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November 10, 2021

“이러다 죽어요”라던 고졸 노동자, 11m 아래로 떨어졌다-국민일보

“이러다 죽어요”라던 고졸 노동자, 11m 아래로 떨어졌다-국민일보



“이러다 죽어요”라던 고졸 노동자, 11m 아래로 떨어졌다
[고졸 노동자, 그 서러운 이름] ① 노동 밑바닥에 내몰리는 청춘
입력 : 2021-11-09 00:05


‘공장, 공사판, 비정규직, 하청업체, 청년….’

산업재해 현장을 전하는 소식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이 포함된 사고 현장에 최근 부쩍 자주 눈에 띄는 단어가 특성화고교(직업계고교) 출신이다. 전문 직업인을 양성한다는 특성화고 학생들은 성인의 문턱을 넘기 전부터 현장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사회 노동의 밑바닥에 투입된다. 어리고 힘없는 그들은 부조리한 업무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고, 그렇게 또 한 명의 사고 피해자로 기록된다.

지난달 6일 전남 여수에서 요트에 붙은 따개비를 제거하다 숨진 홍정운(18)군도 그랬다. 여수해양과학고 현장실습생인 홍군은 잠수기능사 자격증이 없었지만 바다에 들어가라는 대표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바다에서 나오지 못한 홍군을 위해 친구들은 지난 7일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친구들이 행진하는 서울시청 앞 거리엔 ‘내 곁에만 있어줘, 떠나지 말아줘’라는 노래 가사가 흘렀다. 생전 홍군이 좋아하던 ‘밤하늘의 별을’이라는 노래였다.

특성화고교 학생들은 취업 순서로 서열이 정해진다. 성적이 높거나 기능경진대회 같은 외부 실적이 있는 학생을 필두로 하나둘 취업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남은 이들은 초조해진다. 열악한 근로 조건이라 해도 ‘낙오자가 될 수 없다’는 걱정에 일단 어디든 붙잡으려 했다. 영세한 업체일수록 학교의 관리감독도 허술했다. 국민일보가 만난 한 재학생은 매일 고무장갑만 낀 채 튀김솥에 손을 넣어야 하는 급식 조리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어른들이 ‘사회생활은 원래 다 위험하고 힘들다’고 해서 적응하려고 애쓰는 중”이라고 했다.

졸업 후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회가 붙인 ‘고졸’이라는 꼬리표는 떼어내기 어려웠다. 영세업체에 첫발을 디딘 특성화고 졸업생에게 더 좋은 환경에서의 일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그저 ‘고졸’로만 인식될 뿐이다. 일자리는 부족했고, 더 열악하고 더 위험한 곳으로 내몰리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쉽지 않다고 했다.

지난 9월 27일 인천 송도 외벽작업 중 추락해 숨진 차모(29)씨, 지난달 18일 경북 포항의 폐기물 재활용 공장에서 환풍기 교체 작업을 하다 추락해 숨진 함모(28)씨도 모두 특성화고 졸업생이었다.

함씨 형은 국민일보에 보낸 편지에서 “누군가 위험한 일을 부당하게 시키면 당당하게 거절할 수 있는 사회가 오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다. 함씨 형 역시 특성화고를 졸업한 뒤 열악한 일터로 갈 수밖에 없었고,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그는 “작은 일터일수록 안전과 같은 기본은 지켜지지 않는데, 그곳에 보내지는 게 우리들”이라고 했다.

국민일보는 특성화고 재학생과 졸업생 20명을 접촉해 실습 현장부터 졸업 후 삶까지 들여다봤다. 현장에서 만난 재학생과 졸업생들은 위태로운 노동 현장에서 매일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었다. 고인이 된 이들은 유가족과 주변 지인의 동의를 얻어 취재를 진행했다.

지난달 18일 경북 포항의 한 폐기물 재활용 업체에 다니던 함모(28)씨가 환풍기 교체 작업을 하다 11m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 포항의 특성화고교 동력기계과를 졸업한 함씨는 고교 3학년 현장실습을 시작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지 10년이 되는 해에 숨졌다. ‘고졸’에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밤낮이 없는 교대 근무 생산직이었다. 국민일보는 사고 경위를 조사 중인 고용노동부 포항지청과 포항남부경찰서, 유족과 동료의 말을 그러모았다. 유족의 동의를 얻어 사망 전 함씨 이야기를 그의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지난달 18일 함모(28)씨가 추락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던 경북 포항의 한 폐기물 재활용 공장 지붕에 사고 당일의 흔적이 남아 있다. 유족 제공

안전보다 먼저였던 돈

“언제까지 우리 직원들끼리 이 작업을 해요. 전문업체 좀 부르자니까. 누구 하나 죽어봐야 알 거예요?” 회사에 여러 차례 전문인력을 불러 달라고 이야기했지만 공장 지붕 환풍기 교체 작업은 늘 거기서 일하던 직원들의 몫이었다. 안전장치 없이, 전문가도 아닌 이가 작업을 하다 사고가 나면 큰 피해로 이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들었다.

문제는 늘 비용이었다. 환풍기 교체를 전문업체에 맡겨 지붕을 다 뜯어내면 시공비만 9000만원가량이 든다고 했다. 결국 회사는 직원들이 직접 지붕으로 올라가 조금씩 보수하는 방식을 택했다. 생산팀이던 나를 비롯해 전혀 다른 업무를 하던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지붕에 올랐지만 고소공포증 탓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환풍기 교체 작업이 있는 날이면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졌다. 그럴 때마다 5년 전 이 회사에 처음 들어왔을 때를 떠올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고졸이지만 이곳에선 나를 ‘대리’로 불러줬다. 월급명세서에 선명하게 찍힌 ‘대리’라는 단어를 보면 왠지 뿌듯했다. 작은 회사지만 1~2년 정도 돈을 모으면 여자친구와 결혼할 수 있겠다는 꿈도 꿀 수 있었다.

철 소재의 부산물을 재활용하는 공장 특성상 물만 닿아도 화학반응으로 인해 불이 나는 자재들이 곳곳에 쌓여 있었다. 회사 대표는 종종 늦은 밤 문자를 보내 ‘공장 순찰을 돌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때마다 회사로 돌아와 순찰을 돌았다. 밖에서 친구들과 약속이 있을 때도 어김없었다.

3조 3교대에서 4조 3교대로 갑자기 근무 형태가 바뀌어 급여가 월 200만원 초반대로 줄었을 때는 잔업을 해서라도 줄어든 급여를 메워야 했다. 월급 내역서에 추가 잔업 시간이 50시간까지 찍힌 날도 있었다. 한 주 근무 시간이 58시간이던 때도 잦았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처음 사회를 맞닥뜨린 고교 현장실습 때부터 취업 현장은 늘 교대 근무와 초과 근무가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넉넉지 않은 가정 형편 탓에 대학에 간 형에 이어 나까지 대학을 갈 순 없었다. 그렇게 포항의 한 특성화고 동력기계과에 진학했고, 또래보다 일찍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벅찼다. 2011년 3학년 2학기에 나간 현장 실습 업체가 첫 직장이었다. 2조 2교대로 돌아가는 수원의 한 자동차 부품 공장에서 실습을 시작했다. 학교에서 추천을 해준 곳이었다. 졸업 후에도 이곳에서 근무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파이프 업체 등 작은 업체에 1~2년씩 다니다가 그만두는 일을 반복했다.

첫 직장부터 옮긴 회사들은 하나같이 열악하고 위험했다. 2019년 6월에는 숨지기 전까지 일했던 직장에서 컨베이어 벨트에 손이 말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손목이 부러지고, 옆구리 뼈에 금이 갔다. 병원에서 회복할 틈도 없이 회사로 출근했다. 회사는 “산재 처리를 하면 감사가 나올 수 있으니 공상 처리를 해 달라”고 매달렸다. 근처 다른 작업장에서 비슷한 인명 사고가 나 떠들썩하던 때였다. 그렇게 회사에서 치료비만 받고 깁스한 채 출근했다.

추락사고가 있었던 지난달 18일은 출근길 공기가 유달리 차가웠다. 올해 처음 포항에 찾아온 한파였다. 회사에선 어김없이 지붕 환풍기를 교체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안전모를 쓰고 안전띠를 챙겨 지붕으로 올라가는데 동료들로부터 “참 유별나다”는 농담이 날아왔다.


형제에게 되풀이된 비극

그날 지붕에 올라갔던 함씨는 오전 9시24분쯤 공장 바닥으로 떨어졌다. 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생성된 암모니아 탓에 심하게 부식된 채광창을 밟은 게 실수였다. “아프다, 아프다”는 말을 반복하던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다시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사고 현장에는 마지막 구명줄인 안전 로프만 덩그러니 놓였다. 지붕 어디에도 안전 로프를 연결할 설비는 보이지 않았다. 작업 발판과 안전망 등 추락 방지 장비도 없었다. 이번 사고를 조사 중인 고용노동부 포항지청은 A업체의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조치 의무 위반 혐의를 확인하고 책임자를 입건할 방침이다.

함씨 친형은 동생의 비극이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동생과 마찬가지로 특성화고교를 졸업한 뒤 2019년 12월 일터에서 왼손 중지 한 마디가 절단되는 산업재해를 입었다. 무거운 기계 부품이 손으로 떨어지면서 일어난 사고였다. 그는 “특성화고에서는 한 학년에 두세 명 정도가 졸업 후 괜찮은 기업에 근무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친구들 역시 특성화고를 졸업한 뒤 2차 하청업체나 중소기업, 영세업체로 향한다는 것이다. 함씨의 친형은 “고등학교 실습 이후 한번도 쉬지 않고 일만 했던 동생”이라며 “‘누가 사고를 당해봐야 안다’던 동생이 비극의 당사자가 됐다”며 울먹였다.

김유나 이형민 기자 spring@kmib.co.kr

[고졸 노동자, 그 서러운 이름]
▶②-1“방송 출연해 대기업 갔지만… 공장·식당 돌다 지금은 라이더”
▶②-2노원 특성화고 서영씨, 몇년을 일해도 알바인생 막막
▶③고무장갑 손, 기름에 넣고 탕수육 튀긴 고졸 태윤이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17365&code=11131800&sid1=soc&stg=vw_rel&fbclid=IwAR1pQTjb19_khb3E8frNpPmjLKwZcftZmx0tDC2zsEUJNz-Wqhm3MQwy7I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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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국
37 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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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이후 우리 노동시장구조의 중요한 변화 중의 하나는 숙련형성체제(skill formation regime)의 변동이다. 87년 이전 우리나라의 숙련형성체제는 일본의 분절적(segmentalist) 숙련형성체제에 가까웠다. Busemeyer에 따르면, 분절적 숙련형성체제란 교육내용에 있어 인문계고와 직업계고의 크지 않은 차이, 채용시 인문계고와 직업계고의 비차별, 채용 이후 OJT에 의한 숙련형성, 숙련형성의 도구로서의 직무순환, 숙련형성에 대한 보상으로서의 내부노동시장에서의 승진 등의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러나 87년 이후 급격한 임금인상과 고임금화는 이루어졌지만, 고임금에 어울리는  효율적 숙련형성체제의 구축에 실패함으로써 자동차산업의 대기업에서부터 KT와 같은 IT 기업에 이르기까지 민간 대기업의 다수는 더 이상 현장직들을 채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직업계고 출신들도 직무능력을 갖추어야만 비로소 일부라도 대기업에 취업할 수 있게 된 것. 직업계고의 취업률이 급격히 하락하자 정부는 마이스터 고교 제도를 도입. 이때부터 이질적인 요소들이 기존의 숙련형성체제 속에 도입되기 시작. NCS를 통한 직업교육의 표준화 시도, 독일의 듀얼 시스템을 약간 모방한 산학일체형 도제학교, 일학습병행제 등. 그러나 노사정이 참여하여 표준화된 직업훈련제도를 만들고 전국적으로 통용성 있는 자격제도를 운용하는 집합주의적 숙련형성체제의 요소들을 도입한다고 해서 그들과 전혀 다른 맥락속에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는 것. 
2020년도 직업계고인 특성화고의 취업률은 27.7%(취업 어려워 대학에 진학한 학생 및 군입대자를 분모에 포함). 전공을 찾아서 취업한 학생의 비율은 더 떨어질 것. 전교 학생 중 최상위층 소수만 공기업이나 민간대기업에 취업할 뿐, 다수는 이제 실업자가 되거나 중소기업 저임금노동력의 공급원이 되거나 비정규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된 것. 
87년 여름의 이른바 ‘노동자대투쟁’시 대기업의 투쟁을 이끈 주역은 주로 직업계고 출신들. 이들은 십수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자신들이 일하는 사업장을 고임금 사업장으로 만들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대기업 노조운동의 리더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자식들을 직업고에 보내지 않았고 대학에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사업장의 숙련형성체제를 효율적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그들이 원한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고교 후배들에게 오늘날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세상을 선물로 안겨준 데 기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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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출연해 대기업 갔지만… 공장·식당 돌다 지금은 라이더”
[고졸 노동자, 그 서러운 이름] ② 졸업 후 기다리는 건 알바 세상
입력 : 2021-11-10
사진은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권현구 기자
충남 공주의 한 특성화고 식품가공과를 나온 김준영(가명·26)씨는 스무 살이 되던 2014년 상경했다. 고교 3학년이던 2013년 특성화고 학생과 중견기업을 연결해주는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기업 계열사 취업에 성공한 것이 계기가 됐다.

주변 친구들은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회사에 들어간 김씨를 부러워했다. 한부모가정 출신으로 어린 동생까지 돌봐야 했던 그는 희망을 안고 서울 본사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월급은 200만원이 채 되지 않았고 잔업에 고된 일까지 도맡아야 했지만 미래가 있다고 믿었다. 회사는 “지금은 나이가 어려서 그렇지만, 군대에 다녀오면 경력을 인정해 월급도 200만원대 중반으로 올려주고 승진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계약서는 따로 쓰지 않았다. 김씨는 구두 약속을 믿고 입대 전까지 2년 동안 묵묵히 일만 했다.

그런데 전역 후 복귀한 회사에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간 회사 대표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박봉은 그대로였다. 서울에서 생활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결국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2018년 귀향을 택했다. 그는 9일 “무엇보다 또래 대졸 신입사원과의 처우가 너무 크게 난다는 현실에 박탈감이 커졌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공주로 돌아온 후에는 휴대전화 액정 제조 공장에서 3교대로 일했다. 1주일에도 몇 명씩 그만두는 사람이 나오는 험한 일터였다. 그때마다 부품을 갈아 끼우듯 빈자리는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김씨는 그 무렵 고교 시절 요리사가 되겠다며 어렵게 땄던 한식 자격증이 떠올랐다고 한다. 결국 3개월 만에 공장을 나왔다.

이후 김씨는 대학가 주변 작은 일식집에 취직했다. 하루 근무 시간은 14시간에 달했지만 손에 쥐는 월급은 160만원이었다. 최저임금에 한참 못 미쳤고, 근로계약서도 없었다. 급여를 올려줄 수 있냐는 그의 요청에 사장은 “대학도 안 나온 네가 어디 가서 일을 배우고 할 수 있겠냐”며 무시했다. 1년3개월 만에 다시 일을 그만뒀다.

김씨 친구들도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특정 분야 인재와 전문 직업인을 양성한다’는 특성화고 취지와는 거리가 먼 일을 한다. 특성화고 축산과를 나온 친구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유통과를 나온 친구는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제빵사로, 식품과를 나온 친구는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중이다. 원예과를 나온 뒤 일자리를 못 구해 전문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동창도 마찬가지다. 그 친구는 현재 주유소에서 일한다. 김씨도 지난달부터 배달 라이더 일을 시작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17517&code=11131100&sid1=soc&stg=vw_r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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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 특성화고 서영씨, 몇년을 일해도 알바인생 막막

[고졸 노동자, 그 서러운 이름] ② 졸업 후 기다리는 건 알바 세상
입력 : 2021-11-10 00:02



특성화고(직업계고) 학생들은 졸업 전 현장실습을 통해 접하는 첫 일터에서 최저임금을 받는다. 교육부의 ‘2021학년도 직업계고 현장실습 운영 매뉴얼’에 따르면 업체는 최저임금의 70% 수준(올해 기준 시간당 7400원) 이상을 부담하고, 나머지 30%에 해당하는 금액은 국고로 보전해준다. 업체가 70% ‘이상’을 부담하게 돼 있지만, 학생들에게 그 이상을 지급하는 업체는 찾기 어렵다.

첫 일터에서 ‘도매금 노동력’ 취급을 당한 특성화고 학생들은 교복을 벗은 뒤에도 비슷한 처우의 일자리를 전전했다고 입을 모은다. 첫발을 디딘 곳에서 벗어나려 애를 써도 결국은 제자리를 맴돌고 있더라는 것이다.


졸업 후 안정적 일자리 꿈꿨지만

서울 노원구의 한 특성화고를 졸업한 이서영(가명·27)씨는 지난 9월 직장인 경기도 한 물류센터에서 10~15㎏ 정도 되는 물품들을 연달아 옮기다 허리를 다쳤다. 팀원은 4~5명밖에 안 되는데 매일 날라야 하는 물품은 200개에 달했다. 지게차가 옮겨야 할 짐을 급한 대로 작업자들이 옮기다 다친 것이다.

이씨의 학창 시절 꿈은 물류센터 직원이 아니었다. 지체장애를 가진 부모님 대신 어린 나이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그는 특성화고 진학을 결정했다. 특성화고에서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고, 원하는 분야의 일자리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이씨는 의료디자인과 전공을 택했다.

그런데 이씨가 정작 고교 3년간 배운 것은 포토샵 등 기본 디자인 프로그램이 전부였다고 한다. 의료기기 관련 일을 하기 위해 병원 코디네이터라는 민간 자격증도 의욕을 갖고 땄다. 하지만 그가 취업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의료기기 업체는 없었다. 해당 과는 사라졌고, 이씨는 취업반 대신 진학반을 택했다.

졸업 후엔 이모의 권유로 1년 동안 공부해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땄지만 바로 취업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는 패밀리 레스토랑 주방 보조, 동물병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버텼다. 그러다 2015년 서울 중랑구에 있는 한 소아청소년과에 처음으로 취업했다. 고졸 학력에 경력이 없던 이씨가 받을 수 있는 돈은 최저임금에 월 10만원의 식비를 얹은 금액이었다. 수습 기간인 3개월 동안은 이마저도 전액 지급되지 않았다. 자신에게 날아드는 무시와 막말도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7개월 만에 일을 그만뒀다.



이씨에게 놓인 선택지는 단기 일자리뿐이었다. 2016년 이씨는 온라인 쇼핑업체 콜센터에 취직했다. 술에 취해 전화를 거는 고객들, 전화로 성희롱을 일삼는 이들에게 1년여간 시달리다 대인기피증과 우울증을 얻고 회사를 나왔다.

다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아 전전하자니 내일이 막막했다. 고교 시절 배운 디자인 분야의 일을 찾아보려 학원을 통해 정부지원 취업성공패키지를 신청했다. 정부가 연결해주는 일자리였는데도 고졸을 뽑는 디자인업체는 없었다. 학원에서 소개해 준 일자리는 콜센터, 보험회사 임시직 뿐이었다. 그렇게 물류센터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이씨는 “장애인 부모님과 살면서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였던 내겐 공부할 기회가 많지 않았고, 그래서 선택한 특성화고를 나온 뒤에는 취업도 제대로 못 한 채 암울하게 살고 있다”며 “이도 저도 아닌 인생을 사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지난해 12월 펴낸 청년노동 보고서에 따르면 특성화고 졸업생은 이씨처럼 여러 일자리를 떠돌았다. 72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졸업 후 이직 경험’을 묻는 말에 응답자의 55%가 1회 이상 이직했다고 답했다. 이직하지 않은 경우는 29%였다. 이직 횟수는 1회 17%, 2회 13%로 나타났고 3회 이상 일자리를 옮겼다고 답한 경우도 25%에 달했다. 그만큼 일자리의 질이 좋지 않다는 의미다.


꿈 찾아 떠나도 결국 제자리

지난 9월 27일 인천 송도의 한 아파트 외벽을 청소하다 15층 높이에서 추락사한 차모(29)씨는 그토록 벗어나려 했던 현실로 돌아왔다가 참변을 당했다. 부산의 한 특성화고를 졸업한 그가 다시 줄 하나에 매달리는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건 생계가 막막했기 때문이다.

지인 등에 따르면 차씨는 지난해 바로 옆에서 줄을 잡고 일하던 동료 외벽 청소 노동자가 추락해 숨지는 사고를 직접 목격했다. 충격과 죄책감에 빠졌던 차씨는 용역 업체 측에 안전 관리 부실을 지적했지만 업체는 무시했고 그 과정에서 관계가 틀어지면서 일을 그만뒀다고 한다. 이후 차씨는 프리랜서 모델 일 등을 하며 생활했지만 안정적 수입을 얻지는 못했다. 차씨 친구는 국민일보와 만나 “4살짜리 아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가장인 그가 오래 일을 쉴 수 없다고 했다”며 “생계 때문에 위험한 외벽 청소 현장으로 다시 돌아갔던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가 발생한 날은 그가 현장으로 돌아간 첫날이었다.

차씨를 고용한 외벽 청소업체는 사고 사흘 전 보조용 구명 밧줄을 구비하라는 한국안전보건공단 권고를 받고도 이를 시정하지 않았다. 차씨는 구명 밧줄 없이 작업용 밧줄 하나에만 의지해 유리창을 닦다 추락했다. 인천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달 20일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해당 업체 안전관리팀장 A씨(37)를 불구속 입건했다. 홍성관 특성화고교노조 충남지부 준비위원장은 “특성화고 학생들은 현장 실습부터 낮은 임금에 열악한 근로 환경에 노출되다 보니 ‘안정적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다’라는 걸 직감한다”며 “전공을 살리기는커녕 계속 단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거나 구직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말했다.

이형민 신용일 기자 gilels@kmib.co.kr

[고졸 노동자, 그 서러운 이름]
▶①“이러다 죽어요”라던 고졸 노동자, 11m 아래로 떨어졌다
▶②-1“방송 출연해 대기업 갔지만… 공장·식당 돌다 지금은 라이더”
▶③고무장갑 손, 기름에 넣고 탕수육 튀긴 고졸 태윤이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17523&code=11131100&sid1=soc&stg=vw_r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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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장갑 손, 기름에 넣고 탕수육 튀긴 고교생 태준이
<고졸 노동자, 그 서러운 이름> ③ 일자리 보장 받으려 위험 노동

입력 : 2021-11-11 00:03/수정 : 2021-11-11 00:03

한 학교 급식실에서 조리원들이 뜨거운 솥을 씻고 있다. 특성화고(직업계고)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졸업 전 급식실을 포함해 전공 분야 현장실습을 나간다. 취업할 곳의 직무와 문화를 미리 경험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위험에 별다른 대비 없이 노출되는 경우도 많다. 전국특성화고 노조 제공
특성화고교(직업계고교) 재학생들은 졸업 전 전공 분야 현장실습을 나간다. 해당 분야에 대한 실무 역량을 갖춰 취업 역량을 높인다는 취지다. 취업 연계형 실습이 대부분으로 취업할 업체의 직무와 기업 문화를 미리 경험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현장실습이 본래 취지와 거리가 있는 경우도 많았다. 국민일보가 만난 여러 학생은 어른들이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작업 현장의 위험을 몸으로 겪으며 알아가고 있었다. 어른들의 지시를 쉽게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어린 노동자들은 위험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다고 한다.


일도 위험도 홀로 부딪쳤다

경북 지역 한 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는 박태준(가명·18)군은 10일 “하루빨리 일에 노련해지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노련함’이란 ‘급식실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위험에서 하루빨리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일한 지 두 달도 안 된 박군의 손에는 뜨거운 기름에 데어 남은 흉터가 선명했다.

박군은 2019년 경북 지역 한 조리 특성화고에 진학했다. 그에게 특성화고 진학은 “꿈을 찾고, 미래를 그리고 싶던 순간”이었다. 졸업 후 유명 음식점 셰프가 되겠다는 꿈에 닿기 위해 더 부지런히 움직였다. 입학 후 한식 양식 중식 일식 자격증을 모두 땄고, 제과제빵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박군은 “취업 선택지가 많아질 것 같아 온갖 자격증을 다 따놨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3학년 2학기가 된 지난 9월 선생님은 박군에게 현장실습처로 학교 급식실을 제안했다. 박군은 막연히 ‘선생님이 좋은 곳이니 추천해주셨겠지’라고 생각했다. 친구들이 하나둘 취업 자리를 얻어 학교를 떠나고 있던 터라 마음도 조급했다.

출근 첫날 급식실에서 다른 작업자들에게 첫인사를 건네자마자 지시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학교에선 따로 배운 적 없는 일이었다. 일단 하라는 대로 해야 했다. 작업 방법을 구체적으로 일러주는 사람도 없었다. 다른 작업자가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볼 수밖에 없었다. 재료를 나르고 자르고 튀기고 익혔다. 물 마실 틈도 없이 첫날 일이 끝났다.

학교에서 배우고 익힌 것과 달리 급식실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업무가 많았다. 박군을 포함해 7명이 매일 700명이 먹을 점심을 준비했다. 1인당 100인분을 담당하는 셈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식사 인원을 분산하면서 배식 시간도 당겨졌다. 오전 7시50분에 출근한 뒤 정신없이 11시20분까지 조리를 완료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1, 2인분만 만들었던 터라 당황스러웠지만 그만둘 순 없었다. 기약 없는 취업 자리를 기다리는 것보다 일을 하고 있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조리원들이 조리대 위에 올라가 청소를 하고 있다. 전국특성화고 노조 제공
며칠 뒤 조리 메뉴에 ‘탕수육’이 나왔다. 단순해도 위험하지 않은 일을 한다고 여겼던 박군은 탕수육을 조리하며 위험을 가까이 느꼈다. 그가 학교에서 배운 탕수육 조리 방법은 튀김 옷을 입힌 고기가 달라붙지 않도록 시차를 두고 튀겨 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700인분을 단시간에 조리해야 하는 현장에서는 학교에서 배운 조리법이 적용되지 않았다.

“빨리 빨리.” 작업 중에도 재촉하는 지시가 끊임없이 들렸다. 조금씩 넣고 튀길 시간이 없었다. 일단 고기를 빠르게 기름에 넣었더니 그 안에서 다시 뭉쳤다. 도구를 활용할 줄도, 어디에 있는 줄도 몰랐다. 주변에서 알려준 건 “고기는 흔들어야 떨어진다”가 다였다.

고무장갑을 낀 채 손을 그대로 기름에 넣어 하나씩 떼어냈다.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열기에 깜짝 놀랐지만 다른 방법을 찾을 시간이 없었다. 손을 펄펄 끓는 기름에 넣은 덕에 시간 내에 탕수육을 완성할 수 있었지만 그때 이후 손에선 커다란 물집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질 만하면 어김없이 튀김 메뉴가 등장했다. 박군은 “아무도 현장에서 지적을 하지 않아서 이런 방식이 위험하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말했다.


‘위험’이 당연한 줄 아는 아이들

‘몸으로 배우는 위험’은 특성화고 재학생들의 공통 경험이다. 경기도 한 의류회사에서 현장실습 중인 김주민(가명·18)양도 마찬가지다. 실밥을 뜯고 원단에 사이즈를 체크해두는 일을 주로 해왔는데, 어느 날 공업용 스팀다리미가 김양 앞에 놓였다. 지시는 “빨리 다려주세요”뿐이었다. 학교에서도 공업용 스팀다리미는 배운 적이 없었다. 바쁜 작업자들 틈에서 사용방법을 물을 수 없었던 김양은 옆 작업자가 하는 대로 따라했다. 장갑도 끼지 않은 김양의 손에는 새빨간 화상 자국이 남았다.

교육 당국도 현장실습의 순기능은 가져가면서 학생들이 겪는 문제점은 지속적으로 들여다본다는 입장이다.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직업계고 현장실습 권익침해(의심) 지도점검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19년 4만5727건이던 지도점검 건수는 2020년 5만576건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 중 확인된 피해는 부당대우 9건, 성희롱 5건, 실습시간 초과 5건, 유해위험업무 4건뿐이었다. 최서현 특성화고교노조 위원장은 “학생들은 안전이나 노동 인권과 관련해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로 실습에 나서기 때문에 자신의 근로상태가 위험한지, 부당한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군은 “사회는 원래 다 위험하고 힘든 것 아니냐”며 “적응을 하다 보면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규직인 ‘조리공무원’이 되기 위해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현장실습이 끝나면 무기계약직인 조리공무직으로 일하지만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그는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여기라도 취업한 게 어디냐”고 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17747&code=11131100&sid1=soc&stg=vw_r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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