. 명절도 없었다. 그렇게 일해도 하루 일당 6000원, 월급 20만 원대였다.
반면 당시 정규직은 4조 3교대, 한 달에 8일을 쉬고도 같은 연차 급여가 30만 원 대였다. 원·하청 노동자는 출퇴근복, 작업복, 안전모 색깔까지 모두 달랐다. 격차는 세월이 갈수록 벌어졌다. 노조에 따르면 현재 20년차 포스코 하청 노동자의 평균 임금은 연 5500만 원 정도로, 같은 연차 정규직 연봉(1억 3000만 원대)의 절반도 안 된다.
양씨는 1989년 스무명 동료들과 함께 포스코 사내하청 노조를 처음 세웠다. 포스코는 50년간 무노조 경영을 표방해왔다. 하청도 그에 발맞췄다. 사측은 버젓이 노조와해 문건을 만들다 발각됐고, 조합원이 지역 조폭에 의해 폭행을 당한 사건까지 있었다.
33년 동안 하청 노조를 지켜낸 양씨는 총 세 번(1998년, 2001년, 2015년) 해고됐다. 상황이 어려워 아무도 앞장서지 않을 때 거절하지 못하고 총 네 번(1990~1992년, 2001~2002년, 2011~2012년, 2014~2015년) 지회장을 맡았다. 2011년 5월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제기했던 것 역시 양씨를 포함한 15명이 처음이었다.
소송이 끝난 지금 양씨 머리는 하얗게 셌다. 어릴 때부터 아빠가 온갖 부당한 처사를 겪는 걸 봐온 양씨의 둘째 딸은 어느덧 다 커서 노무사가 됐다. 양씨는 이제 지회장직을 내려놓고 노조 법률국장으로 소송 지원을 도맡고 있다.
11년 소송 끝 승리했는데... 정년 넘겨 정규직 전환 안 된 그들
▲ 노조 불모지였던 포스코에서 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전 지회장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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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작 양씨는 이번 승소 판결을 적용 받지 못한다. 소송이 11년이나 지연되는 사이 정년을 넘겨버린 것이다. 양씨는 2021년 12월 31일부로 정년을 맞았다. 대법원은 양씨 등 4명에 대해 정년이 지나 소의 이익이 없다며 각하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도 양씨는 연신 웃었다. "같이 노조 하느라 해고됐던 동지들이 길게는 15년이나 밖에서 노가다 판을 전전하고 다녔는데, 이번에 포스코 정규직 인사 명령 받고 사내 교육 받으러 복귀하는 걸 보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더라"고 손뼉을 쳤다. 양씨 등 4명을 제외한 55명은 대법원 판결 당일 오후 포스코로부터 정규직 인사 발령을 받고 16일부터 포항 연수원에 입소해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승소한 얘기를 하며 웃는 양씨에게 대법원 판결 때 가장 생각난 얼굴이 누구냐 물었다. "양우권 열사". 양씨는 고개를 떨구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포스코사내하청지회 이지테크분회장이었던 고 양우권씨는 지난 2015년 5월 '단결 투쟁'이 적힌 빨간 노조 머리띠를 목에 매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 양우권씨가 일했던 하청업체 이지테크에는 50여 명 조합원이 있었지만, 사측의 해고와 징계, 따돌림, 회유로 결국 모두 나가고 고인 혼자 남은 상황이었다. 노조 한다고 해고됐던 고인 역시 힘겹게 복직됐지만, 빈 책상에 앉아 CCTV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받아야 했다.
고인은 결국 포스코 광양제철소가 내다보이는 인근 야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인은 하청 노조 조합원들을 향해 쓴 유서에서 "양동운 지회장을 위시하여 똘똘 뭉쳐 끝까지 싸워서 정규직화 소송, 해고자 문제 꼭 승리하십시오. 멀리서 하늘에서 연대하겠습니다"라는 유지를 남겼다.
양씨는 "이번 판결로 우권이의 유언을 이룬 것 같아 그 무엇보다 기쁘다"며 울었다. 양씨를 지난 16일 광양 노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포스코, 하청 노동자 없인 제품 단 하나도 생산 못한다"
▲ 16일 전남 광양 포스코사내하청 노조 사무실. 현재는 법률국장을 맡고 있는 양동운(오른쪽)전 지회장이 쇄도하는 소송 참여, 노조 가입 문의에 분주했다. 양 전 지회장은 지난 7월 28일 포스코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11년만에 최종 승소했지만, 정년이 지나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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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28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소감은.
"진짜 너무 행복했다. 11년이나 걸렸지만, 저희들이 옳았다는 걸 인정받은 것 같아서. 제철소 다니는 수많은 하청 노동자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 같아서.
사실 소송 준비하는 동안 정말 힘들었다. 저는 컴맹이었고 지금도 독수리 타법이다. 회사에서 노조 전임자를 인정해주지 않아 3교대 출근하면서 밤잠 줄여가며 노동조합 일을 봤다. 2근(오후 3시 ~ 밤 11시) 출근 하는 날이면 오전에 먼저 사무실 와서 소송 준비하고, 1근(오전 7시 ~ 오후 3시) 출근하는 날이면 그날 밤 순천 가는 10시 30분 막차 시간 전까지 노조 사무실에 남아 소송 준비를 했다. 그러고도 부족해 집에 가서 문서 작성을 했다. 컴퓨터가 한 대뿐이라 딸들과 많이도 싸웠다(웃음). 제 신념이 '엉덩이가 일을 한다'이다.
그렇게 컴퓨터도 못하는 하청 노동자들 힘으로 포스코 같은 거대 기업과 그를 대리하는 김앤장을 눌렀다. 돈은 없지만 남한테 고개 숙이지 않았고, 내 나름 열심히 살아온 삶이 인정 받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날 법정서 나올 때 재판관님들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차별 받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셔서 정말 고맙다고."
- 하지만 정작 본인은 정년이 넘어 직접 고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4명이 정년을 지나 결국 포스코 옷을 입어보지 못하게 됐다. 나, 채규향 동지, 김명국 동지, 윤영록 동지다. 김 동지는 2019년이 정년이었고, 나머지는 동갑이라 작년이 정년이었다. 모두 오랫동안 싸웠는데 아쉽다.
이미 2010년에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이 불법 파견이라는 최병승 동지 대법 판결이 있었기 때문에, 2011년 소송 시작할 때 6~7년 정도면 되겠지 하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포스코와 김앤장은 어떻게든 재판을 질질 끌려고 했다. 2심에서 여덟 번이나 선고가 밀렸고 대법원에서도 두 번 선고가 밀렸다. 우리를 고사시키겠다는 작전이었다. 당초 대법원 선고일도 작년 12월 30일이었다. 정년 맞기 하루 전날이었는데… 결국 해를 넘겨서 이렇게 됐다."
- 2011년 5월 처음 소송을 제기했던 이유는.
"하청 노동자 없이 포스코는 단 하나의 제품도 생산 못한다. 원료 하역부터 제품 출하까지 그 어떤 공정에서도 하청 노동자가 중단하면 생산이 중단된다. 예를 들어 만약 라인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저희 같은 천정크레인 하청 노동자들이 들어가지 않으면 복구가 안 된다. 제철소에 있는 것들은 다 3톤 이상, 수십 톤에 이르는 중량물이다. 외부의 지게차나 큰 차들이 들어올 공간 자체가 없다. 천정크레인으로 들어내고, 다시 얹혀주는 과정이 필수다. 정규직들과 같이 일하고 그들의 지시를 받는 게 자연스럽다. 그렇게 30년 일했다.
제가 입사했을 땐 아침 조회도 같이 했다. 포스코 주임이 원하청 노동자를 한데 모아놓고 체조도 같이 시키고 훈시도 했다. 대기실도 함께 있어서 주임이 하청 노동자들에게 수시로 지시했다. 이게 법 위반이라는 걸 알고 우리가 2004년에 고용노동부 여수지청에 불법 파견 진정을 냈다. 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불법 파견 판결이 없었던 시절이다. 회사에서도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그때부터 사무실과 대기실 사이에 칸막이를 쳤다. 직접 지시하는 대신 현장 반장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작업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2010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불법 파견 판결이 나왔다. 최병승 동지에게 곧바로 연락했다. 소송자료 좀 보게 해달라고. 최 동지가 허락해줘서 3000페이지 넘는 서류를 받았다. 그걸 밤새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우리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오히려 확보한 증거는 우리가 더 충실해 보였다. 현대차처럼 제조 라인에 하청 노동자와 정규직이 옆에 붙어있진 않았지만, 우린 공장 상부에서 천정크레인 운전을 하고 정규직들은 그 아래에 있었다."
- 이번 판결로 직접 고용 대상이 된 55명의 현 상황은.
"7월 28일 판결 당일 오후에 바로 포스코로부터 인사 명령을 받았다. 오늘(16일)부터 포스코 포항 연수원에 3개월 교육 일정으로 입소했다. 55명 중에 특히 해고 상태였던 동지가 8명이다. 2007년에 3명, 2010년에 3명, 2015년에 2명이 노조 활동을 하다 해고됐다. 모두 그간 포스코에서 일 못하고 밖에 나가 건설 현장 노가다를 전전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끝까지 소송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이 끝내 복직하는 것을 보니, 그것도 정규직으로 고용되는 걸 보니 정말 뛸 듯이 기쁘다. 행복하다."
- 이번에 승소한 노동자들이 주로 하던 업무는 무엇이었나.
"다 비슷하다. 천정크레인으로 작으면 3톤, 크면 35톤까지 가는 코일(정해진 두께에 따라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려진 상태의 철강 원재료)을 다음 공정으로 운반한다든지, 압연(회전하는 기계 사이에 쇠붙이를 넣어 다양한 종류의 철강 제품을 만드는 공정) 작업 중 발생한 불량 코일을 처리하기도 하고, 슬래브(쇳물을 가공해서 나온 널빤지 모양의 반제품)를 투입하고, 도금에 필요한 아연을 보급하는 등 필수적인 업무들을 했다.
모든 작업은 원청의 지시에 따라 진행된다. 모니터를 통한 실시간 작업 지시, 무전 지시, 수신호 지시, 그리고 MES(전자 생산관리시스템)까지 동원됐다. 대법원에서 MES가 원청 지시로 인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제철소뿐만 아니라 MES가 보편화돼 있는 제조업 전체에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사내하청 노동자만 1만 8400명... 정부, 사용자측 불법엔 왜 눈감나"
▲ 전남 광양 포스코사내하청 노조 사무실에 소송 자료가 쌓여있다. 지난7월 28일, 포스코사내하청 노조 조합원 59명은 포스코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무려 11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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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포스코 사내하청 노동자 숫자는 얼마나 되나.
"1차 사내하청이 98개 업체, 총 1만 8417명이다. 이 역시 소송을 통해 알게 된 숫자다. 포스코는 하청 업체 현황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2차, 3차 하청 업체들에 대한 정보는 노조도 갖고 있지 못하다. 조합원이 있는 2차 하청 업체가 아직 한군데밖에 없어서 그렇다. 2·3차 하청까지 합하면 포스코 하청 노동자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정규직은 1만 7000여명 정도다.
하청 노동자들, 지금 같은 여름이면 소금 먹어가며 일하는 사람들이다. 안 먹으면 쓰러지니까. 열연공장에서 조금만 일해도 등에 하얗게 소금꽃이 핀다. 1200℃ 넘는 빨간 쇠판이 계속 지나다니는데 얼마나 뜨겁겠나. 거기에 물을 쏴서 냉각하면서 압연을 하는데, 그러면 수증기가 생긴다. 습도가 높으니 온도는 더 오른다. 찜질방보다 뜨겁다.
그렇게 일해서 받는 돈은 정규직의 40% 선이다. 우리가 소송을 진행하면서 처음으로 정규직들의 연봉 수준을 정확히 알게 됐다. 정말 깜짝 놀랐다. 하청 조합원들에게 보여주면 다들 못 믿어 했다. 저는 입사 30년이 되도록 연봉 5000만 원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년차 정규직들 연봉이 1억 3000만 원대였다. 성과급이 800%였다. 현금성 복지 포인트 100만 원도 있었다. 하청 노동자들은 성과급도, 복지 포인트도 없었다."
- 이번 판결 이후 어떤 변화가 있나.
"이번 판결은 포스코가 모든 사내하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법 위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현재 포스코는 오로지 판결문에 있는 55명에 대해서만 정규직 명령을 냈다. 그 55명이 속한 2개 하청 업체에 총 4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조차 정규직 인사명령을 내지 않았다.
이게 무슨 뜻인가. 소송하지 않으면 정규직은 없다는 뜻이다. 포스코의 이런 태도를 본 하청 노동자들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회사에 속았다는 거다. 노조 가입 문의도,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참여 신청도 크게 늘고 있다."
- 얼마나 늘었나.
"조합원은 1000명 정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소송 참여 인원도 비슷하게 늘 것 같다. 지금이 8차 소송단 모집인데, 앞서 1~7차 소송단 인원이 총 808명이다. 8차까지 1800여 명이라면 포스코 1차 사내하청 전체 노동자의 10% 정도가 소송에 참여하게 된다. 이번에 판결이 난 노동자들은 1차(15명)·2차(44명) 소송단이었다."
-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지만, 개별 소송을 진행하지 않으면 다른 하청 노동자들은 직접 고용될 수 없다는 얘기다.
"집단소송제(소송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피해자도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가 없어서다. 이게 말이 되나. 분명히 포스코가 법을 위반하고 있다고 판명 났는데, 노동자들은 개별 소송을 해야 정규직으로 채용될 수 있다는 게. 상식이 아니지 않나. 그럼 또 우리처럼 소송해서 11년 버티라는 건가. 그렇게 또 정년 지나고? 왜 정부와 검찰, 국가는 노동자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선 엄단하면서, 사용자들의 불법에 대해선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나.
포스코는 이 틈을 타 무슨 수를 써서든 하청 노동자들이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으로 가는 걸 막으려 한다. 급하게 하청 노동자 처우를 신경 쓰겠다고 회유하려 드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도 포스코가 최하 1500억원은 풀 거라고 본다. 하청 노동자들 임금 인상 해주고, 복지 포인트 100만 원에, 일시금으로 200만 원 부여한다는 얘기가 벌써 공공연히 나온다.
왜 그럴까? 그게 더 싸니까. 이번 소송에서 포스코가 낸 자료를 보면, 1만8417명 하청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면 1년에 9640억 원이 들어간다고 논문까지 제출했더라. 매년 1조 원이라는 거다. 포스코가 지금껏 그만큼의 불법적인 이익을 취했다는 뜻이다. 그게 하청 노동자들이 빼앗겨온 가치다.
2016년 8월 2심에서 승소했을 때도 회사는 똑같은 태도였다. 2013년 1월 1심에서 패소했을 땐 콧방귀도 안 뀌더니, 우리가 이기자마자 갑자기 하청 노동자들에게 두 자리 숫자 퍼센트 임금 인상안을 제시했다. 몇몇 하청 업체에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준비한다는 얘기가 흘러나오자, 회사가 먼저 회유에 나선 것이다. 결국 그 과정에서 소송을 접은 하청 노동자들도 많았다.
그래도 소송 참여 움직임이 이어지자 포스코는 하청사 상생협의회라는 걸 만들어 정규직에만 주어지던 자녀 학자금 지급까지 약속했다. 그러면서 소송을 진행하는 하청 노동자들에 대해선 학자금 지급을 제외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소송을 중간에 포기한 하청 노동자들도 꽤있었다. 당장 학자금들이 급하니까. 회사가 이렇게 치사하다. 노조는 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시정 신청을 해놓은 상태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요즘도 포스코는 지금 논의하고 있는 하청 노동자 복지 포인트 100만원 신설에 대해서도 소송을 진행하는 경우 지급하지 않겠다고 여론전을 펴고 있더라. 하청 노동자들의 처우가 좋아진 건 늘 하청 노조 덕이었는데, 정작 하청 노조 조합원들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한다. 유감은 없다. 그러려고 노조 한 거니까."
[인터뷰②] "벼슬이 된 정규직... 노동운동, 원하청 분리 정책에 제대로 대응 못했다"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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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이 된 정규직... 노동운동, 원하청 분리 정책에 제대로 대응 못했다"
[대우조선 파업 이후 ③-2] 11년 소송 승리한 양동운 전 포스코 사내하청지회장
22.08.23
김성욱(etshiro)
▲ 노조 불모지였던 포스코에서 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전 지회장. 양 전 지회장은 광양 노조 사무실에서 고 양우권씨를 생각하다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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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11년 만에 김앤장·포스코와 싸워 이긴 30년 하청노동자의 눈물>에서 이어집니다.)
노조 불모지였던 포스코에서 사내하청 노조를 30년 넘게 지켜낸 양동운(62) 전 지회장은 동료인 고 양우권씨를 잃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며 울었다. 지난 2015년 회사의 괴롭힘에 견디다 못해 고인이 사망한 뒤, 한때 수백명이던 노조 조합원은 40명까지 축소됐다. 당시 노조 지회장이던 양동운씨는 고인의 죽음에 항의하다 회사에서 해고됐고, 시위 도중 구속까지 됐다.
하지만 2016년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2심에서 승리하며 포스코 하청 노조는 전환점을 맞는다. 양씨는 현재 800명까지 불어난 노조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대한민국 노동계가 지금껏 비정규직 문제에 제대로 대처한 게 맞는지 자책감이 든다고 했다. "삼십년 인생을 노조에 바쳤는데, 결과적으로 하청, 비정규직, 계약직, 기간제, 인턴, 특고, 간접 고용 노동자는 늘어나기만 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양씨는 "민주노총, 한국노총 각각 조합원이 100만 명일 정도로 노조가 커졌는데, 사용자의 원·하청 분리 정책에는 뒷북만 쳐온 것 아닌가"라며 "노조가 내 임금 올리겠다는 데만 함몰돼 사회 전반을 보지 못하고, 후배들의 근로조건을 제한하는 데 너무 쉽게 동의해온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11년간 싸운 그의 눈물 "양우권 열사가 살아있었다면…"
- 1987년 입사다.
"스물 여덟에 들어간 첫 직장이었다. 그 전까진 고향인 순천 해룡면에서 부모님 따라 작게 농사를 지었다. 감나무도 하고 밤나무도 하고, 고추, 벼농사도 했다. 소도 대여섯 마리 키웠다. 그러다 면사무소에 붙은 포스코 사내하청 업체 모집공고를 봤다. 그때 회사 안 들어가고 노조 안 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진짜 순진하게 살았을 텐데(웃음)."
- 노조를 처음 결성한 게 1989년이다.
"3월 22일이었다. 차별 좀 바꿔보자는 거였다. 하청 노동자는 작업복 색깔, 안전모 색깔까지 정규직과 달랐다. 밖에 딱 나오면 누가 하청이고 정규직인지 금방 구분됐다. 하청 작업복은 청색이었고 정규직은 갈색이었다. 하청 안전모는 노란색, 정규직은 흰색이었다. 정규직은 아주 자랑스럽게 갈색 옷 입고 출퇴근하고 지역 사회를 다녔다. 최근 와서야 하청과 정규직 옷 색깔이 같아졌다.
노조 하기는 참 힘들었다. 시작부터 험난했다. 우리는 몰랐는데 회사엔 이미 어용 노조가 있었다. 5명이 가입돼 있는. 그때는 복수노조가 금지돼 있을 때라 노조 설립 신고부터 막혔다. 노조 세우겠다고 모인 스무명이 같이 농성을 했다. 순천 천주교 신부님의 중재로 겨우 노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포스코는 수십년간 '무노조'를 내세웠고 민주노총이라고 하면 알러지 반응을 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청 업체들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온갖 협박과 회유로 노조 깨진 업체가 한둘이 아니다. 힘들게 민주노조 하나 세우면 바로 관리자들이 나서서 2노조를 만들고 숫자 늘린다. 다수 노조가 되면 민주노조 조합원 하나하나 회유하고 협박해 무력화시킨다. 지금 포스코 사내하청 업체 중에 교섭권 가진 곳은 광양에 한 곳뿐이다. 민주노조가 있는 사업장은 광양제철소에 총 5곳, 포항제철소에 총 7곳이다. 이만큼 지키기도 정말 어려웠다. 이번 판결로 많이 늘어날 거다."
- 노조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2015년 5월 10일이다. 양우권 열사를 지켜주지 못했던 날... 양우권 열사는 포스코 사내하청 업체인 이지테크에서 일하다 2011년에 해고됐다. 노조 한다는 이유였다. 2012년 부당해고 판결이 나왔고, 양우권 열사는 2014년에 어렵게 복직했다. 하지만 회사의 괴롭힘은 계속됐다. 하루종일 빈 책상에만 앉혀놓고 머리 위에 CCTV를 달아 감시했다. 사측의 탄압으로 50명 넘던 이지테크 조합원은 양우권 열사 홀로 남았다.
양우권 열사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2015년 5월 9일, 이지그룹이 충남 금산에서 체육대회를 열었다. 그날 기억이 생생하다. 아침에 양우권 열사를 비롯해 8명이 봉고차 타고 금산으로 가서 집회를 했다. 근데 어린 자녀들이 너무 많이 왔더라. 낮 12시까지 집회를 이어갔는데 아무래도 이지그룹 회장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씨는 참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권이한테 이 정도 했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우권이도 동의했다. 광양으로 돌아오는데 중간에 우권이가 내려달라고 했다. 인근 야산 공원이었다. 걸어가려나 보다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우권이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힘들다고. 퍼뜩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부인에게 연락해 얼른 우권이 어디있나 찾아보라고 했더니 밤새 집에 안 들어왔다고 하더라. 우권이는 전날 내렸던 그 야산에 있었다. 우리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빨간 머리띠에 목을 맨 거였다. 제철소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내가 지회장으로서 우권이를 좀 더 따뜻하게 감싸줬다면 그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늘 죄책감이 들고... 30년 노조 하면서 가장 큰 상처다."
- 고 양우권씨는 유서에서 조합원들에게 "제가 바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양동운 지회장을 위시하여 똘똘 뭉쳐 끝까지 싸워서 정규직화 소송, 해고자문제 꼭 승리하십시오. 멀리서 하늘에서 연대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화장하여 제철소 1문 앞에 뿌려 주십시오. 새들의 먹이가 되어서라도 내가 일했던 곳,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곳, 날아서 철조망을 넘어 들어가 보렵니다"라고 썼다.
"그나마 이번 판결로 우권이의 유언을 이룬 것 같아 너무 기쁘다. 우권이의 간절한 바람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도 없지 않았을까. 우리들은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는데... 우권이는 끝까지 우리들이 받는 차별, 설움을 생각했다. 떠나는 순간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자기 대신 극복하고, 혜택 받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게 너무...
고맙다. 미안하다. 경남 남해에 있는 우권이 묘소에는 기일인 5월 10일마다 간다. 이번 판결 나고 나서 한번 다녀왔다. 우권이가 살아서 이 모습을 봤다면 진짜 좋았을 걸..."
▲ 포스코사내하청지회 이지테크분회장이던 고 양우권 열사가 2015년 5월 10일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유서.
ⓒ 포스코사내하청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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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고 양우권씨 사망 직후 회사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이다 구속까지 됐다.
"동지가 죽었는데 출근할 수는 없었다. 그때 전 조합원이 60명 정도 됐다. 지회장으로서 일하지 말고 다 나가자고 했다. 당시 조합원들은 양우권 열사와 소속 회사도 다 달랐지만, 단 한 명도 출근하지 않고 따라줬다. 그렇게 상복 입고 이지그룹 본사 앞에서 40여일 노숙 투쟁을 했다. 전부 해고 통보를 받았다. 각오한 싸움이었다. 여론이 안 좋았지만 회사 쪽에선 계속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내가 대표로 해고를 수용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모두 복귀했다.
구속된 건 금속노조와 연대 집회를 했을 때였다. 경찰들과 밀고 당기다 회사 문이 열렸고 그 길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이다 곧바로 연행됐다. 특수건조물침입이었다. 서울 구치소에서 4개월간 살았다. 해고도 구속된 상태에서 이뤄졌다. 그 이후 다시 포스코에서 일하지 못했다. 그때 결정을 후회하진 않는다. 지회장으로서 져야 할 책임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곳 내가 안 고치면 누가 고치겠나"
▲ 포스코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전 지회장. 양씨는 30년 동안 세번 해고됐고, 한번 구속됐다. 그리고 한명의 동지를 잃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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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최종 해고되기 전에도 두 번 해고를 겪었다. 생활은 어떻게 했나.
"가족들에게 빚을 많이 졌다(웃음). 1998년, 2001년에 해고됐었다. 노조하고 파업한다고. 부당한 해고였고, 법적 절차를 거쳐 복직하는 데 1년씩 걸렸다. 해고되면 첫 번째로 임금이 없어지지 않나. 아내와 세 딸들이 많이 고생 많이 했다. 아이들 학원도 제대로 못 보냈고... 아내가 순천에서 과일 농사, 벼농사를 좀 지어서 그걸로 먹고 살았다.
그러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아내가 10여 년 전부터 시내에서 식당을 차렸다. 횟집 했다가 장어집도 했다가… 지금은 식당 접고 독거노인 돌봄 센터 일을 나간다. 내가 또 노조 지회장 맡았다고 하면 미쳤다고 했었지만, 돈 못 벌어온다고 구박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노조 일을 마음 놓고 볼 수 있었다. 아내에게 고맙다.
둘째 딸은 2015년에 내가 구속된 걸 본 이후로 결심을 하더니 지금은 노무사가 됐다. 최근에 서울에서 사무실을 개업했다. 처음엔 금융업 쪽에 취업한다고 했었는데 나 때문에 마음을 바꾼 것 같더라. 특히 해고 사건 상담이 오면 혼신의 힘을 다해달라고 부탁한다. 노조 일 다 끝나면 제가 가족들에게 잘해줘야 한다(웃음)."
- 최근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의 파업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저도 현장에 두 번 다녀왔다. 차별 받는 비정규직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다시 한 번 느꼈다. 하청 노동자는 먹고 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게 대한민국 현실이다. 너무 답답하다. 어디든 똑같은 것 같아서(제조업 중 조선업과 제철업은 사내하청 비율이 가장 높은 업종이다. 2021년 고용노동부 고용형태 공시 결과를 보면,
22.08.23
김성욱(etshiro)
▲ 노조 불모지였던 포스코에서 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포스코 사내하청지회 전 지회장. 양 전 지회장은 광양 노조 사무실에서 고 양우권씨를 생각하다 울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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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 <11년 만에 김앤장·포스코와 싸워 이긴 30년 하청노동자의 눈물>에서 이어집니다.)
노조 불모지였던 포스코에서 사내하청 노조를 30년 넘게 지켜낸 양동운(62) 전 지회장은 동료인 고 양우권씨를 잃었을 때가 가장 힘들었다며 울었다. 지난 2015년 회사의 괴롭힘에 견디다 못해 고인이 사망한 뒤, 한때 수백명이던 노조 조합원은 40명까지 축소됐다. 당시 노조 지회장이던 양동운씨는 고인의 죽음에 항의하다 회사에서 해고됐고, 시위 도중 구속까지 됐다.
하지만 2016년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 2심에서 승리하며 포스코 하청 노조는 전환점을 맞는다. 양씨는 현재 800명까지 불어난 노조에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대한민국 노동계가 지금껏 비정규직 문제에 제대로 대처한 게 맞는지 자책감이 든다고 했다. "삼십년 인생을 노조에 바쳤는데, 결과적으로 하청, 비정규직, 계약직, 기간제, 인턴, 특고, 간접 고용 노동자는 늘어나기만 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양씨는 "민주노총, 한국노총 각각 조합원이 100만 명일 정도로 노조가 커졌는데, 사용자의 원·하청 분리 정책에는 뒷북만 쳐온 것 아닌가"라며 "노조가 내 임금 올리겠다는 데만 함몰돼 사회 전반을 보지 못하고, 후배들의 근로조건을 제한하는 데 너무 쉽게 동의해온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11년간 싸운 그의 눈물 "양우권 열사가 살아있었다면…"
- 1987년 입사다.
"스물 여덟에 들어간 첫 직장이었다. 그 전까진 고향인 순천 해룡면에서 부모님 따라 작게 농사를 지었다. 감나무도 하고 밤나무도 하고, 고추, 벼농사도 했다. 소도 대여섯 마리 키웠다. 그러다 면사무소에 붙은 포스코 사내하청 업체 모집공고를 봤다. 그때 회사 안 들어가고 노조 안 했다면 아무것도 모르고 진짜 순진하게 살았을 텐데(웃음)."
- 노조를 처음 결성한 게 1989년이다.
"3월 22일이었다. 차별 좀 바꿔보자는 거였다. 하청 노동자는 작업복 색깔, 안전모 색깔까지 정규직과 달랐다. 밖에 딱 나오면 누가 하청이고 정규직인지 금방 구분됐다. 하청 작업복은 청색이었고 정규직은 갈색이었다. 하청 안전모는 노란색, 정규직은 흰색이었다. 정규직은 아주 자랑스럽게 갈색 옷 입고 출퇴근하고 지역 사회를 다녔다. 최근 와서야 하청과 정규직 옷 색깔이 같아졌다.
노조 하기는 참 힘들었다. 시작부터 험난했다. 우리는 몰랐는데 회사엔 이미 어용 노조가 있었다. 5명이 가입돼 있는. 그때는 복수노조가 금지돼 있을 때라 노조 설립 신고부터 막혔다. 노조 세우겠다고 모인 스무명이 같이 농성을 했다. 순천 천주교 신부님의 중재로 겨우 노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포스코는 수십년간 '무노조'를 내세웠고 민주노총이라고 하면 알러지 반응을 보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청 업체들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온갖 협박과 회유로 노조 깨진 업체가 한둘이 아니다. 힘들게 민주노조 하나 세우면 바로 관리자들이 나서서 2노조를 만들고 숫자 늘린다. 다수 노조가 되면 민주노조 조합원 하나하나 회유하고 협박해 무력화시킨다. 지금 포스코 사내하청 업체 중에 교섭권 가진 곳은 광양에 한 곳뿐이다. 민주노조가 있는 사업장은 광양제철소에 총 5곳, 포항제철소에 총 7곳이다. 이만큼 지키기도 정말 어려웠다. 이번 판결로 많이 늘어날 거다."
- 노조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2015년 5월 10일이다. 양우권 열사를 지켜주지 못했던 날... 양우권 열사는 포스코 사내하청 업체인 이지테크에서 일하다 2011년에 해고됐다. 노조 한다는 이유였다. 2012년 부당해고 판결이 나왔고, 양우권 열사는 2014년에 어렵게 복직했다. 하지만 회사의 괴롭힘은 계속됐다. 하루종일 빈 책상에만 앉혀놓고 머리 위에 CCTV를 달아 감시했다. 사측의 탄압으로 50명 넘던 이지테크 조합원은 양우권 열사 홀로 남았다.
양우권 열사가 세상을 떠나기 하루 전인 2015년 5월 9일, 이지그룹이 충남 금산에서 체육대회를 열었다. 그날 기억이 생생하다. 아침에 양우권 열사를 비롯해 8명이 봉고차 타고 금산으로 가서 집회를 했다. 근데 어린 자녀들이 너무 많이 왔더라. 낮 12시까지 집회를 이어갔는데 아무래도 이지그룹 회장이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씨는 참석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권이한테 이 정도 했으니 오늘은 그만 돌아가자고 했다. 우권이도 동의했다. 광양으로 돌아오는데 중간에 우권이가 내려달라고 했다. 인근 야산 공원이었다. 걸어가려나 보다 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우권이에게 전화가 왔다. 너무 힘들다고. 퍼뜩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부인에게 연락해 얼른 우권이 어디있나 찾아보라고 했더니 밤새 집에 안 들어왔다고 하더라. 우권이는 전날 내렸던 그 야산에 있었다. 우리가 항상 가지고 다니는 빨간 머리띠에 목을 맨 거였다. 제철소가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내가 지회장으로서 우권이를 좀 더 따뜻하게 감싸줬다면 그런 일이 없지 않았을까… 생각하면 늘 죄책감이 들고... 30년 노조 하면서 가장 큰 상처다."
- 고 양우권씨는 유서에서 조합원들에게 "제가 바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양동운 지회장을 위시하여 똘똘 뭉쳐 끝까지 싸워서 정규직화 소송, 해고자문제 꼭 승리하십시오. 멀리서 하늘에서 연대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화장하여 제철소 1문 앞에 뿌려 주십시오. 새들의 먹이가 되어서라도 내가 일했던 곳, 그렇게 가고 싶었던 곳, 날아서 철조망을 넘어 들어가 보렵니다"라고 썼다.
"그나마 이번 판결로 우권이의 유언을 이룬 것 같아 너무 기쁘다. 우권이의 간절한 바람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도 없지 않았을까. 우리들은 끝까지 지켜주지 못했는데... 우권이는 끝까지 우리들이 받는 차별, 설움을 생각했다. 떠나는 순간에도 남아있는 사람들이 자기 대신 극복하고, 혜택 받길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게 너무...
고맙다. 미안하다. 경남 남해에 있는 우권이 묘소에는 기일인 5월 10일마다 간다. 이번 판결 나고 나서 한번 다녀왔다. 우권이가 살아서 이 모습을 봤다면 진짜 좋았을 걸..."
▲ 포스코사내하청지회 이지테크분회장이던 고 양우권 열사가 2015년 5월 10일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유서.
ⓒ 포스코사내하청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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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고 양우권씨 사망 직후 회사에 항의하는 집회를 벌이다 구속까지 됐다.
"동지가 죽었는데 출근할 수는 없었다. 그때 전 조합원이 60명 정도 됐다. 지회장으로서 일하지 말고 다 나가자고 했다. 당시 조합원들은 양우권 열사와 소속 회사도 다 달랐지만, 단 한 명도 출근하지 않고 따라줬다. 그렇게 상복 입고 이지그룹 본사 앞에서 40여일 노숙 투쟁을 했다. 전부 해고 통보를 받았다. 각오한 싸움이었다. 여론이 안 좋았지만 회사 쪽에선 계속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내가 대표로 해고를 수용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모두 복귀했다.
구속된 건 금속노조와 연대 집회를 했을 때였다. 경찰들과 밀고 당기다 회사 문이 열렸고 그 길로 건물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벌이다 곧바로 연행됐다. 특수건조물침입이었다. 서울 구치소에서 4개월간 살았다. 해고도 구속된 상태에서 이뤄졌다. 그 이후 다시 포스코에서 일하지 못했다. 그때 결정을 후회하진 않는다. 지회장으로서 져야 할 책임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곳 내가 안 고치면 누가 고치겠나"
▲ 포스코사내하청 노조를 30년간 이끈 양동운(62)전 지회장. 양씨는 30년 동안 세번 해고됐고, 한번 구속됐다. 그리고 한명의 동지를 잃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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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최종 해고되기 전에도 두 번 해고를 겪었다. 생활은 어떻게 했나.
"가족들에게 빚을 많이 졌다(웃음). 1998년, 2001년에 해고됐었다. 노조하고 파업한다고. 부당한 해고였고, 법적 절차를 거쳐 복직하는 데 1년씩 걸렸다. 해고되면 첫 번째로 임금이 없어지지 않나. 아내와 세 딸들이 많이 고생 많이 했다. 아이들 학원도 제대로 못 보냈고... 아내가 순천에서 과일 농사, 벼농사를 좀 지어서 그걸로 먹고 살았다.
그러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는지 아내가 10여 년 전부터 시내에서 식당을 차렸다. 횟집 했다가 장어집도 했다가… 지금은 식당 접고 독거노인 돌봄 센터 일을 나간다. 내가 또 노조 지회장 맡았다고 하면 미쳤다고 했었지만, 돈 못 벌어온다고 구박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노조 일을 마음 놓고 볼 수 있었다. 아내에게 고맙다.
둘째 딸은 2015년에 내가 구속된 걸 본 이후로 결심을 하더니 지금은 노무사가 됐다. 최근에 서울에서 사무실을 개업했다. 처음엔 금융업 쪽에 취업한다고 했었는데 나 때문에 마음을 바꾼 것 같더라. 특히 해고 사건 상담이 오면 혼신의 힘을 다해달라고 부탁한다. 노조 일 다 끝나면 제가 가족들에게 잘해줘야 한다(웃음)."
- 최근 대우조선해양 하청 노동자들의 파업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저도 현장에 두 번 다녀왔다. 차별 받는 비정규직이 자신의 권리를 찾기가 이렇게 어렵구나, 다시 한 번 느꼈다. 하청 노동자는 먹고 살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게 대한민국 현실이다. 너무 답답하다. 어디든 똑같은 것 같아서(제조업 중 조선업과 제철업은 사내하청 비율이 가장 높은 업종이다. 2021년 고용노동부 고용형태 공시 결과를 보면,
- 제조업 전체의 사내하청 노동자 비율은 19.5%(29만 4000명)인데, 이중
- 조선업이 사내하청 비율 61.2%(5만 6000명)로 가장 높았고,
- 철강금속업의 사내하청 비율이 38.7%(3만 7000명)로 두 번째였다).
그들이 노조 하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눈에 선했다. 하청 노조 조직하기가 정규직보다 훨씬 어렵다. 하청 노동자들은 고용이 불안하다. 그러니 '평생 직장' 개념이 적을 수밖에 없다. '에잇, 더러우니 딴 데 가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 굳이 앞에 총대 메고 싸울 필요가 있냐는 거다.
저는 우리 하청 노동자들도 이 생각은 좀 바꿨으면 좋겠다. 내가 일하는 곳 내가 안 고치면 누가 고치겠나. 포기하고 다른 데 옮겨간다고 해도 다를까. 똑같다. 대우조선이고 포스코고 대한민국 하청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이야 다 유사하다. 제철소나 조선소나 위험하고 힘들고 덥고 추운 일은 하청 노동자들이 한다.
요즘도 젊은 친구들이 대놓고 이런 얘길 한다. '다음에 어디 시험보고 좋은 데 공고 나면 거기로 가면 되지, 굳이 나서서 회사에 찍히기 싫다.' 저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말한다. '아니다. 너가 포기하면 다른 사람들도 포기하고, 이 비참한 하청은 영원히 존재할 거다.' 자신이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노동자들이 언제든 떠날 마음을 품고 일하는 건 회사 입장에서도 전혀 좋지 않다고 본다. 신참 데려다 한참 가르쳐놨더니 더럽다고 다른 곳 가버리면 회사로서도 얼마나 낭비인가. 회사가 노동자를 귀하게 여기고 올바르게 대접하면 노동자는 떠나지 않는다. 하청 노동자도 애사심을 가지도록 유도해야 회사도 중장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 근본적으로 대기업들이 원·하청을 나누는 이유가 뭘까.
"가장 큰 목적이 노동 통제라고 본다. 하청을 차별함으로써 막대한 노무비를 줄이고, 동시에 정규직들의 불만을 무마한다.
지금 대한민국 정규직들은 다 만족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들 옆에 하청이 없다면? 만족하지 못할 거다. 나는 그걸 100% 확신한다. 포스코 정규직만 봐도 그렇다. 자기들은 여름에 더우면 나갈 일 없고, 겨울에 추우면 나갈 일 없다. 그런데도 하청 노동자 임금의 배를 넘게 받고 하청엔 없는 복지·휴가 혜택까지 누린다.
그렇게 정규직들은 하청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나는 저들과 다르다. 나는 노동자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 결과 당연한 '정규직'이 마치 벼슬처럼 됐다. 그 울타리 속에 들어간 이들은 '노동자'라는 개념을 상실해간다. '저 밑에 하청 놈들도 사는데, 너는 훨씬 낫잖아? 지역 사회에서도 다르게 대우받잖아?' 하는 회사의 전략이 통한 거다."
▲ 양동운(62) 전 지회장은 30년간 포스코사내하청 노조를 지켰다. 포스코를 상대로 근로자지위 확인 소송을 내 11년만에 최종 승소 판결도 이끌었다. 하지만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걸 보면 "우리가 30년간 뭘 한 건가 싶다"고 했다.
ⓒ 김성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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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대우조선 파업 과정에서도 원·하청간 노노 갈등이 불거졌다.
"요즘 제가 조합원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가 30년 노조 했는데, 이룬 게 하나도 없는 세상인 것 같다'고. 발버둥은 쳤는데, 뒤돌아보니 개선한 것보다 오히려 나빠진 게 더 많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노조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누구나 취업해서 엇비슷하게는 살 수 있는 세상이었다. 계약직, 비정규직 이런 말 없었다.
근데 지금은 어떤가. 하청, 기간제, 인턴까지 너무 당연해졌다. 예전엔 수습 3개월이면 정규직 됐다. 요즘은 그런 기업 찾아보기 힘들다. 계약직으로 쓰다가, 기간 연장까지 하고 실컷 쓰다가, 마지막에 가서 또 정규직 전환 여부를 회사가 판단한다. 진짜 후퇴도 이런 후퇴가 없다.
결과가 이렇다면 우리 노동조합들도 그동안 사회를 올바로 보지 못한 것 아닌가 살펴볼 때가 아닐까. 그동안 민주노총은 복수노조 인정도 받았고, 조합원도 100만 명을 넘겼다. 한국노총도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노조가 이렇게 커졌는데, 대한민국 노조는 그동안 경총이나 사용자들의 전략에 뒷북만 울려온 것 아닌가 싶다. 사용자의 원·하청 분리 정책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 아닌가 싶은 거다.
노조가 사회 전반을 돌아보지 못하고, 내 임금 올리겠다는 데만 함몰됐던 건 아닐까. 지금 있는 조합원만 챙기느라 후배들의 근로 조건을 제한하는 데에 너무 쉽게 동의했던 게 아닐까. 원청, 하청 노동자들도 어느새 그런 대기업들의 함정에 빠져 같이 빨려 들어갔던 건 아닐까. 평생 노조 열심히는 했는데, 정말 잘한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서글프다."
[관련 기사]
"박지만, 하늘에서 두 눈 부릅뜨고 보겠다" http://omn.kr/dkc0
"박지만, 인간다운 경영인 되라"... 노조 분회장 자살 http://omn.kr/dj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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