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March 12, 2022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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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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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주요 정당
과거
초기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6~1958)
대한국민당 (1949~1958)
자유당 (1951~1970)
군정기
~
3당 합당
이전
민주공화당 (1963~1980)
유신정우회 (1973~1980)
민주정의당 (1981~1990)
통일민주당 (1987~1990)[1]
신민주공화당 (1987~1990)
3당 합당
이후
민주자유당 (1990~1995)
자유민주연합 (1995~2006)
신한국당 (1995~1997)
한나라당 (1997~2012)
자유선진당 (2008~2012)
새누리당 (2012~2017)
바른정당 (2017~2018)
자유한국당 (2017~2020)
미래통합당 (2020)
국민의힘 (2020~)
이승만 정부 (1948~1960)
박정희 정부 (1963~1979)
전두환 정부 (1980~1988)
노태우 정부 (1988~1993)
문민정부(김영삼) (1993~1998)
이명박 정부 (2008~2013)
박근혜 정부 (2013~2017)
윤석열 정부 (2022~2027)
이념
과거
현재

의석
110석[17] / 300석 (36.7%)
1. 개요
1.1. 현 상황1.2. 현대 한국 보수주의 이념 기원 논란1.3. 현대 한국 보수주의 이념의 역사
28.15 광복 이후 ~ 제2공화국35.16 군사정변 이후 ~ 3당 합당43당 합당 이후
4.1. 당색4.2. 역사4.3. 소속 정치인
4.3.1. 대통령4.3.2. 국회의원
4.3.2.1. 14대 국회4.3.2.2. 15대 국회4.3.2.3. 16대 국회4.3.2.4. 17대 국회4.3.2.5. 18대 국회4.3.2.6. 19대 국회4.3.2.7. 20대 국회4.3.2.8. 21대 국회
4.3.3. 민선 광역자치단체장
4.3.3.1. 서울특별시장4.3.3.2. 부산광역시장4.3.3.3. 대구광역시장4.3.3.4. 인천광역시장4.3.3.5. 대전광역시장4.3.3.6. 울산광역시장4.3.3.7. 세종특별자치시장4.3.3.8. 경기도지사4.3.3.9. 강원도지사4.3.3.10. 충청북도지사4.3.3.11. 충청남도지사4.3.3.12. 경상북도지사4.3.3.13. 경상남도지사4.3.3.14. 제주특별자치도지사
4.3.4. 당대표
4.4. 역대 선거 결과
4.4.1. 대통령 선거4.4.2. 국회의원 선거4.4.3. 지방선거
5. 기타 보수주의 정당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보수주의를 표방했던 제도권 정당을 다룬다.[18] 다만, 보수주의를 표방했던 정당이라도 민주당계 정당이나 세속주의적이지 않은 종교정당[19], 범민족주의 정당, 반동주의 및 정치극단주의 정당들은 다루지 않는다.

협의의 기독교 우파 정당은 대한민국의 종교정당, 범민족주의 정당이나 반동주의 및 정치극단주의 정당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극우정당 문서 참조.

민주당계 정당과 함께 대한민국 국회의 거대 양당을 차지해온 국민의힘 계열 정당들[20] 역시 여기에 속한다.

1.1. 현 상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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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기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계파 역사 파란색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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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현대 한국 보수주의 이념 기원 논란[편집]

1945년 광복 이후의 초기정당 시대 혼란상으로 인해서 학술적으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보수주의 이념을 따르는 정치세력들이나 시민단체 및 일반인들에 의해서 대한민국 보수정당의 시조로 여겨진다.

한국의 보수주의 이념 및 보수정당의 기원을 따지는 데 가장 큰 논란은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이 현대 한국의 보수주의 및 보수정당의 기원인지에 대한 것이다.

흔히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이 오늘날 주류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의 전신인 것처럼 착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들어가면 이승만과 자유당을 오늘날 한국 보수주의 혹은 보수정당의 시조로 보기는 어렵다. 이승만은 하야 이후 정치적 영향력을 완전히 잃었고, 자유당도 1960년대부터 군소정당으로 쪼그라들어 아무런 직접적 후신을 남기지 못한 채 1970년에 해산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민의힘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계보에 속하는데, 자유당을 비롯한 정부수립 초기 정당들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 국민의힘은 이승만 대통령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계승을 표방하고 있는 만큼 역사적인 전신은 아니어도 정신적인 전신은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한편 민주자유당의 뿌리 중 하나인 신민주공화당은 민주공화당에 대한 계승을 표방하는 정당이었는데, 이 민주공화당이 창당할 때 자유당 출신 인사들의 일부가 개별적으로 참여했으므로 자유당을 국민의힘 계보 정당으로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민주당(1955년) 출신 인사들 중에도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한 이들이 있었고, 또 자유당 출신으로 민정당국민의당(1963년) 등 민주당계 정당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다는 점에서, 자유당과 민주공화당과의 관계가 특별히 밀접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무엇보다 당시 박정희와 민주공화당은 자유당도 민주당도 구시대 정치 세력으로 몰아 배격했으며, 지지 기반도 자유당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심용환 성공회대 교수 등은 자유당은 이승만 정권 이후 완전히 소멸한 것이고, 민주공화당은 새로운 세력이라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당의 계보적인 측면이 아니라 한국의 현대 보수주의 이념의 기원을 따진다면 자유당을 기원으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과 다르게 보수 정당 지지층은 역사적으로 계보적인 의미에서 지지 정당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이념과 정치적 성향에 따라서 지지 정당을 선택해온 바 있으므로, 자유당과 민주공화당 사이에 전신, 후신 관계 여부와 별개로 자유당이 자신들의 기원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유당과 민주공화당의 지지 기반은 같지 않았다. 오히려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이승만에 반대되는 진보성향의 조봉암의 지지 기반과 더 비슷했다는 분석도 있다. # 즉 후대의 역사적 변천으로 인해 보수 지지층이 이승만과 박정희를 둘 다 지지하게 됐다는 것이고, 정작 그때 당시에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이 이승만의 자유당의 지지 기반을 계승했던 건 아니다.

최초의 근대적 민주공화국 중 하나인 미국의 경우에는 1960년대까지 자유주의자 존 로크의 영향을 받아서 18세기 건국의 아버지들의 이념이 자유주의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것은 루이스 하츠(Louis Hartz)의 미국의 자유주의 전통(The Liberal Tradition in America, 1955)에서도 잘 드러난다. 또 칼 벡커(Carl Becker)는 토머스 제퍼슨이 존 로크의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부터 ‘공화주의적 수정론자’로 불리는 여러 학자들이 18세기의 영국과 미국의 정치사상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정설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들에 의해서 공화주의 이념이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미국의 건국기 이념이 자유주의였는가 공화주의였는가를 놓고서 1980년대 후반까지 수십년간 논쟁이 벌어져왔다. 이후 미국 보수주의의 뿌리이자 미국 건국기의 이념은 자유주의나 공화주의 특정 한 이념이 아니라 청교도 윤리 등을 포괄하여서 영향을 받았다는 다원주의적 관점이 주류가 되었다. 이런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획일적인 대한민국 현대 보수주의에 대한 사관보다는 좀 더 풍부한 내용으로 늘어나고 이것이 대중에게 피드백 될 필요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학계에서는 다양한 시각을 가지는데 가장 멀리 내다보는 시각은 이승만 대통령이 개화파였고 자유민권운동과 구국계몽운동을 주장한 독립협회 소속의 급진적인 성향의 청년이었다는 점을 들어서 개화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21] 특히 이들은 개화사상이었던 자유주의민주주의공화주의에 주목한다. 1870〜1890년대 집권세력이었던 사대수구당과 대립하던 개화독립당은 문명개화(文明開化)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도모한, 당시로서는 진보세력이었다.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이 개화파 1세대라면,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2세대이다. 1세대의 대표이면서 개화파의 비조(鼻祖)인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교육받은 2세대 인물들은 실패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며 개화당이라고도 불린다. 이승만안창호양기탁 등은 개화파 3세대이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이 시기 배재학당 익힌 사상을 가지고 광복 후 첫번째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을 보수주의 이념의 시조로 여기는 것이다.

1919년 3.1 운동 이후 군주제적인 임시정부가 아니라 공화제적인 임시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마지막 주석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1948년 8월 15일까지 임정이 유지되었다는 점을 들어서 임정을 보수주의의 뿌리로 보기도 한다. 당시 제헌 헌법의 전문에는 1919년 독립선언으로 성립된 임시정부에 민주공화제 정부의 기원과 한국 통치 권력의 정당성이 있음을 명문화했다. 사실 이런 임정에 대한 계승의식은 1948 건국론을 내세운 뉴라이트의 등장 이전까지 원래 보수세력들의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이런 시각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보수세력들은 대한민국은 민족주의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했고 이런 대한민국은 1948년 9월 9일 만들어진 사회주의적인 북한에 비해서 훨씬 뿌리가 깊고 정통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외에 위에서 나왔다시피 지주, 자본가들을 대변하고 이익을 옹호하기 위해서 농지개혁에 반발했던 유산계급의 정당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보수주의의 반동주의적 관점에서 민주당계 정당의 기원인 한국민주당을 조명한 경우도 있다. 다만 아시아권에서는 일본에서 1800년대 후반 conservatives를 오역한 탓에 수구와 보수를 분리하고 전자이기를 꺼리기 때문에 그다지 지지받는 관점은 아니다. 그러나 서구권과 주류 정치학계에서는 이러한 반동주의도 보수주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1.3. 현대 한국 보수주의 이념의 역사[편집]

한국의 현대 보수주의 이념의 특징은 개화기, 구한말 시기의 일본으로부터 온 잘못된 번역어 탓에 반동주의를 배격하는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22] 광복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수라는 단어가 들어간 정당명이 잘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시각이 있다.[23]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노동자와 농민의 대변자로, 민주당계 정당을 자본가와 지주계급의 정당으로 규정하며 통일노농당이라는 얼핏 급진 좌파스러운 당명을 쓰려 했었는데, 앞의 시각을 가진 이들은 당시 보수 이미지가 기피의 대상이었다는 반증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자유당으로 바꾸기는 했지만 자유라는 단어도 근대 서구 정치의 맥락에 따르면 보수주의보다는 진보주의였다. 지금 민주당계 정당들이 본인들의 정치적 이념을 암묵적으로 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던 보수라는 단어가 유의미하게 통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이다. 신상초는 1957년 “우리나라 정계나 언론계에서 보수와 진보를 구별하여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 3년 전부터”였다고 회고했다. 1954~55년 사사오입 개헌 이후 신당운동이 진행되면서
당의 이념과 정책, 결집할 정치세력의 범위를 놓고 보수세력, 진보세력이란 말이 생겼다. 그 이전까지는 여당·야당을 주로 사용하다가 신당 운동 이후부터 조봉암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진보, 자유당과 민주당은 보수로 규정되었다. 조봉암은 「내가 본 내외정국」(1955)에서 민주국민당의 몇 논객이 “진보적이니 혁신적이니 하는 것은 모두 다 사회주의에 통하는 것”이라는 구실로 자신을 배제했다고 비판했다.

한편 5.16 군사정변 이후 집권한 박정희는 빈농 출신으로서 기존의 정치세력들을 수구로 규정하고 그들과 다른 진보적인 정치적 포지션을 일정 부분 취했다. 이것 때문에 박정희는 진보당의 조봉암 성향의 진보적인 지지층을 얻었고, 여순 사건 등 용공론의 피해를 입었던 영호남에서 막강한 지지를 얻었다.[24]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보가 무조건적으로 좋은 이미지였던 것은 아니다. 6.25 전쟁을 계기로 해서 좌파 세력이 정리 된 이후 남아있던 사민주의, 민주적 사회주의 계열의 중도좌파들은 진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1956년 진보당 사건을 계기로 해서 조봉암이 사형되고 진보당이 해체되면서 진보라는 용어도 부정적인 이미지를 얻었다. 사실 그보다 훨씬 전인 1952년 제2대 대선에 조봉암이 출마했을 때부터 색깔론 공격을 당하는 등 #, 대한민국에서 진보 좌익 세력은 언제나 부정적인 이미지에 시달려야 했다.

권용립에 따르자면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는 보수의 정치적 대척 이념인 진보가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에 보수는 주로 일상 담론에서 봉건, 완고, 고루와 같은 퇴영적 함의만 축적해 왔다고 하였다. 한국에 정치적으로 보수주의 이념이 부상하기 시작한건 1980년대부터다.[25] 그 이전까지 진보는 관념으로만, 보수는 집단으로서만 존재해왔다고 평가되었으나 80년대의 일련의 사건으로 진보는 집단을 갖게 되고 보수도 이념의 체계화를 시도했다. 당시의 활발한 보혁 논쟁은 그러한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이렇게 민주-반민주 구도가 보혁구도로 바뀌었다. 그런 경향은 구 공산권의 붕괴로 더욱 심화되었으며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혁신계는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2004년이 되어서야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하며 진보세력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한편 1987년 민주화를 계기로
기존 집권세력이 권위주의 통치로 사회변화를 막을 수 없게 되어버리자 민간에서는 보수주의 이념의 수호를 위한 사람들과 단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보수가 세력화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제6공화국 이후 연성화된 보수여권을 무능하다고 비판했으며 보수야당들에 대해서는 부패하거나 위험하다고 하거나 색깔론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제한적이었는데 이런 보수주의가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계속해서 한국 보수주의 이념의 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였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개괄적인 학습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 정치권은 자유보수주의 성향의 보수계파들이 권위주의 세력들을 밀어내면서 두 세력간의 다툼이 원조 보수 논쟁이 일어났으며 1997년 IMF 경제위기를 기점으로 자유보수주의 계파들이 서서히 쇠퇴하고 권위주의 세력들이 다시 득세하기도 했다. 이 시기 특징적인 것은 탈냉전의 영향에 따라서 대북 강경론에 따라서 보수와 수구가 분화되어갔고 서구 보수주의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보수의 개념을 복권시키는 작업도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을 맞고 기존 권위주의 성향의 세력들이 크게 몰락한 상황에서 2000년대 중반부터 쇄신의 일환으로 적극적으로 신보수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면서 1970년대 등장한 글로벌화를 옹호하는 영미식 보수주의를 전범으로 신자유주의를 학습하며 경제적 자유주의를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와 2010년 일련의 무상복지 사건으로 인해서 사회의 분위기가 진보적으로 흘러가자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은 두가지의 방향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한 부류는 정통 보수를 부르짖으며 우경화하면서 1990년도 때처럼 다시금 보수대연합을 통해서 위기를 극복하자고 외쳤으며 다른 부류는 개혁 보수를 부르짖으며 대안이념을 수용하면서 중도화해서 외연을 확장해 위기를 극복해야한다고 외쳤다.

2010년대는 대체적으로 전자 성향의 계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특히 이 계파의 인물인 박근혜가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이겨버리는 기적을 만들어내자 후자는 약화되었고 보수는 계속 우경화되었다. 또 후자 중에서는 이념적 대전환을 이뤄낸 영국 보수당을 본받아야한다며 이념적으로 유연한 보수가 될 것을 주문하며 지나치게 자유주의, 개인주의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흘러간 것에 대한 반성으로 공동체를 말하며 신공화주의를 외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17년 박근혜가 탄핵당하면서 1990년도 보수세력들이 대연합을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 붕괴되자 보수는 아노미 상태에 빠졌다. 전세계에 유행한 대안 우파와 극우세력을 본받아 끊임없는 우경화와 극단화로 인해서 제도권 보수정당은 물론 민간의 보수진영 인사들도 극우라는 소리를 들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보수주의 이념은 2020년 총선 참패를 계기로 해서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다. 이로 인해 한국의 보수 진영은 영국 보수당 모델, 독일 기민련/기사련 모델의 독일식 보수주의 같은 유럽식 보수주의를 수용하였으며 2021년 재보궐선거를 계기로 기존의 보수를 혁신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수면 아래에서 논의만 이어지던 청년층 중심의 다양한 보수주의가 천천히 부상하고 있는 중이다.

2. 8.15 광복 이후 ~ 제2공화국[편집]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이전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민주당계 정당과 대립한 주류 정당은 자유당으로 대표되는 친이승만 성향 정당들이었다.

2.1. 역사[편집]

광복 초기 여러 보수 정당이 난립하였으나, 시간이 지나서 소련군이 진입한 북한 지역에서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이 유력한 우익정당으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미군이 진입한 남한 지역에서는 중도좌파 성향의 여운형이 만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고 미승인국인 조선인민공화국을 건국했으나 사실상 우익을 배제한 좌익만의 정부였기 때문에 남한의 유력한 우익정당이었던 한국민주당을 중심으로 반발이 일어났다.

그래서 한민당은 자신들의 뒤떨어진 정치적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임정봉대론을 내세우며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익인사들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정치적 중심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미국에서 외교독립노선을 주장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박사와 광복 당시 임정을 이끌던 김구 주석이 남한 지역의 새로운 정치적 구심점이 되었다. 그렇게 1946년 이승만은 김구와 손을 잡고 같이 우익의 헤게모니를 장악해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만들어갔고 김구는 우익정당 통합운동을 추진하면서 임정 시기의 한독당을 합당을 통해서 한국독립당(1946년)으로 재편성하며 세력을 불리길 시도했다. 지금은 반대로 생각되지만 실제 이때까지 이승만은 중도우익, 김구는 강경우익으로 인식되었다.

한편 당시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적인 이슈인 신탁통치와 관련해서 논쟁이 이어지다가 남북에 각기 다른 나라에 군정통치가 이뤄진 상황에서 좌우합작운동이 일어났는데 여운형과 김규식이 여기에 참여한 상황에서 여운형이 암살당하고 민족자주연맹으로 중도세력을 재편성한 상황에서 분단이 현실화되어가자 김구가 이들과 손을 잡았다가 결정적으로 우익 내 헤게모니를 이승만에게 완전히 빼앗겨 버렸다. 좌익은 좌익대로 좌우합작을 비판했으며 우익은 우익대로 좌우합작을 비판하면서 중도는 고립되었고 중도적인 제스처를 취한 정치인들의 인기는 떨어져 몰락했다.

그렇게 우익은 이승만의 독촉을 중심으로 한민당에서 한독당까지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재정렬이 이뤄졌고 심지어 월남한 조선민주당 세력까지 분열이 일어나서 독촉에 합류할 정도였다. 그렇게 이승만의 유력한 경쟁자이자 강경우익이었던 김구는 민족유일정부를 외치며 당차원에서는 제헌 총선을 보이콧하였다. 이후 김구가 피살당하자 한독당은 완전히 몰락해서 사라졌다.

1948년 정부수립 전까지 정치적 동반자였던 이승만과 한민당은 제헌헌법부터 시작해서 서로가 지향하는 정치적인 목표의 차이로 인해서 분열되었고 농지개혁을 정점으로 정치적인 적이 되었다. 이런 한민당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승만은 여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대한국민당을 창당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한민당의 후신으로 민주국민당이 탄생하면서 정치적 경쟁자만 커졌다. 이후 1951년까지 이승만은 스스로를 초당파적 정치지도자로 규정했다. 다만 1949년 이승만은 독촉을 비롯한 자신의 정치적 지지세력들을 뭉쳐서 다시 대한국민당을 재창당해서 민주국민당을 견제하려고 했다. 이후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정치적 갈등은 수면 아래로 잠재워졌지만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대통령으로서 이승만에게 입법부 내에서 여당의 필요성은 커져만 갔다.

마침내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의 주도로 이승만의 세계관 속 양반당인 한민당계(지금의 민주당의 시초)에 대항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정당인 통일노농당을 창당하려고 하다가 반발을 얻자 자유당이라는 당명으로 창당했다. 이후 정국은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을 계기로 재편되기 시작하면서 자유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양당제로 정리되었다.[26] 그러나 자유당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퇴진한 후로 사실상 붕괴했으며, 당에 잔류한 얼마 안 되는 이들은 그 해 총선에서 궤멸하다시피 하였다. 이후 장면 내각 재임 동안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자유당은 5.16으로 군사 정부에 의해 아예 강제 해산된 뒤로도 좀처럼 재기하지 못하며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였다. 다만 상당수의 자유당 출신 인사들은 민주당계 정당이나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등에 들어가서 정치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2.1.1. 조선민주당[편집]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을 당수로 이윤영을 부당수로 소련군정기 치하의 평양에서 창당되었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했다. 해당 항목 참조.

소련군정은 다른 우파정당들의 창당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북한 내 민족주의자들, 민주주의자들을 대변하는 유일한 정당이 되었다. 사회경제적으로 보았을 땐 당원 기반은 주로 북한내의 개신교인, 중농, 소상공인이었다. 창당 3개월만에 50만 당원을 확보하였으며 당 기관지로는 주간 신문 《조선민보》를 발행했다.

한편 조선민주당이 신탁통치에 반대하자 당수인 조만식을 연금하면서 최용건이 강제로 당권을 잡고 어용정당화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부당수인 이윤영을 포함해서 많은 당내 우파 당원들이 소련군정과 북한 정권에 협조를 거부하고 월남하여 서울에서 같은 이름의 당을 창당했다. 이에 따라 조선민주당은 북쪽의 남은 조선민주당은 구색정당화되어서 조선사회민주당이 되고 남쪽의 새로운 조선민주당이 1961년 해체될 때까지 남북으로 갈라졌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조선민주당 부당수였으며 남한 내의 당수가 된 이윤영만이 서울특별시 종로구 갑 선거구에서 당선되며 1석을 얻어 원내에 진입하였다.

2.1.2. 대한독립촉성국민회[편집]

1946년 2월 8일에 창당한 범우익 포괄정당이자 정치단체이다. 흔히 부르는 약칭은 독촉이다.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출범한 사회운동단체이자 정치단체로서 창당 당시에는 이승만이 총재이고 김구가 부총재였다. 이후 김구는 미군정의 의도 하에 좌우합작을 추진하는 남북협상파가 되면서 떨어져 나갔고 이후 사실상 이승만의 자유당 전신격으로서 제헌국회에 참여하여 이승만이 대통령에 선출되는 과정,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제헌헌법 제정 등에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해당 항목 참조.

일반적으로 제헌 총선과 2대 총선 때 친이승만 성향의 독촉 계열의 정당 및 정치단체를 포괄하는 의미다.[27]

2.1.3. 한국독립당(1946년)[편집]

실질적 전신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력 그 자체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1940년 5월 8일 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이 합당해서 창당된 한국독립당이었다. 임시정부 시절 중화혁명당-국민당의 영향을 받아서 당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한독당의 당군이 한국 광복군의 전신이다.

그러나 광복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자 1945년 11월 국내에 당으로 공식 등록하고 활동했다. 1946년 3월 한독당은 우익정당 통합운동을 추진하였는데 한국민주당안재홍의 조선국민당, 이갑성의 신한민족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과의 연합은 실패하고 4월 18일 한국독립당·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의 3당 합당이 이루어져 한국독립당으로 합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임정 계열의 독주로 인해서 불만을 품은 국민당계와 신한민족당계는 반발했고 김규식을 비롯한 몇몇 요인들이 이탈했다.

이후로도 김구의 좌우합작운동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서 당 밖의 우익인사는 물론 당 내의 우익인사들도 반발하여서 당세가 쇠퇴하였고 김구의 암살 이후에는 거의 완전히 몰락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옹진군 당위원장이었던 오택관이 출마하여서 제도권에 진입하였다. 오택관은 이후 1949년 9월 12일 대한노농당에 합류했다가 1950년 1월 27일 대한국민당에 합류하였으며 6.25 전쟁이 터지고 납북되었다.

2.1.4. 민족자주연맹[편집]

1947년 12월 20일 만들어진 김규식을 중심으로 중도우파와 중도좌파 등 중도파들을 결집시켜서 만든 정치단체 및 정당이다. 해당 항목 참조.

1946년 좌우합작운동을 벌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1947년 7월 19일에는 여운형이 피살되자 중도세력들을 규합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이들은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내세우며 조선을 민주주의화할 뿐만 아니라 또한 민주주의를 조선화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좌우 어느 쪽으로의 편향을 배제할 것을 주장하며 미국식 자본주의도 소련식 공산주의도 베격하며 한국만의 민주주의를 강조했다.

1948년 제헌 총선에는 불참했으나 2대 총선에 참여해서 서울특별시 중구 갑에 원세훈이 당선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이 터지고 납북당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 어떻게 보면 중도보수, 개혁보수의 원조로 볼 수 있고 원조 중도주의 제3지대 정당으로도 볼 수 있다.

2.1.5. 조선공화당[편집]

김약수의 1인 중심 정당.

2.1.6. 대한국민당[편집]

1948년 11월 13일에 창당된 정당으로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제헌국회 이후로 정계개편이 이뤄지면서 여러 정치단체와 정당으로 분당이 되면서 무력화되자 이승만 대통령이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한국민주당 및 소장파 무소속 진영에 맞서 자신을 지지해 줄 여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만들게 된 정당이다. 해당 항목 참조.

그러나 1949년 2월 10일 당내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불만을 품은 신익희, 지청천 등이 한국민주당에 합류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자 힘을 잃었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후 태도를 180도로 바꾸어 정당 자체를 파당으로 규정하고 자신을 정당과는 무관한 초국민적 지도자로 규정하고자 했다. 이런 태도는 1951년 자유당이 창당될 때까지 이어졌다.

1949년 11월 12일 명목만 남은 대한국민당을 일민구락부신정회[28], 대한노농당[29], 등의 소속 국회의원들이 대한국민당을 재창당하였다. 재창당한 대한국민당은 71석으로 원내 제 1 당이 되었다. 1950년 2월 2대 총선에서 24석을 차지하였는데 이후 소속 의원들이 자유당으로 이탈함으로써 점차 야당화되었다. 명목만 남아있다가 1958년 7월 해산하였다.

2.1.7. 중앙불교위원회[편집]

박성하가 이 정당 소속으로 대구 을에 출마해서 2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종교적 보수주의 성향이 강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해당항목 참조.

2.1.8. 제헌국회의원동지회[편집]

제헌국회의원 출신인 박기운 전 의원이 3대 총선에서 충청북도 청주시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2.1.9. 자유당[편집]

1951년 스스로를 초국민적 지도자로 규정하며 정부를 이끌어오던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적인 한계를 느껴 창당한 당이다. 창당과정이 복잡한데 쉽게 말해서 이승만 대통령 산하의 여러 계파들이 내분을 겪으며 1951년 12월 17일에는 원외 자유당이 창당되었고 1951년 12월 23일에는 원내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참고로 이승만이 정식으로 인정했던 자유당은 원외 자유당이었다. 해당 항목 참조.

1951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은 광복절기념사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새 정당을 만들 의사를 밝혔다. 이후 8월 25일 이승만은 신당 조직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이 담화에서 그는 신당은 대부분이 노동자·농민 등 근로대중으로 조직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승만의 세계관, 정치관에서는 민주국민당을 필두로 하는 한국민주당계 의원들이 지주, 자본가 등 부유계층을 대표하는 정당이었으며 대통령으로서 마땅히 절대다수 노동인구를 대표하여 이들 계급정당에게서 보호해야 한다고 보았는데, 그래서 원외 자유당의 본래 이름은 자유당도 보수당도 아닌 통일노농당이었다. 이러한 당명의 시비가 결국 두개의 자유당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최종적으로 1953년 5월 30일 두개의 자유당이 하나의 자유당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퇴진한 후로 사실상 붕괴했으며, 당에 잔류한 얼마 안 되는 이들은 그 해 총선에서 궤멸하다시피 하였다.[30] 이후 장면 내각 재임 동안 힘을 발휘하지 못하던 자유당은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군사 정부에 의해 아예 강제 해산된 뒤로도 좀처럼 재기하지 못하며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973년에 출간한 대한민국 정당사 제1집에 따르면 1963년 초 자유당 출신 인사들은 몇 차례 회합을 갖고 자유당 재창당을 논의하였으나, 배종덕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 재건파, 김법린을 중심으로 한 민정당 참여파, 이활을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당 참여파,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국민의당(1963년) 참여파 등으로 나뉘어 있던 그들은 의견을 한데로 모으지 못하고 결국 재창당 논의가 무산되었다고 한다.

결국 자유당 출신 인사들 중 일부만이 모여 1963년 장택상을 당수로 자유당이 재창당 되었으나, 속칭 재건 자유당이라 불린 이들은 이후 치러진 선거들에서 단 한 번도 당선자를 내지 못해 군소 정당화 되었다. 결국 7대 대선을 1년여 앞둔 1970년 1월 24일, 재건 자유당은 재야 민주 세력을 총집결하여 국민대중의 여망에 부응하는 참신하고 강력한 단일 야당을 형성해야 한다는 유진산 당시 신민당 당수의 보수 야당 대통합 제의를 받아들여 민주당계 정당의 적통인 신민당에 흡수합당 되었다. 이에 따라 자유당의 법통은 민주당계 정당들이 이어받은 것이라는 시각도 있으나, 상술했다시피 자유당은 이미 1961년 5.16쿠데타 직후 강제해산 당한데다, 1963년 후계를 자처하는 정당들 마저 너무 여러개로 찢어져서 자유당의 단일 법통을 주장할 수 있는 정당은 없다고 봐야 한다.

1963년 자유당 출신 인사들 중 변영태 전 총리를 비롯한 일부 인사들은 정민회라는 정당을 창당하였다.

2.1.10. 노농당[편집]

한국노농당 출신이자 초대 사회부장관이며 친이승만 성향의 전진한은 1951년 12월 부산의 조선방직 쟁의를 계기로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하더니 1954년 1월 족청계 숙청을 계기로 이승만의 자유당과 완전히 결별하였다. 그리고 무소속으로 3대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55년 2월 15일 노동자·농민·소시민층을 기반으로 하여 노농당을 창당했다. 어떻게 본다면 통일노농당의 진정한 후계 정당이다. 해당 항목 참조.

전진한의 자유협동주의 이념이 당의 강령에 들어간 것이 특징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전진한의 노동운동적인 노선과 관계가 있는데 그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적인 노동운동에 맞서 협동조합운동사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적인 노동운동을 추구했다. 즉, 전진한의 자유협동주의 이념은 코포라티즘의 일종이다.

2.1.11. 헌정동지회[편집]

헌정동지회(憲政同志會)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자유당에 대한 국민의 비토 정서를 감안하여 자유당에서 탈당한 의원 42명으로 구성되었던 원내 교섭단체였다. 그러나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석의 당선자(민의원)만을 내며 소멸한 대한민국의 정당이기도 하다. 해당 항목 참조.

2.2. 소속 정치인[편집]

2.2.1. 대통령[편집]

대한민국 대통령 문장
이름
임기
선출 방법
정당
취임일
퇴임일
1
Rhee Syng-Man in...
external/static....
이승만
(1875 ~ 1965)
1
1948년 7월 24일[31]
1952년 8월 14일
1948년 대선
간선 92.3%
대한독립촉성국민회 (1948 ~ 51)
자유당 (1951 ~ 60)
2
1952년 8월 15일
1956년 8월 14일
1952년 대선
직선 74.6%
3
1956년 8월 15일
1960년 4월 26일
1956년 대선
직선 70.0%

2.2.2. 부통령[편집]

이름
임기
선출 방법
정당
취임일
퇴임일
1
external/img.nat...
external/static....
이시영
(1868 ~ 1953)
1948년 7월 24일
1951년 5월 9일
1948년 선거
간선 67.9%

2.2.3. 국회의원[편집]

2.2.4. 당 대표[편집]

자유당 심볼(백색)자유당 투명 대표
[ 펼치기 · 접기 ]








2.3. 역대 선거 결과[편집]

2.3.1. 대통령 선거[편집]

후보자
연도
대수
정당
득표수
득표율
결과
13표[32]
6.7%
2위
180표[33]
92.3%
당선
5,238,769표
74.6%
당선
5,046,437표
70.0%
당선
9,633,376표
100.0%
당선

2.3.2. 국회의원 선거[편집]

연도
국회
정당
전체 의석수
지역구
비례
결과
12 / 200
12 / 200
원내 3당
6 / 200
6 / 200
원내 4당
2 / 200
2 / 200
원내 5당
1 / 200
1 / 200
원내 6당
1 / 200
1 / 200
원내 6당
1 / 200
1 / 200
원내 9당
1 / 200
1 / 200
원내 13당
민족통일본부
1 / 200
1 / 200
원내 14당
1 / 200
1 / 200
원내 15당
55 / 200
55 / 200
원내 1당
14 / 210
14 / 210
원내 3당
10 / 210
10 / 210
원내 4당
3 / 210
3 / 210
원내 6당
1 / 210
1 / 210
원내 8당
1 / 210
1 / 210
원내 8당
대한여자국민당
1 / 210
1 / 210
원내 9당
24 / 210
24 / 210
원내 2당
3대
2 / 203
2 / 203
원내 4당
3 / 210
3 / 210
원내 3당
1 / 210
1 / 210
원내 5당
111 / 210
111 / 210
원내 1당
4대
126 / 233
126 / 233
원내 1당
초대 참의원
4 / 58
4 / 58
원내 2당
5대
2 / 233
2 / 233
원내 3당
2 / 233
2 / 233
원내 4당

3. 5.16 군사정변 이후 ~ 3당 합당[편집]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 이후부터 1990년 2월 9일 민주자유당 창당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민주당계 정당과 대립한 주류 정당은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민주정의당 등 군부 정치 세력이 주도한 정당이었다.

3.1. 역사[편집]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획득한 박정희는 민주공화당이라는 새로운 보수 정당을 세우고 민주당계 정당과 보수 양당제의 형성을 이어나갔다. 민주공화당은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여당을 지냈으며, 초반기에는 나름 높은 지지를 받았으나 한 때 6.3 항쟁과 한일협정 반대투쟁으로 큰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한일협정이 성공적으로 체결되고 월남파병도 잘 이뤄지면서 박정희는 재선에 성공하고 7대 총선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한다. 그러다 7대 총선이 6.8부정선거로 번지면서 다시 위기 국면으로 몰리지만, 이후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했고 강력한 반공주의 정책으로 계속 안정적인 권력을 유지했다.

이후 3선 개헌을 주도하면서 임기 연장을 이뤄내고 안정적인 권력을 유지했지만,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과 사법 파동, KAL빌딩 방화 사건, 의료파동, 교련반대운동, 10.2 항명 사태 등으로 다시 위기국면으로 진입했고 박정희는 간신히 3선에 성공하고 8대 총선에서도 민주공화당은 과반수 이상을 확보했지만 신민당에 15석 이상 의석을 빼앗겼다. 이에 박정희는 10월 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켰고 유신정우회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설립해서 장기집권의 태세를 갖추게 된다. 이후 포항제철 설립, 중공업 산업 정책, 지하철 건설, 중동 진출 등으로 안정적인 권력을 누리지만 2차 석유 파동 이후 다시 위기 국면으로 진입했고 YH 사건과 부마민주항쟁으로 위기국면이 심화되더니 측근들의 분열로 10.26 사태가 터지면서 박정희는 서거했고 이후 민주공화당은 전두환과 노태우의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5.17 내란을 일으키자 정국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이후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민주공화당을 비롯한 기성 정당들을 모조리 강제 해산시키고 민주정의당이라는 새로운 보수 정당을 창당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각종 유화책과 3저 호황, 서울올림픽 유치, 서울아시안게임 개최, 물가안정 등을 이뤄내며 정권을 이어나갔으나 6.29 선언으로 여당 민주정의당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그해 대선에서 민주당계 정당이 분열,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여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었고, 민주정의당은 제6공화국의 첫번째 정권을 창출하며 여당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민주화가 이뤄지고 제6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치뤄진 13대 총선에서 여당 민주정의당은 125석이라는 적은 수의 의석을 얻었으나, 이후 서울올림픽, 1기신도시, 범죄와의 전쟁 등의 호재를 이용해서 열세였던 지지율을 반전시켰고 적은 국회 의석수 또한 제2야당 통일민주당[36], 제3야당 신민주공화당[37]과 합당하여 218석의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키는 것으로 해결하였다.[38]

이 시기에 팽배했던 인식이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등 군부 정당은 독재 세력, 신민당, 신한민주당, 통일민주당 등[39] 민주당계 정당은 민주화 세력으로 서로 적이라는 인식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산업화의 역할을 자임하는 군부 독재 세력들과 민주화 세력이었던 통일민주당이 합당했던 3당 합당은 야합이라고까지 불릴만큼 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줬다.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큰 분기점이 된 사건 중 하나로 1987년 민주화로 6공화국 탄생의 의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1997년 보수정당에서 민주당계 정당으로 최초로 수평적인 정권교체가 일어날 때 새정치국민회의는 3당 합당과 비슷하게 군부 정치 세력이었던 자민련의 김종필, 박태준과 함께 DJP 연합을 하였고 이후 한국사회는 군부정치세력와 민간정치세력이 민주주의 실현을 놓고 벌이던 독재와 민주의 대결프레임에서 지금과 같은 보수와 진보의 프레임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실제로 언론들 역시 80년대 이후로 한국의 정치 체제를 보수 양당제라고 부르는 사례가 거의 사라져갔다.

3.1.1. 추풍회통한당[편집]

오재영이 1962년에 창당한 정당. 1967년 당명을 통한당으로 바꾼다. 1971년 지구당수 미달로 등록 취소되어 소멸하였다.

3.1.2. 재건당[편집]

김종필이 창당한 민주공화당의 전신이다.

3.1.3. 민주공화당[편집]

Democratic Repub...
김종필이 선행조직이었던 재건당을 해체하고 1963년 2월 26일 창당한 보수정당. 대한민국 제3공화국대한민국 제4공화국 시절 여당으로서 군인 출신 정치인들의 군부정권의 서막을 연 정당이다. 약칭은 공화당이었다. 해당 항목 참조.

지지자들은 산업화 세력이라고 부르는 군부정치세력들의 시초이다. 드골주의처럼 박정희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박정희 신드롬을 가지고 있는 박정희의 지지자들과 박정희의 정치적 후계자인 딸 박근혜를 지지하는 자들은 이 정당을 보수정당의 기원으로 여긴다. 이들 공화계는 1980년대 이후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박정희의 정치적 후계자로 여겨지던 김종필을 따라서 민주화 이후 신민주공화당으로 가거나 민주정의당으로 갔다.

3.1.4. 국민의당(1963년)[편집]

민주당계, 자유당계 및 관료 출신인 무소속계의 3파로 구성되어있는 신정당 창준위 위원장 허정과 구 족청 세력으로 알려진 민우당 창준위 고문 이범석이 민정당 대표최고위원 김병로 등과 함께 1963년 8월 1일 창당발기인대회를 열어서 창준위를 거쳐서 9월 5일 창당한 당이다.[40] 해당 항목 참조.

1964년 12월 12일 민주당 신파 계열의 재건민주당과 합당하여 해산되었다. 현대로 친다면 바른미래당 포지션과 비슷한데 차이점은 이 당은 민주당계 정당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3.1.5. 정민회정의당(1967년)[편집]

1963년 8월 29일 구 자유당계 일부인사와 무소속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창당하였다. 1965년 11월 9일 재보궐선거에서 유수현이 당선되었다. 1966년 8월 12일에는 유수현을 제명하였다.

1967년 3월 30일 정의당으로 당명을 교체하였으며 제7대 대통령선거에는 진복기 총재가 출마하였으나, 12만 2,914표를 얻는 데 그쳐 낙선하였다. 그 뒤 정당법에 규정된 법정지구당 수 77개에 못미쳐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등록취소로 1971년 5월 4일 소멸되었다.

3.1.6. 한국독립당(1963년)[편집]

1962년 10월 13일 과거에 한국독립당에 소속되어 있었던 대한민국 초기의 군인, 정치인이었던 김홍일이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직전에 재건한 당. 1965년 보궐선거에서 김두한 의원이 당선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이후 위의 자유당처럼 7대 대선을 1년 앞두고, 재야민주세력을 총집결하여 국민대중의 여망에 부응하는 참신하고 강력한 단일야당을 형성한다는 보수야당통합노력에 따라 1970년 1월 25일 민주당계 정당의 적통인 신민당에 흡수합당되어서 해산되었다.

3.1.7. 유신정우회[편집]

1973년 3월 10일 창립된 교섭단체로서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연립여당. 오로지 박정희와 유신 헌법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소속 의원은 박정희가 내놓은 명단에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찬반투표를 거쳐 당선됐다. 약칭은 유정회였다. 해당 항목 참조.

1979년 10월 27일 해체되었다.

3.1.8. 민주정의당[편집]

민주정의당 로고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이 1980년 공화당, 신민당 등 기존 정당을 강제해산하고, 구 정치인들(특히 야당인사의 거의 대부분)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가운데 1981년 1월 15일 창당하였다. 약칭은 민정당이었다. 해당 항목 참조.

3.1.9. 한국국민당(1981년)[편집]

한국국민당(1981년) 로고
전두환과 신군부의 정치금지법으로 해산된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당원들 중에서 정치활동금지를 피한 인사들이 1981년 1월 23일 창당한 당이다. 관제야당으로 기능했다. 이후 1987년 민주화 이후에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여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현직 국회의원 8명과 대부분의 당직자, 지역조직이 신민주공화당으로 넘어가면서 사실상 와해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3.1.10. 안민당[편집]

1981년 1월 28일 창당한 종교적 보수주의 정당이다. 초기 천교도인을 중심으로 탄생하였으며 정강과 정책에 종교적 색채가 강하였다. 1982년 2월 12일 당명을 자유민족당으로 변경했다.

3.1.11. 신정당[편집]

1981년 1월 창당하였다. 총재는 김갑수였다. 박정희 정권 때 친여 성향인 인물들이 많았다. 관제야당으로 기능했다. 해당 항목 참조.

1981년 11대 총선에서 2명의 당선자를 냈는데 한명은 한국국민당을 거쳐서 민주화 이후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으로 갔다. 남은 한명은 신정당이 진보계열 관제야당인 민주사회당과 합당할 때 같이 따라가서 신정사회당이 되었다.

3.1.12. 민주농민당[편집]

1981년 2월 창당하였다. 신중목 전 농림부장관 등이 창당에 참여하였다. 관제야당으로 기능했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규정(경상남도 울산시-울주군)만 당선되었다. 같은 해 12월 근로농민당으로 개칭함과 함께 이규정이 총재가 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3.1.13. 통일민주당[편집]

통일민주당 로고
통일민주당 항목 참조. 약칭이 "통민당"이 아닌 "민주당"이었다. 1990년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의 삼당합당으로 사라졌다. 민주당계 정당이면서 보수정당이기도 하다. 보수의 개념이 변화하게된 주역 중 하나이다. 해당 항목 참조.

통일민주당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1987년 5월 1일 이민우 구상에 반발하여서 신한민주당으로부터 분당해서 나왔다. 이때의 주축이었던 두 계파가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였다. 결국 당의 운영이 영남민주화세력과 호남민주화세력인 두 계파를 중심으로 돌아갔는데 제6공화국의 첫번째 대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누가 대선후보로 나올 것인가를 놓고서 단일화에 실패했고 결국 1987년 10월 29일 김대중 파벌이 탈당해서 같은해 11월 12일에 평화민주당을 창당했다.

결론적으로 이 항목에서 말하는 통일민주당은 5월 창당 직후의 통일민주당이 아니라 10월 분당 이후 영남 중심의 민주화세력으로 구성된 통일민주당을 지칭한다. 해당 항목 참조.

3.1.14. 신민주공화당[편집]

신민주공화당 로고
1987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된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며 만든 정당. 약칭은 민주공화당과 같은 공화당이었다. 창당 직후 한국국민당의 국회의원과, 이전에 민주공화당, 유신정우회의 세력들이 합류하며 어느 정도의 당세를 갖추게 되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당 총재인 김종필이 출마하였으나, 득표율 8.1%로 4위를 기록하며 낙선하였다. 당시 대선 직전에 KAL기 폭파 사건으로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로 표가 몰리면서 그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충남, 대전 등지에서 득표율 1위를 차지하며 충청도를 대표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을 획득하여 원내교섭단체가 되는데 성공했으며, 특히 충남에서만 지역구 13석을 획득하여 본격적으로 충청도를 대표하는 정당이 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이후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과 함께 민주정의당과 노태우정부를 견제하며,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야당들과 달리 확실한 대권주자가 없어[41] 부각되지 않았으며, 소위 박쥐로 많이 불렸다. 이러한 야당의 설움으로 인해 김종필은 의원 내각제를 본격적으로 주장하기에 이른다.

1990년 삼당합당으로 사라진다. 이 과정에서 신민주공화당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제13대 총선에서는 여야간 절묘한 의석 구성이 이루어져서, 여야간의 합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법안이 통과될 수 없었다. 이러한 정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노태우 정권은 합당을 구상하기에 이르며, 초기에 노선이 비슷한 신민주공화당과의 합당을 생각해 낸다. 하지만, 두 당의 의석 합계로는 부족했기에 통일민주당을 끌여들여 보수대통합을 이루고 개헌가능선을 넘게 된다. 합당의 조건으로 김종필은 내각제 개헌을 제시하고, 노태우와 김영삼은 이를 수락해 각서를 작성하기에 이른다.[42] 결국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었으며, 김종필과 박태준은 신당인 민주자유당에서 최고위원 직을 맡게 된다. 해당 항목 참조.

김종필을 보스로 하였다는 점과 인적 구성원의 유사성때문에 1990년대 3당 합당 이후 분당되어 1995년 창당한 충청권 보수의 시초인 자유민주연합의 뿌리를 이 정당에서 본다. 충청권 보수는 이후 자민련을 거쳐서 자유선진당, 선진통일당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3.1.15. 민주자유당[편집]

민주자유당 로고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보수대연합을 하면서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정당이다. 서로 이질적인 성향의 정파와 계파가 연합해서 만들어진 정당이라는 점에서 최초의 우파 빅텐트 정당으로 본다. 한나라당계 정당의 뿌리이자 민자당계 정당의 시초다.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의 여당이었다. 해당 항목 참조.

현재 국민의힘은 민주정의당 등 군사독재정권의 여당을 뿌리로 인정하지는 않고 한나라당을 뿌리로 인정한다. 민주당계 정당이 친일파 인사들이 주도했던 한민당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현재 국민의힘 당사에는 이승만박정희김영삼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는데 이에 대해 정병국 전 미래통합당[43] 의원은 “통합당 뿌리라고 하면 3당 합당 이후 전개되어온 것이다. 자유당 이승만 대통령도 아니고 박정희 대통령도 아닌데 (왜 세 사진이 함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연결점이 하나도 없는데 그걸 보수의 뿌리라고 얘기한다고 하면 누가 동의하겠는가"라며 내려야 한다고 비판하였다. 정병국 "통합당, 이승만·박정희·YS 사진 떼내야…견원지간, 상극인데"

3.2. 소속 정치인[편집]

3.2.1. 대통령[편집]

대한민국 대통령 문장
이름
임기
선출 방법
정당
취임일
퇴임일
3
박정희 대통령
external/static....
박정희
(1917 ~ 1979)
5
1963년 12월 17일
1967년 6월 30일
1963년 대선
직선 46.6%
민주공화당 (1963 ~ 79)
6
1967년 7월 1일
1971년 6월 30일
1967년 대선
직선 51.4%
7
1971년 7월 1일
1972년 12월 26일
1971년 대선
직선 53.2%
8
1972년 12월 27일
1978년 12월 26일
1972년 대선
간선 100.0%
9
1978년 12월 27일
1979년 10월 26일
1978년 대선
간선 100.0%
5
전두환전대통령
external/static....
전두환
(1931 ~ 2021)
11
1980년 8월 27일[44]
1981년 2월 25일
1980년 대선
간선 100.0%
무소속 (1980 ~ 81)
민주정의당 (1981 ~ 88)
12
1981년 2월 25일[45]
1988년 2월 24일
1981년 대선
간선 90.2%
6
President RTW
external/static....
노태우
(1932 ~ 2021)
13
1988년 2월 25일
1993년 2월 24일
1987년 대선
직선 36.6%
민주정의당 (1988 ~ 90)
민주자유당 (1990 ~ 92)
무소속 (1992 ~ 93)

3.2.2. 국회의원[편집]

3.2.2.1. 13대 국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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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당대표[편집]

민주공화당 로고만민주공화당 글씨만 총재 및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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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의당 심볼 민주정의당 글자 총재 및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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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민당(1981년) 심볼 한국국민당(1981년) 글자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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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민주당 심볼(색반전) 통일민주당 흰색 로고타입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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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주공화당 심볼 신민주공화당 글자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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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심볼민주자유당 글자 총재 및 대표민주자유당 심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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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역대 선거 결과[편집]

3.3.1. 대통령 선거[편집]

후보자
연도
대수
정당
득표수
득표율
결과
224,443표
2.22%
4위
4,702,640표
46.6%
당선
5,688,666표
51.4%
당선
198,837표
1.9%
6위
232,179표
2.1%
5위
122,914표
1.03%
3위
6,342,828표
53.2%
당선
2,357표[46]
100.0%
당선
2,577표[47]
100.0%
당선
85표[48]
1.6%
3위
4,755표[49]
90.2%
당선
8,282,738표
36.6%
당선
6,337,581표
28.0%
2위
1,823,067표
8.1%
4위

3.3.2. 국회의원 선거[편집]

연도
국회
정당
전체 의석수
지역구
비례
결과
6대
2 / 175
2 / 131
0 / 44 (1.1%)
원내 5당
110 / 175
88 / 131
22 / 44 (33.5%)
원내 1당
7대
129 / 175
102 / 131
27 / 44 (50.6%)
원내 1당
8대
113 / 204
86 / 153
27 / 51 (48.8%)
원내 1당
9대
146 / 219[50]
73 / 146
73/73 (38.7%)[51]
원내 1당
10대
145 / 231[52]
68 / 154
77/77 (31.7%)[53]
원내 1당
25 / 276
18 / 184
7 / 92 (13.3%)
원내 3당
2 / 276
2 / 184
0 / 92 (4.1%)
원내 5당
1 / 276
1 / 184
0 / 92 (1.4%)
원내 7당
151 / 276
90 / 184
61 / 92 (35.6%)
원내 1당
148 / 276
87 / 184
61 / 92 (35.2%)
원내 1당
20 / 276
15 / 184
5 / 92 (9.2%)
원내 2당
125 / 299
87 / 244
38 / 75 (34.0%)
원내 1당
59 / 299
46 / 244
13 / 75 (23.8%)
원내 3당
35 / 299
27 / 244
8 / 75 (15.8%)
원내 4당

4. 3당 합당 이후[편집]

1990년 2월 9일 민주자유당 창당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민주당계 정당과 대립해온 주류 정당은 민자당계 정당, 혹은 한나라당계 정당으로 불리는 정당들이다. 민주자유당에서 내려오는 제6공화국 주류 보수 정당의 계보는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으로 이어졌다. 참고로 국민의힘의 홈페이지에는 한나라당을 당의 공식적인 기원으로 서술하고, 신한국당, 민주자유당 등 그 과거 정당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민주자유당 법인은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으로 창당되었으며, 1996년 2월 6일 신한국당으로 한 번 당명을 변경하였다. 1997년 11월 21일까지 7년간 존속했다. 이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1997년 11월 21일 한나라당이 창당되었으며, 한나라당은 2012년 새누리당으로, 2017년 자유한국당으로 두 번 당명을 변경한 끝에 2020년 2월 17일까지 대한민국 정당으로서는 가장 긴 22년간 존속했다. 이후 2020년 자유한국당새로운보수당전진당이 합당하여 미래통합당이 창당되었으며 같은해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다만 주류 보수 세력이 계속해서 단일 정당으로 유지된 것은 아니며, 세 번의 유의미한 분열이 있었다. 그러나 세 번의 분열 모두 몇 년 후 재통합으로 이어졌다. 우선 1995년 초 민주자유당 내 공화계 및 일부 민정계가 집단 탈당하여 그해 3월 30일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었다. 자민련은 2006년 3월 10일 자진 해산하고 사실상 한나라당에 흡수 통합되었다. 두번째로는 2007년 말 한나라당을 탈당한 이회창을 중심으로 2008년 창당된 자유선진당이 있다. 자유선진당은 자민련 출신 인사들 중 한나라당에 합류하지 않은 인사들로 이루어져 있던 국민중심당과 통합하고 충청권 지역 정당으로 활동했으나, 전국적으로는 자민련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다가 2012년 새누리당에 흡수되었다. 마지막으로 2016년 말 새누리당을 집단 탈당한 비박계 인사들이 2017년 초 창당한 바른정당이 있다. 이는 각각 김종필, 이회창이라는 강력한 정치적 보스이자 특정 지역의 맹주인 인물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적인 선거를 앞두고 이뤄졌던 앞에 두 분당과 달리 보스 정치나 지역주의에 기반하지 않았고 전국적인 선거도 앞두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진 분당이었다. 그러나 바른정당은 보수의 주류 자리를 두고 자유한국당과의 경쟁에서 패배하였으며, 지지율 부진과 소속 의원들의 집단 탈당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2018년 국민의당(2016년)과 합당하여 바른미래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바른정당 출신 인사들은 2020년 초 바른미래당을 집단 탈당하고[54] 사실상 바른정당을 재건한 새로운보수당을 창당하였으며, 새로운보수당은 자유한국당과 합당하여 미래통합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4.1. 당색[편집]

주류 보수 정당을 상징하는 색은 계속 바뀌었는데, 1990년 민주자유당 이후 2012년 새누리당에서 빨간색으로 바꿀 때까지 22년 동안 파란과 하늘색을 주로 썼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당색 역시 빨간색으로 바뀌었고, 자유한국당에서도 빨간색을 썼다. 한편 바른정당과 새로운보수당에서는 한나라당까지의 파란색을 계승해서 하늘을 썼다. 이후 미래통합당은 빨간색을 순화시킨 분홍색을 사용했으나 단명했다. 그 후신인 국민의힘에서는 빨간색 파란색 
하얀색
을 혼용해서 쓰기로 결정했다. 국민의힘 ‘빨·파·흰’ 확정[55]

4.2. 역사[편집]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은 과반 의석 150석에도 미달하는 149석을 얻는데 그치며 의석수가 대폭 줄었으나, 여전히 1당을 유지하였다. 이후 무소속 및 다른 당 의원들을 영입하여 인위적 과반을 달성하긴 했다.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면서 민주자유당은 또다시 여당을 맡게 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초기에는 높은 지지율로 잠시 전성기를 누리지만,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 대형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자 휘청거렸으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패배하였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하고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정계를 공천 탈락시키는 쇄신 공천을 단행하며 반전을 꾀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15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에서 당명을 바꾼 신한국당은 원내 제1당은 유지했으나 과반 의석 확보에는 또 실패하였다. 물론 이번에도 무소속 및 다른 당 의원들을 영입하여 인위적 과반은 달성하였다.

그러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1달 전에 1997년 외환 위기가 발생하면서 여당인 신한국당의 지지가 폭락했으며, 같은 해 신한국당이 통합민주당과 신설합당하면서 창당된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민주당계 정당인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에게 패배하였다. 다만 한때 여론조사에서 3위로 나오기까지 했던 이회창 후보는 대선 막바지에 지지층을 재결집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득표 차는 1.6%p 밖에 되지 않았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외부세력을 수혈받아 새로이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을 꺾고 원내 제1당 자리를 수성하였고, 2002년에 열린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2002년 재보궐선거에서 연속으로 승리하면서 다시 전성기를 맞는 듯 했다. 그러나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게 석패하였다. 이후 노무현 정부가 1년차 임기인 2003년부터 지지율이 흔들린 틈을 타서 한나라당은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했고,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제동을 걸었으며, 2004년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을 세우며 지지를 호소한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시키기 위해 새천년민주당과 같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한 탄핵소추 1달 뒤 열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에게 152석을 내주었고, 한나라당은 121석에 그치며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이전까지 민주화 이후 보수정당 역사상 가장 적은 수의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당선되는 결과를 내었다.

열린우리당은 17대 총선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노무현 정부 말기에 들어 지지가 폭락했다. 그 반대 급부로 당시 제1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지지는 반등하였다. 2007년 한나라당의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에는 이명박 전 서울특별시장[56]과 박근혜 의원[57]이 출마했는데,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지지율 덕에 이 경선에서 한나라당의 후보가 되는 사람은 무조건 대통령이 될 거라는 의미로 경선이 곧 본선이라고 평가 받기도 하였다. 치열했던 경선 결과 한나라당 후보는 이명박으로 결정되었고, 이명박 후보는 열린우리당이 분열과 재통합을 거쳐 창당된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를 48.7% VS 26.1%라는 압도적인 격차로 이기며 당선되었다. 한나라당은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과반 의석 150석을 넘는 153석을 획득하였는데, 이는 당시 대통합민주신당 등 민주당계 정당들이 통합해 창당된 통합민주당이 얻은 81석의 2배에 가까운 의석수였다. 특히 한나라당의 공천에서 탈락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의원들이 복당하자 한나라당의 의석수는 180석에 육박하였다.

그러나 2009년, 노무현 前 대한민국 대통령의 뇌물수수 의혹과 관련한 검찰 수사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노 前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에 대한 범국민적인 추모 여론이 일어나 통합민주당에서 이름을 바꾼 민주당의 지지 상승과 한나라당의 지지 급락으로 이어졌다. 그 해 후반에는 쇄신용 개각 단행, 서울 지하철 9호선 개통, 아랍에미리트 원전 유치 성공으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회복되는 듯 했으나,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와 겹친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게 광역단체장 6:7, 경상남도지사 친노계 무소속 승이라는 충격적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2010년 재보궐선거에서 승리로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회복세를 보였고, 이후에 G20 정상회담 유치, 아덴만 여명 작전 등의 국제적 호재들도 많이 이어지면서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40%대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유지했다. 201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패배했지만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한미 FTA 타결, 신분당선 개통 등의 영향으로 한나라당이 지지율 1위를 지켜내었다. 하지만 그 해 연말에 터진 선관위 디도스 사건 등의 위기 이후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으로 친이의 몰락과 함께 박근혜에게 당권을 넘겨주게 된다.

박근혜가 이끌던 한나라당은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변경, 상징색도 파랑색에서 빨강색으로 바꾸는 혁신을 단행하였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민주당에서 이름을 바꾼 민주통합당에게 패배할 것이란 관측이 있었으나, 2012 서울 핵안보정상회의의 성공적인 개최와 새누리당의 혁신 성공으로 인해서 과반 의석 151석을 넘는 152석을 얻고, 127석에 그친 민주통합당을 꺾었다. 8개월 뒤 실시된 18대 대선에도 박근혜 51.6% Vs 문재인 48.0%으로 보수 우위 국면이 지속되었다. 2013년에는 인사파동, 김학의 별장 성접대 사건윤창중의 성추행 의혹,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등의 수많은 악재들에도 5~60%대의 지지율을 유지했으며, 연말에 철도 파업으로 인해서 하락했었지만 2014년 초에 다시 5~60%대의 지지율을 회복했다. 2014년의 여러 선거에서도 당시의 대형 참사들과 세월호 참사라는 초유의 사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선 광역자치단체장 8:9로 치열한 접전을 펼쳤고, 7월 30일에 실시된 2014년 재보궐선거에서도 11:4라는 압승을 거두었으며, 정부의 지지도는 4~50%대에 육박했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SRT 수서발 고속철도 추진 등의 여러 호재들과 연말에 터진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2015년 초의 연금파동 등의 악재들에도 여전히 여당인 새누리당은 지지율 1위, 정부는 3~40%대의 지지율을 유지했다. 2015년 중반에 터진 성완종 자살 사건과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 등의 악재에도 2015년 재보궐선거에 새누리당이 압승을 거두었으며 8.25 남북군사합의,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참석 등의 영향으로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이 골든크로스에 성공했으며, 이후 이를 바탕으로 노동개혁, 4대 개혁 입법 추진, 서비스기본법, 원샷법, 제주해군기지 완공, 장기결석 전수조사 등의 정책을 계속 추진했고, 20대 총선이 실시되는 2016년 1~2월까지는 압도적인 힘을 누렸다.

그러나 2016년 4월,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정치 지형이 크게 변하였다. 당초 선거 이전부터 2016년 2~3월 새누리당 공천파문이 현실화될때까지는 집권 4년차를 맞은 박근혜 정부 및 새누리당의 나름대로 건재한 30%대 중후반 ~ 40%대 초반의 지지율과 새정치민주연합의 비문계 의원의 집단 탈당으로 이루어진 민주당계 정당의 분열로 새누리당이 20대 총선에서 국회선진화법상 여야쟁점법안의 단독처리가능의석인 180석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는 완승을 거둘 것이라 예상하는 이가 대다수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추진 시도와 2016년 초 테러방지법의 필리버스터 사태가 연쇄다발적으로 맞물리고 이어지는 일명 옥새들고 나르샤 파문으로 비춰지는 여당의 공천을 둘러싼 분열은 결국 제1당 혹은 180 ~ 200석을 차지해 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지겠다던[58] 새누리당은 오히려 역으로 더불어민주당 및 국민의당 등 야당/무소속에 전체 300석 중 60%에 가까운 170석 이상 내주며 최종 결과 122석의 제2당이라는 17대 총선 다음으로 나쁜 결과를 얻어 당시 보수 진영은 완패하고 말았다.[59]

총선 이후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부는 당초의 포스트 박근혜, 정권 재창출을 목표로 하는 포부에서 현직 대통령의 예정된 임기가 2년 가까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야(野) 우위의 미래를 기약하기 어려운 위태위태한 조기레임덕 사태에 빠지긴 했어도 지지율이 여전히 30%대를 유지하는 등 여전히 콘크리트 지지율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2016년 9월 이후로 당시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의 해임 건의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는 등 권력누수현상이 가속화되는 지경에 이르다가...

2016년 10월 24일, 박근혜 대통령이 비(非)공무원 신분인 최순실에게 국가주요기밀인 대통령연설문을 누출했다는 의혹이 JTBC에 의해 공개된 데 이어, 연달아 11월 이후로 미르재단·K스포츠재단의 설립과정에서 최순실이 박근혜 대통령과 연결되어 각 재벌회장에게 각출받은 자금이 최순실의 사익을 밀접히 추구하는 목적으로 결국 대통령직(職)이 일종의 도구로 사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 및 정유라 마필 뇌물 의혹 등까지 포괄하여 터지면서 사상 유례없는 비선실세에 의한 국정농단 사태로 인한 국민들의 분노로 새누리당 및 범보수정당의 지지는 폭락하게 되었다.

이에 2016년 12월 9일, 국민들의 분노에 떠밀린 국회는 234표의 찬성으로 대통령(박근혜) 탄핵소추안을 의결함으로서 헌법재판소로 대통령(박근혜)의 최종 거취에 대한 결정권을 넘겼다. 그 여파로 보수계 유일 정당이던 새누리당의 분당으로 이어져 자유한국당바른정당늘푸른한국당친박 新새누리당으로 쪼개졌고, 이어지는 탄핵 선고에서 8:0 만장일치 파면 인용을 결정하면서 조기 대선이 실시되었고, 결국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이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후보를 역대 최대 표차[60]로 꺾고 당선되었다. 그리고 탄핵 과정에서 탈당한 비박계의 '개혁보수'를 내걸며 만든 바른정당은 창당 1년여만인 2018년 2월, 국민의당과 신설 합당, 바른미래당을 창당했고, 늘푸른한국당은 자유한국당과 합당했다. 그래도 나름대로 20%대의 콘크리트 득표율을 유지했고 홍준표 대표 체제가 출범하면서 한국당은 지지율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지율에 변동이 없이 여전히 10~20% 이내의 낮은 지지율에 머물렀다. 남북 단일팀 논란,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 등을 비롯한 문재인 정부의 각종 악재들에도 여전히 이슈 선점에 실패를 거듭했다. 이후 당내 계파 갈등까지 벌어져 지지층 결집은 계속 이뤄지지 않고, 문재인 정부와 여당의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등 평화 분위기 조성에 따른 압도적 지지율로 인해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광역자치단체장 3[61]:14라는 역대급 참패를 당하며 보수계의 세는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지방선거 이후 경제 문제 등의 부각으로 자유한국당이 반사이익을 보는 듯 했으나, 보수정당이 분열된 상태로는 21대 총선에서 승리하기 힘들다는 판단 하에 보수정당 통합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선거법상의 비례대표를 얻기 위한 움직임 아래 자유한국당 아래 위성 정당으로서 미래한국당을 창당시켰고, 지속적으로 물밑에서 이뤄진 통합의 움직임의 결실로 박근혜 탄핵 이후 쪼개졌던 보수정당이 4년만에 자유한국당새로운보수당전진당의 원내 보수정당과 원외 보수정당 2당과 신설 합당의 형식으로 미래통합당으로 재통합하게 되었다. 그 이후 문재인 정부의 조국 사태코로나 19 등의 악재등을 이용해 기회가 온 미래통합당은 21대 총선에서의 많은 의석의 차지를 노렸으나, 보수 계열 내의 내분, 여론의 정리가 이뤄지지 않고 여전히 계속된 공천 잡음, 소속 의원들의 막말 등의 혼란을 거듭하며 결국 21대 총선에서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더불어시민당의 연합에 야당인 미래통합당, 미래한국당의 연합이 180석을 여당에 내주며 완패하였다. 이로써 20대 총선을 시발점으로 해서 선거 4연패. 보수정당은 비록 다시 유일한 보수정당인 미래통합당으로 합쳐졌으나, 민자당계 보수정당 역사상 최악이었던 17대 총선의 121석을 갱신해버렸고, 이로 인해서 전 정부 탄핵의 후유증만 지속되었다. 그리고 미래통합당은 21대 국회 개원 이후 국민의당과 원내 보수야당으로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2022년 20대 대선 이전에 합당을 하거나 다시 복수의 보수야당체제로 전환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점친다.

2020년 9월 2일, 미래통합당은 국민의힘이라는 새로운 당명으로 교체하였다.

4.2.1. 문민정부[편집]

4.2.1.1. 통합민주당(1995년)[편집]
통합민주당 1995년 로고
민주당(1991년)이 1995년 9월 분당사태로 동교동계가 새정치국민회의를 분당해 나간 이후로 창당된 정당이다. 신한민주당과 통일민주당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980년대 삼김시대가 열린 이후 민주당계 정당은 사실상 김영삼 중심의 영남민주화세력과 김대중 중심의 호남민주화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통합민주당은 최후의 비 YS, 비 DJ 민주당계 정당으로 군부출신 정치인과 시민운동가, 민주화 운동을 한 민간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넓은 스펙트럼으로 승부를 보았다. 해당 항목 참조.

그러나 삼김 모두 김영삼은 신한국당, 김대중은 새정치국민회의, 김종필은 자유민주연합으로 각자의 정당으로 지역주의 정치를 굳혀가는 상황에서 통합민주당은 생존하기 힘들었고 결국 연달은 선거에서의 성적 부진을 겪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정권 말기 지지율 하락을 겪던 신한국당과 합당하여 한나라당으로 신설합당하면서 사라졌다.

나름대로 선명야당의 기치를 내세웠고 한나라당이 “전통여당과 전통야당의 결합”이라고 홍보한 것과는 달리 꼬마민주당으로 불릴만큼 워낙 존재감이 떨어져서 대중들은 민주자유당에서 신한국당으로 단순히 당명을 바꾼 것처럼 신한국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당명만 바꿨다는 인식이 크다. 더불어서 민주자유당으로의 3당합당과 한나라당으로의 신설합당에 반대했던 소장파 정치인들이 현재의 친노계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정당 덕분에 지금의 국민의힘이 정당계보상으로 평화민주당의 직계 후신이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4.2.1.2. 신정치개혁당[편집]
신정치개혁당 로고
1992년 2월 25일 꼬마 민주당에서 분당한 박찬종이 창당한 사실상 최초의 1인 중심 정당. 약칭은 신정당. 해당 항목 참조.
4.2.1.3. 통일국민당[편집]
통일국민당 로고

1992년, 당시 현대그룹의 총수인 정주영이 창당한 중도보수 성향의 정당. 약칭은 국민당이었다. 사실상 최초의 제3지대 중도보수 정당으로 여겨진다. 해당 항목 참조.

창당 한달만인 1992년 3월 제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 등 31명의 당선자를 내면서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하며 당시 정치권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줬다. 또 현대그룹의 대대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당원 천만 명을 달성하였으며 이러한 장점을 바탕으로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정주영은 통일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투표 결과 400만도 안되는 16.3%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김영삼김대중에 이어 3위에 그쳤다.

정주영은 1993년 2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자신이 제공하였던 통일국민당 당사마저 폐쇄한 후 광화문 현대빌딩 앞에 헌정사상 최초로 천막당사를 차렸다. 이후 소속 국회의원들이 잇따라 탈당하여 민주자유당에 입당함으로서 통일국민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였다. 잔류파는 1994년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과 합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가 1995년 6월 1일에 김종필의 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어 소멸되었다.
4.2.1.4. 새한국당[편집]
새한국당 로고
1992년 11월 18일 민정계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이종찬이 자신을 지지하는 김현욱박철언이영일김용환장경우 등과 함께 민주자유당을 탈당하여 창당한 당이다. 충격적이게도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당이라는 민주당과 합당했는데 일부는 새정치국민회의까지 따라가고 일부는 한나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4.2.1.5. 신민당(1994년)[편집]
정당사에 유례없이 족적을 안 남긴 정당 중 하나.... 자민련에 흡수되며 사라졌다. 해당 항목 참조.
4.2.1.6. 자유민주연합[편집]
자유민주연합 로고
1995년부터 2006년까지 존재했던 정당으로, 3당 합당 이후 처음으로 나온 3당이다. 민주자유당에서 민주계가 당권을 차지하자 김종필을 중심으로 민정계와 공화계가 탈당하여 창당한 정당이다. 약칭 자민련. 이후 DJP연합으로 인해 여당이 된 적도 있으며, 충청권 보수정당의 기원이자 리즈 시절이다. 해당 항목 참조.
4.2.1.7. 신한국당[편집]
신한국당 당기
김영삼과 상도동계가 민자당을 장악한 이후 민주자유당에서 당명을 개정한 중도보수 성향의 정당. 해당 항목 참조.
4.2.1.8. 국민신당(대한민국)[편집]
국민신당 로고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신한국당 대통령 경선 후보에서 2위로 탈락한 이인제 당시 경기도지사가 창당한 대선용 신당.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한 때 몸담았던 곳이기도 하다. 대선에 이인제 지사가 출마하기 위해 만든 1인 중심의 정당이나, 원유철의원이 한 때 몸담기도 하였다. 대선에서 3위로 떨어지고, 뒤이은 지방선거에서의 대참패로 당의 구성원들이 민주당, 자민련, 한나라당으로 흩어지며 사라진 1인중심의 중도 정당이다. 피닉제 전설의 시작이 된 정당이기도 하다. 해당 항목 참조.

4.2.2. 국민의 정부 ~ 박근혜 정부[편집]

국민의 정부 ~ 참여정부 사이의 기간은 보수정당이 처음으로 야당을 했던 시기이다. 물론,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다시 보수정당이 10년만에 야당이 되었다.
4.2.2.1. 한나라당[편집]
한나라당 당기
1997년 신한국당이 민주당과 합당하여서 창당된 정당. 1998년부터 2007년까지 야당이었다. 해당 항목 참조.
4.2.2.2. 희망의 한국신당[편집]
희망의 한국신당 로고

2000년 2월 15일 자민련 내부의 내각제 개헌을 둘러싼 계파 갈등으로 인해서 김용환이 자신의 계파를 이끌고 창당한 정당이다. 그러나 김용환만 당선되고 이후 한나라당으로 합류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4.2.2.3. 민주국민당(2000년)[편집]
민주국민당(2000년) 로고

2000년 16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서 공천탈락한 중진급 정치인들과 새천년민주당 및 무소속 정치인, 재야운동가 등이 뭉쳐서 2000년 3월 8일 조순을 당대표로 추대하고 공식적으로 창당했다. 약칭은 민국당이다. 해당 항목 참조.

창당초기에는 돌풍을 일으킬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총선에서 2석만 거두는 참패를 맞이했다. 그러나 2000년 연말 집권 여당인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과 손을 잡고 새롭게 연립여당을 추진하기로 했고 2001년 4월 16일에는 새천년민주당에 의해서 공식적으로 민주당-자민련-민국당의 3당 연합이 선언되었고 그 대가로 유일한 지역구 당선자였던 한승수 의원이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하지만 4개월 후인 2001년 9월 한나라당이 제출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임결의안에 자민련이 찬성하면서 DJP연합이 붕괴되면서 연립여당의 위치를 잃게 되었다. 결국 2002년 2월 한승수 의원은 외교통상부 장관에서 사퇴했다.

지방선거와 대선이 예정된 권력재편기 2002년이 되자 모두들 자기 갈길을 가버렸다. 이후 민주국민당은 비례대표(전국구) 강숙자 의원과 껍데기만 남았으며, 결국 2004년 4월 18일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폭망하면서 정당 등록이 취소되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4.2.2.4. 한국미래연합[편집]
한국미래연합 로고
2002년 5월 17일 박근혜 1인을 중심으로 창당된 보수정당. 이회창과의 갈등때문에 창당되었는데 지방선거에서 참담한 패배를 겪으면서 박근혜는 조용히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4.2.2.5. 국민통합21[편집]
국민통합21 로고2
현대그룹 총수인 정주영의 아들 정몽준이 창당한 정당.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몽준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여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와 단일화 대표 선정을 놓고 경쟁을 벌이다가, 여론조사를 통해 노무현으로의 후보 단일화에 합의하였다. 한때 공동정부의 꿈에 부풀기도 하였으나, 투표 전날 정몽준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 철회를 선언하여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러고도 노무현이 당선되면서 당세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 정몽준은 2003년 6월 26일 국민통합21의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이어진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국민통합21은 정몽준을 제외한 모든 후보가 낙선하며 1석을 얻는데 그쳤고, 비례대표에선 0.6%를 득표했다. 이에 정몽준이 해외출장 중이던 5월 11일 당무회의를 열어서 자진해산을 선언하였으며, 정몽준 본인은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정당법에 의해 해산되지 않고 남아있다가, 법 개정 이후 2004년 9월 1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등록 취소 결정을 내리면서 법적으로도 사라졌다. 해당 항목 참조.
4.2.2.6. 하나로국민연합[편집]
하나로국민연합 로고

2002년 11월 15일 이한동 전 국무총리가 창당한 정당으로서 1년 3개월간 존속하였으며 2004년 2월 19일 자진해산 후 자민련에 합류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4.2.2.7. 국민중심당[편집]
국민중심당 로고
한나라당과 합당을 거부한 자유민주연합 출신의 심대평이 2006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창당한 정당. 자유민주연합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당세가 급격히 약화되고 당의 간판인 김종필이 정계은퇴를 하게 되어 충남도지사 출신 심대평을 중심으로 재창당한 정당이다. 해당 항목 참조.

역대 당대표
4.2.2.8. 자유선진당[편집]
자유선진당 로고
17대 총선 이후 이회창과 국민중심당을 기반으로 하여 창당한 충청기반의 보수주의 정당. 해당 항목 참조.

역대 당대표
4.2.2.9. 참주인연합[편집]
external/www.pol...
4.2.2.10. 미래희망연대[편집]
미래희망연대 로고
원래 이 당은 2007년 10월 2일 대선용으로 창당된 민주당계 정당인 참주인연합이었다. 그러나 대선후보였던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이 낙선하고 개점휴업 상태였던 정당을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친이계에 의해서 공천에 떨어진 친박계가 집단 입당하면서 2008년 3월 13일 미래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가 같은해 3월 21일 친박연대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놀랍게도 18대 총선에서 자유선진당이 18석의 정당이 되었는데 친박연대는 14석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2010년에는 미래희망연대로 당명을 바꿨다가 박근혜가 한나라당의 당권을 잡고 난 후 2012년에 2월 2일 한나라당에 흡수합당되었다.

역대 당대표(당의 명칭이 친박연대가 된 이후의 당 대표만 아래에 기재한다.)
4.2.2.11. 국민중심연합[편집]
국민중심연합 로고
자유선진당의 심대평이 이회창과의 불화로 만든 정당. 지방선거에서 약소한 성적을 거둔 후 자유선진당과 이인제 세력이랑 합당하여 사라졌다. 해당 항목 참조.
4.2.2.12. 미래연합[편집]
미래연합 로고
미래희망연대(구 친박연대)가 한나라당과의 합당 움직임을 보이자, 합당 반대파를 주축으로 이규택이 창당한 정당. 이름은 박근혜가 창당했던 한국미래연합의 약칭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마케팅을 일절 배제해버린 나머지 득표율 0.09%로 해산되었다. 해당 항목 참조.
4.2.2.13. 국민행복당[편집]
국민행복당(2011년) 로고
기무사사령관을 지낸 허평환이 창당한 정당으로 평화민주당[64]과 합당하였다. 18대 대선때 박근혜를 지지하나 정당 등록 취소 이후 새누리당에 개별 합류 한다. 해당 항목 참조.
4.2.2.14. 새누리당[편집]
새누리당 로고

19대 총선 직전 한나라당이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이후 18대 대선 직전 선진통일당을 흡수합당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 대표:
    •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2011년 12월 19일 ~ 2012년 5월 15일)
    • 황우여 (대표최고위원, 2012년 5월 15일 ~ 2014년 5월 14일)
    • 이완구 (비상대책위원장, 2014년 5월 15일 ~ 2014년 7월 13일)
    • 김무성 (대표최고위원, 2014년 7월 14일 ~ 2016년 4월 14일)
    • 원유철 (대표최고위원 권한대행, 2016년 4월 14일 ~ 2016년 5월 10일)
    • 정진석 (대표최고위원 권한대행, 2016년 5월 11일 ~ 2016년 6월 1일)
    • 김희옥 (혁신비상대책위원장, 2016년 6월 2일 ~ 2016년 8월 9일)
    • 이정현 (대표, 2016년 8월 9일 ~ 2016년 12월 16일)
    • 정우택 (대표 권한대행, 2016년 12월 16일 ~ 2016년 12월 28일)
    •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 2016년 12월 29일 ~ 2017년 2월 13일)
4.2.2.15. 국민생각[편집]
국민생각 가로 로고
박세일 전 의원이 창당한 정당으로 전여옥 의원이 입당하며 잠깐 원내정당이 되었지만 선거에서 3%를 미달하여 해산된다. 해당 항목 참조.
4.2.2.16. 정통민주당[편집]
정통민주당 가로 로고
19대 총선의 민주통합당의 공천과정에서 탈락한 구 동교동계 출신들이 만든 정당. 이후 새누리당에 합류한다. 해당 항목 참조.
4.2.2.17. 선진통일당[편집]
선진통일당 로고
19대 총선 이후 이인제가 당대표를 맡으면서 자유선진당의 당명을 개정한 정당. 2012년 18대 대선 전에 새누리당에 흡수 통합. 해당 항목 참조
4.2.2.18. 늘푸른한국당[편집]
늘푸른한국당 흰색 로고

새누리당에서 친이계의 좌장이었던 이재오 전 의원과 친이 세력이 탈당하여 2017년 1월 11일 창당한 정당. 약칭은 늘푸른당. 2018년 2월 9일 정당을 해산하였고, 이재오를 위시한 소속 당원들은 자유한국당에 합류한다. 해당 항목 참조.
  • 대표:
    • 이재오최병국 (공동대표, 2017년 1월 16일 ~ 2017년 8월 2일)
    • 이재오 (대표, 2017년 8월 2일 ~ 2018년 2월 9일)
4.2.2.19. 바른정당[편집]
바른정당 흰색 로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이후 새누리당 분당 과정에서 탈당한 비박, 비주류들이 구성한 중도보수 정당. 2016년 12월 27일에 새누리당 비박계 의원 29명이 탈당하였고 먼저 탈당한 김용태 의원을 포함해서 30명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면서 시작되었다. 2017년 1월 24일 공식적으로 창당되었으나 반기문을 대선후보로 영입한 것이 실패한 후에 수차례의 바른정당 탈당사태를 겪었다. 2018년 초에는 본격적으로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과정을 시작하였고, 2018년 2월 13일 국민의당과 함께 바른미래당으로 신설합당하며 소멸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 대표:
    • 정병국 (대표, 2017년 1월 24일 ~ 2017년 3월 10일)
    • 주호영 (대표권한대행, 2017년 3월 10일 ~ 2017년 6월 25일)
    • 이혜훈 (대표, 2017년 6월 26일 ~ 2017년 9월 7일)
    • 주호영 (대표권한대행, 2017년 9월 7일 ~ 2017년 11월 13일)
    • 유승민 (대표, 2017년 11월 13일 ~ 2018년 2월 13일)
4.2.2.20. 자유한국당[편집]
자유한국당 흰색 로고

2016년 새누리당이 20대 총선에서 참패한 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충격으로 분당 사태가 일어났고, 2017년 자유한국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2020년 중도·보수 대통합론에 따라서 바른정당의 후신인 새로운보수당과 전진당 그리고 2개 창준위 등 개별합류한 정치인들과 함께 미래통합당으로 신설합당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 대표:
    •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 2017년 2월 13일 ~ 2017년 3월 31일)
    • 정우택 (비상대책위원장 권한대행, 2017년 4월 1일 ~ 2017년 7월 2일)
    • 홍준표 (대표, 2017년 7월 3일 ~ 2018년 6월 14일)
    • 김성태 (대표 권한대행, 2018년 6월 14일 ~ 2018년 7월 17일)
    • 김병준 (혁신비상대책위원장, 2018년 7월 17일 ~ 2019년 2월 25일)
    • 황교안 (대표, 2019년 3월 4일 ~ 2020년 2월 17일)
4.2.2.21. 국민대통합당(2017년)[편집]

4.2.3. 문재인 정부[편집]

문재인 정부로 정권교체가 되고 2020년 미래통합당이 새로 창당되면서 한나라당 법인은 역사 속으로 소멸되었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이 새로운보수당과 전진당 등과 합당해서 창당된 미래통합당은 한나라당에 대한 계승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미래통합당이 당명을 교체한 국민의힘까지 이어지고 있다.
4.2.3.1. 바른미래당[편집]
바른미래당 흰색 로고

대한민국의 중도주의 및 중도보수 성향의 제3지대 정당이다. 2018년 국민의당·바른정당 합당으로 생긴 정당으로 뿌리가 다른 두 세력이 융합하는 형태라 세력이 복잡한 것이 특징이다. 스스로는 탈이념, 탈지역을 추구한다고 말하였지만 중도주의와 중도우파 사이에서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중도 세력을 포용하려는 정당이니 만큼 일각에서는 중도보수정당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65] 2020년 보수계열인 바른정당계 의원들은 새로운보수당이라는 당을 차려 떠났고, 중도계열을 대표하는 안철수 전 대표가 이견 끝에 탈당해서 국민의당을 창당하였다. 또한 호남계들도 손학규 대표와의 이견끝에 탈당하는 등 그 여파로 대안신당민주평화당과 함께 합당하여 민생당을 창당하였다.
  • 대표:
    • 박주선-유승민[66] (공동대표, 2018년 2월 13일 ~ 2018년 6월 15일)
    • 김동철 (비상대책위원장, 2018년 6월 15일 ~ 2018년 9월 2일)
    • 손학규 (대표, 2018년 9월 2일 ~ 2020년 2월 24일)
4.2.3.2. 새로운보수당[편집]
새로운보수당 흰색 로고

바른미래당 내의 보수계열인 바른정당계 인원들이 내부 갈등으로 인해 '변화와 혁신을 위한 비상행동(변화와 혁신)'이라는 조직을 결성한 것을 거쳐, 바른미래당에서 탈당하여 새롭게 창당한 정당이다. 자유한국당, 전진당과 함께 미래통합당으로 신설합당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4.2.3.3. 미래를향한전진4.0[편집]
미래를향한전진4.0 흰색 로고

바른미래당에서 탈당한 이언주를 중심으로 창당한 1인 보수정당이다. 중도우파부터 우파까지 포괄하는 보수 빅텐트를 표방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새로운보수당과 함께 미래통합당으로 신설합당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 대표:
    • 이언주 (2020년 1월 19일 ~ 2020년 2월 17일)
4.2.3.4. 미래한국당[편집]
미래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미래통합당이 연동형 비례대표제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다수 확보하기 위한 위성정당. 형제/자매 정당을 자칭하였고, 모당인 미래통합당 역시 인정하였다. 21대 총선에서 비례 19석을 차지하였다. 총선 이후 미래통합당과 합당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 대표:
    • 한선교 (대표, 2020년 2월 5일 ~ 2020년 3월 19일)
    • 원유철 (대표, 2020년 3월 20일 ~ 2020년 5월 29일)
4.2.3.5. 미래통합당[편집]
미래통합당 흰색 로고(가로)

2020년 2월 17일 지난 분당 사태 이후 분열되었던 보수정당들이 다시금 중도·보수 통합의 기치를 내걸고 통합을 추진함에 따라 자유한국당새로운보수당전진당의 원내 보수정당과 2개 창준위 등을 끌여들여 신설합당의 형식으로 창당한 보수정당이다. 법적 전신인 세 정당 중 자유한국당에 대한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이후 보수 최악이었던 탄핵역풍의 17대 총선에서 거둔 121석의 성적을 갈아치우며 4연패라는 참패를 21대 총선에서 맞이하였다. 이후 새로운 비대위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변화를 거듭하며 지지율이 상승하여 2016년 탄핵사태 이후 4년만에 처음으로 여론조사에서 여당의 지지율을 뛰어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같은해 9월 2일 국민의힘으로 당명을 교체했다. 해당 항목 참조.
  • 대표:
    • 황교안 (대표, 2020년 2월 17일 ~ 2020년 4월 15일)
    • 심재철 (권한대행, 2020년 4월 15일 ~ 2020년 5월 8일)
    • 주호영 (권한대행, 2020년 5월 8일 ~ 2020년 5월 27일)
    •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2020년 5월 27일 ~ 2020년 9월 2일)
4.2.3.6. 한국경제당[편집]
1584586103942

국민희망당을 계승한 정당. 이은재 의원이 기독자유통일당을 탈당해 한국경제당으로 입당함에 따라 국회 원내에 의석을 가지게 되면서 제도권에 진입했다. 하지만 한국경제당은 21대 총선에서 원외정당에도 밀리는 비례투표율을 보임에 따라 참패하여 원외정당으로 다시 밀려나게 되었다. 이후 자유한국21 창당준비위원회에 흡수되어 자유한국21로 당명을 교체했다가, 자유민주당에 합류하기 위해 자진 해산하였다. 해당 항목 참조.

4.2.4. 현재[편집]

4.2.4.1. 원내[편집]
4.2.4.1.1. 국민의힘[편집]
국민의힘 로고(20200924...

대한민국의 원내 보수정당이자 제 1 원내야당이다. 미래통합당이 당명을 바꾼 정당. 주류 보수정당인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의 계보를 계승했다. 미래통합당 시절 만들어진 비대위를 중심으로 추구했던 개혁이 성공하여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 대승했다. 이후 치뤄진 1차 전당대회로 30대의 이준석이 당대표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삼아서 2022년 20대 대선에서 탄핵을 당하고 정권을 빼앗긴 이후 5년 만에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서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 대표:
    •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2020년 5월 27일 ~ 2021년 4월 8일)
    • 주호영 (권한대행, 2021년 4월 8일 ~ 2021년 4월 30일)
    • 김기현 (권한대행, 2021년 4월 30일 ~ 2021년 6월 11일)
    • 이준석 (대표, 2021년 6월 11일 ~ 현재)

4.2.4.2. 원외[편집]
4.2.4.2.1. 한국국민당[편집]
한국국민당(2015년) 로고
  • 대표:
    • 윤영오(2015년 8월 4일 - )
4.2.4.2.2. 신자유민주연합[편집]
신자유민주연합 로고
4.2.4.2.3. 민생당[편집]
민생당 흰색 로고

바른미래당과 대안신당민주평화당이 2020년 2월 24일 창당한 신당이다. 제3지대 정당을 표방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민주당 계열의 주로 호남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구 정치인들이 중진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2년 3월 8일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지지를 선언하며 동시에 국민의당과 함께 국민의힘과 합당 절차를 밟을 것이라고 밝혔다.
  • 대표:
    • 김정화박주현[67]유성엽[68] (공동대표, 2020년 2월 24일 ~ 2020년 5월 29일)
    • 이수봉 (비상대책위원장, 2020년 5월 29일 ~ 2021년 6월 18일)
    • 이관승, 김정기 (비상대책위원장 공동직무대행, 2021년 6월 18일 ~ 2021년 11월 18일)
    • 서진희 (2021년 11월 19일 ~ 현재)

4.3. 소속 정치인[편집]

4.3.1. 대통령[편집]

대한민국 대통령 문장
이름
임기
선출 방법
정당
취임일
퇴임일
7
Kim Young-sam p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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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1927 ~ 2015)
14
1993년 2월 25일
1998년 2월 24일
1992년 대선
직선 42.0%
민주자유당 (1993 ~ 95)
신한국당 (1995 ~ 97)
무소속 (1997 ~ 98)
10
new mb
external/static....
이명박
(1941 ~ )
17
2008년 2월 25일
2013년 2월 24일
2007년 대선
직선 48.7%
한나라당 (2008 ~ 12)
새누리당 (2012 ~ 13)
11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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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1952 ~ )
18
2013년 2월 25일
2016년 12월 9일 (직무정지)
2012년 대선
직선 51.6%
새누리당 (2013 ~ 17)
자유한국당 (2017)
2017년 3월 10일 (인용->파면)
황교안 국무총리가 직무정지 기간동안 권한대행 (2016년 12월 9일 ~ 2017년 3월 10일)
13
윤석열 20대 대선 선관위 프...
윤석열
(1960 ~ )
20
2022년 5월 10일
2027년 5월 9일[69]
2022년 대선
직선 48.56%
국민의힘 (2022 ~ )

4.3.2. 국회의원[편집]

4.3.2.1. 14대 국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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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2. 15대 국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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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3. 16대 국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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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4. 17대 국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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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5. 18대 국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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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6. 19대 국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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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7. 20대 국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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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8. 21대 국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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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 민선 광역자치단체장[편집]

4.3.3.1. 서울특별시장[편집]
대수
이름
당적[70]
임기시작
임기종료
재임기간
비고
이명박 (李明博)
2002년 7월 1일
2006년 6월 30일
4년
오세훈 (吳世勳)
2006년 7월 1일
2010년 6월 30일
4년
2010년 7월 1일
2011년 8월 26일[73]
1년 56일
오세훈 (吳世勳)
2021년 4월 8일
4.3.3.2. 부산광역시장[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74]
문정수 (文正秀)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안상영 (安相英)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2002년 7월 1일 ~ 2004년 2월 4일[76]
한나라당
허남식 (許南植)
2004년 6월 6일 ~ 2006년 6월 30일
한나라당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한나라당
2010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
한나라당[77]
서병수 (徐秉洙)
2014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박형준 (朴亨埈)
2021년 4월 8일 ~
4.3.3.3. 대구광역시장[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79]
문희갑 (文熹甲)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무소속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조해녕 (曺海寧)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한나라당
김범일 (金範鎰)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한나라당
2010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
한나라당
권영진 (權泳臻)
2014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2018년 7월 1일 ~ 현재
4.3.3.4. 인천광역시장[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80]
최기선 (崔箕善)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안상수 (安相洙)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유정복 (劉正福)
2014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4.3.3.5. 대전광역시장[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82]
홍선기 (洪善基)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염홍철 (廉弘喆)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박성효 (朴城孝)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한나라당
염홍철 (廉弘喆)
2010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
4.3.3.6. 울산광역시장[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85]
초대
심완구 (沈完求)
1997년 7월 15일 ~ 1998년 6월 30일[86]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박맹우 (朴孟雨)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2010년 7월 1일 ~ 2014년 3월 31일[88]
김기현 (金起炫)
2014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4.3.3.7. 세종특별자치시장[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90]
유한식 (兪漢植)
2012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
4.3.3.8. 경기도지사[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91]
이인제 (李仁濟)
1995년 7월 1일 ~ 1997년 9월 18일[92]
손학규 (孫鶴圭)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김문수 (金文洙)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2010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94]
남경필 (南景弼)
2014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4.3.3.9. 강원도지사[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96]
최각규 (崔珏圭)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김진선 (金振兟)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4.3.3.10. 충청북도지사[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97]
주병덕 (朱炳德)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이원종 (李元鐘)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정우택 (鄭宇澤)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4.3.3.11. 충청남도지사[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98]
심대평 (沈大平)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2002년 7월 1일 ~ 2006년 3월 24일[99]
이완구 (李完九)
2006년 7월 1일 ~ 2009년 12월 4일[100]
4.3.3.12. 경상북도지사[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101]
이의근 (李義根)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2002년 7월 1일 ~ 2006년 6월 30일
김관용 (金寬容)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2010년 7월 1일 ~ 2014년 6월 30일
2014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이철우 (李喆雨)
2018년 7월 1일 ~ 현재
4.3.3.13. 경상남도지사[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105]
김혁규 (金爀珪)
1995년 7월 1일 ~ 1998년 6월 30일
1998년 7월 1일 ~ 2002년 6월 30일
2002년 7월 1일 ~ 2003년 12월 14일[107]
한나라당[108]
김태호 (金台鎬)
2004년 6월 6일 ~ 2006년 6월 30일
한나라당
2006년 7월 1일 ~ 2010년 6월 30일
한나라당
홍준표 (洪准杓)
2012년 12월 20일 ~ 2014년 6월 30일
2014년 7월 1일 ~ 2017년 4월 9일[109]
새누리당[110]
4.3.3.14. 제주특별자치도지사[111][편집]
대수
이름
임기
정당[112]
김태환 (金泰煥)
김태환 (金泰煥)
무소속
우근민 (禹瑾敏)
무소속[114]
원희룡 (元喜龍)
2014년 7월 1일 ~ 2018년 6월 30일
2018년 7월 1일 ~ 2021년 8월 11일
무소속[116]

4.3.4. 당대표[편집]

민주자유당 심볼민주자유당 글자 총재 및 대표민주자유당 심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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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국당 로고 신한국당 흰색 로고타입 총재 및 대표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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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흰색 구 아이콘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 총재 및 대표한나라당 흰색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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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흰색 아이콘 새누리당 흰색 로고타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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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흰색 아이콘 국민의힘 흰색 로고타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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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국민당 심볼 통일국민당 글자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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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당(1994년) 심볼신민당(1994년) 흰색 로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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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연합 흰색 아이콘 자유민주연합 흰색 로고타입 총재 및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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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국민당(2000년) 흰색 ... 민주국민당(2000년) 흰색 ...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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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국민연합 심볼하나로국민연합 흰색 글씨 대표
초대 대표
이한동
한국미래연합 심볼 한국미래연합 흰색 로고타입 대표운영위원
초대 대표
박근혜
자유선진당 흰색 아이콘 자유선진당 흰색 로고타입 총재 및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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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중심연합 흰색 아이콘 국민중심연합 흰색 로고타입 대표
초대 대표
심대평
미래희망연대 로고 미래희망연대 흰색 로고타입 대표
개명 이전
김선미
조욱현
바른정당 흰색 로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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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미래당 흰색 로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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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보수당 흰색 가로 로고 책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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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향한전진4.0 흰색 로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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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역대 선거 결과[편집]

4.4.1. 대통령 선거[117][편집]

후보자
연도
대수
정당
득표수
득표율
결과
9,977,332표
42.0%
당선
3,880,067표
16.3%
3위
1,516,047표
6.4%
4위
4,925,591표
19.2%
3위
9,935,718표
38.7%
2위
11,443,297표
46.6%
2위
11,492,389표
48.7%
당선
새시대참사람연합
7,161표[118]
0.01%
10위
15,773,128표
51.55%
당선
7,852,849표[119]
24.03%
2위
2,208,771표
6.76%
4위
9,140표
0.02%
12위
20대
16,394,815
48.56%
당선

4.4.2. 국회의원 선거[편집]

연도
국회
정당
전체 의석수
지역구
비례
결과
149 / 299
116 / 237
33 / 62 (38.5%)
원내 1당
31 / 299
24 / 237
7 / 62 (17.4%)
원내 3당
1 / 299
1 / 237
0 / 62 (1.8%)
원내 4당
139 / 299
121 / 253
18 / 46 (34.5%)
원내 1당
50 / 299
41 / 253
9 / 46 (16.2%)
원내 3당
17 / 273
12 / 227
5 / 46 (9.8%)
원내 3당
2 / 273
1 / 227
1 / 46 (3.7%)
원내 4당
희망의한국신당
1 / 273
1 / 227
0 / 46 (0.4%)
원내 5당
133 / 273
112 / 227
21 / 46 (39.0%)
원내 1당
121 / 299
100 / 243
21 / 56 (37.30%)
원내 2당
1 / 299
1 / 243
0 / 56 (0.6%)
원내 6당
4 / 299
4 / 243
0 / 56 (2.67%)
원내 5당
153 / 299
131 / 245
22 / 54 (43.45%)
원내 1당
14 / 299
6 / 245
8 / 54 (13.18%)
원내 4당
18 / 299
14 / 245
4 / 54 (5.72%)
원내 3당
5 / 300
3 / 246
2 / 54 (3.2%)
원내 4당
152 / 300
127 / 246
25 / 54 (43.3%)
원내 1당
122 / 300
105 / 253
17 / 47 (38.3%)
원내 2당
84 / 300
84 / 253
0 / 47 (후보 없음)
원내 2당[120]
0 / 300
0 / 253
19 / 47 (33.84%)
원내 3당[121]
0 / 300
0 / 253
0 / 47 (0.17%)
원외 정당
0 / 300
0 / 253
0 / 47 (0.03%)
원외 정당

4.4.3. 지방선거[편집]

연도
횟수
정당
광역자치단체의회의원
기초자치단체의회의원
5 / 15
70 / 230
333 / 875
4 / 15
23 / 230
94 / 875
4 / 16
29 / 232
95 / 616
0 / 16
1 / 232
0 / 616
6 / 16
74 / 232
253 / 616
11 / 16
140 / 232
467 / 682
0 / 16
0 / 232
2 / 682
1 / 16
16 / 232
33 / 682
12 / 16
155 / 230
557 / 733
1621 / 2888
0 / 16
7 / 230
15 / 733
67 / 2888
6 / 16
82 / 228
288 / 761
1247 / 2888
1 / 16
13 / 228
41 / 761
117 / 2888
0 / 16
1 / 228
0 / 761
2 / 2888
0 / 16
1 / 228
1 / 761
11 / 2888
0 / 16
0 / 228
3 / 761
19 / 2888
8 / 17
117 / 226
416 / 789
1413 / 2898
2 / 17
53 / 226
137 / 824
1009 / 2927
0 / 17
0 / 226
5 / 824
21 / 2927

5. 기타 보수주의 정당[편집]

일반적으로 1990년대 이후 보수정당은 민자당의 직계 후신정당인 한나라당계 정당을 의미한다. 그러나 1995년까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이전의 민주당계 정당이 가진 이념적인 보수성에 주목한 사람들은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전까지의 민주당계 정당을 보수정당으로 보곤 한다. 이외에도 민자당계 정당의 주요일파로서 신민주공화당에 뿌리를 두고 자유민주연합부터 시작한 충청권 보수도 존재하며 제6공화국 이후 지속되어온 민자당계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양당제에 반기를 든 통일국민당이나 바른정당 등의 중도보수 성향의 개혁적 보수도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민자당계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의 성향이 섞인 국민의당(2016년) 등의 중도주의 정당이나 창조한국당과 같은 정당도 중도보수의 개념에 넣기도 한다.

최근에는 박정희의 이념과 가치를 따르거나 친박근혜 성향의 새누리당(2017년)대한애국당우리공화당친박신당기독자유통일당 등 반동주의, 정치극단주의 성향의 극우정치세력도 존재한다.

6. 관련 문서[편집]

7.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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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민당(2015년) 흰색 ...

대한민국 국장
대한민국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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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 미군정
(1897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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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정부
(1998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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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정부
(2003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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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2008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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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px 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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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px 투명

1px 투명
1px 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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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px 투명

[1] 단, 동교동계가 탈당해서 평화민주당으로 분당한 후의 통일민주당을 말한다.[A] 2.1 2.2 2.3 자유당, 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5] 노농당, 박정희 정권[6] 박정희 정권 이후 점진적으로 관치경제에서 벗어났다.[7] 통일민주당의 상도동계에서 시작된 일파로 신한국당, 한나라당 민주계 및 친이계로 이어졌다.[8] 보수자유주의와 국민자유주의를 말하는데 한나라당 전반기 시절 국가보안법의 폐지 및 대체를 요구했던 개혁적 소장파들이 존재했다.[9] 이명박 정권[10] 이명박 정권[11] 자유보수주의국민보수주의사회보수주의 등 다양한 보수주의가 혼재되어 있다.[12] 고전적 자유주의를 계승한 이념 중 하나로서 정부가 재정지출과 부채에 신중해야하며 이를 견제하기 위해서 정부가 재정정책에 대한 책임을 져야할 것을 주장하는 이념이다. 감세정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한다. 국민의힘의 기본정책인 5번째 정책인 정치개혁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재정준칙의 도입 및 상시적인 지출 구조조정, 페이고 원칙의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13] 고전적 공화주의의 전통을 계승한 현대적 공화주의는 공공선을 위해서 개인의 자유를 일부 제약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현재 한국 보수정당의 공동체주의 분파다. 그래서 기본소득 도입, 복지 확대에 대해서 호의적이다. 그 외 시민의 미덕과 시민들의 공적 영역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를 주장한다.[14] 독일식 사회자유주의로서 사회적 시장경제의 개념을 주장하며 현재까지 독일식 보수주의에 녹아들어있다. 경제민주화를 외치는 김종인 등 자유주의 중도파가 해당된다.[15] 중도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일부 호남 출신 민주당계 인사도 포함[16] 이명박 정권이 녹색 성장을 제창한 것이 기원이 되었다고 본다. 다만 새누리당 시절까지도 단순 선언의 수준에 불과했고 자유한국당 때는 심지어 당의 정강·정책에서 빠지기까지 했지만 새로운 정강·정책에 다시 부활했으며 구체화되었다. 기후변화에 대비해서 시장주의적 관점으로 친환경적 성장을 추구한다는 이념이다.[17] 국민의힘 110석[18] 즉, 민주당계 정당 문서와 달리 이 문서에 나오는 정당들은 그저 이념이 같은 정당들일 뿐, 반드시 계보적으로 연결된 정당들이 아니다.[19] 세속주의 성향이 강하고 기독교 민주주의불교 민주주의 등의 종교적 보수주의 이념을 가진 정당은 제외한다.[20] 민자당계 정당, 한나라당계 정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21] 참고로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도 개화파 출신 독립운동가다.[22] 이나미. (2017). 한국의 진보·보수 개념 변천사. 내일을 여는 역사, 67(), 100-116. 참조[23] 실제로 한국에 당명에 보수가 들어간 정당은 1963년 보수당과 2020년 새로운보수당, 둘 뿐이다[24] 실제 이전까지 진보의 야도 중 하나였던 대구가 보수성향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25] 권용립. (2013). 한국의 ‘보수’ - 개념의 궤적과 역사적 특징. , 16(4), 97-119. 참조[26] 다만 이 시기의 민주당계 정당은 자유당과 이념 및 정책 노선이 거의 다르지 않은 보수 우파 정당이었다. 그러므로 보수 양당제다. 1956년 잠시 조봉암의 진보당이 제 3당으로 부상하기도 했으나 진보당 사건을 계기로 조봉암은 사형당하고 진보당은 해체되었다. 여담이지만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주역 중 하나인 통일민주당도 민주당의 정치이념을 계승한 보수정당이다.[27] 충격적이겠지만. 초창기 민주당계 보수정당들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익진영이 분화하게 된 것은 1951년 창당된 자유당과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이 보수양당제를 구성하게 되면서부터다.[28] 족청계 원내교섭단체다.[29] 대한노총과 대한농총의 주도로 대한노농당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여기에 일부 원내 무소속 구락부 소속 의원들이 합쳐서 만드려고 하다가 이견차로 인해서 노총과 농총이 한국노농당으로 이탈하고 난 다음에 그대로 창당한 정당이다.[30] 탈당한 이들 중에서는 자유연맹이라고 해서 자유당 출신의 무소속 의원들끼리 연대를 만들었다. 18대 총선의 친박 무소속 연대를 생각하면 된다.[31] 관보 및 초대 대통령 취임 기념 우표, 취임식 일자 기준.[32] 간선제로 실시되어 국회의원 투표로 이루어졌다.[33] 간선제로 실시되어 국회의원 투표로 이루어졌다.[34] 3.15 부정선거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35] 비례대표제 없음[36] 당시 둘로 나뉘어 있던 민주당계 정당 중 하나였다. 나머지 하나는 제1야당 평화민주당이었다.[37] 민주공화당을 계승하는 정당이었다. 그 당시 일반인들은 이 정당이 더욱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을 정통으로 계승한다고 보았다. 다만 민주공화당 출신 인사들 중에 민주정의당으로 넘어간 경우도 많아서 둘 다 어느 정도 민주공화당을 계승한다고 봐야 할 듯 하다.[38] 사실 노태우는 5공 시절부터 민주당계 정당 측에 곧 있으면 좌파가 제도권 정치에 진입할 것이므로 보수 정당들이 대통합해야 한다고 제의했으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이 모두 거부해 무산된 바 있었다. 그랬던 것이 몇 년 후에 다시 추진되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39] 1967년 창당된 신민당은 1960년대 민주공화당에 맞섰으나 서로 분열되어서 지리멸렬했던 야당들을 1970년대에 야당통합의 기치로 통합한 야당이다. 오늘날 자유당의 라이벌로 1955년 창당된 민주당이 인식되듯이 공화당의 라이벌로는 신민당이 인식된다. 민주한국당의 경우 관제야당으로 기능해서 제대로 된 야당으로 쳐주지 않는 편이다.[40] 정당등록은 9월 10일[41] 김종필 역시 3김 중 하나라 하지만, 당장 13대 대선에서 YS나 DJ가 받은 득표율과의 차이만 보아도 둘과는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20% 이상을 획득하며 단일화했을 경우 당선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자되는 둘과 달리, 김종필은 유신정권의 잔재라는 이미지 등으로 인하여 8%밖에 획득하지 못하였다.[42]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내각제 개헌은 대통령 욕심이 있던 김영삼이 나중에 반대하면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김종필은 탈당 후, 정치 성향이 완전히 달랐던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과 연합을 하면서까지 내각제 개헌을 추진했으나, 결론적으로 실패하고 2004년 정계를 은퇴한다.[43] 국민의힘의 전신[44] 취임식은 1980년 9월 1일.[45] 취임식은 1981년 3월 3일.[46] 간선제로 실시되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투표로 이루어졌다[47] 간선제로 실시되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투표로 이루어졌다[48] 간선제로 실시되어 대통령선거인단의 대통령선거인 투표로 이루어졌다[49] 간선제로 실시되어 대통령선거인단의 대통령선거인 투표로 이루어졌다[50] 유신정우회와 합한 숫자이다.[51]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선출한 유신정우회 소속 의원이다.[52] 유신정우회와 합한 숫자이다.[53]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제로 선출한 유신정우회 소속 의원이다.[54] 이때 바른미래당에 잔류하고 민생당에 남은 바른정당계 인사들도 있다. 이들도 현재는 대부분 국민의힘에 합류한 상태다.[55] 참고로 군주정과 교회 그리고 미국 공화당의 상징색은 빨간색이고 흰색과 파란색은 보수주의의 상징색이다. 흰색은 근대 이전 보수주의를 상징하던 색이었고 파란색은 근대 이후부터 보수주의를 상징한 색이었다.[56] 청계천 복원, 교통체계 개편 등의 서울시장 당시 남겼던 업적과 당시 경제 위기로 현대그룹 CEO 이력이 있었던 이명박은 경제 부흥을 열망하던 중도보수/중도층의 성원을 얻었다.[57] 박정희 前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는 17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대표를 지내며 천막당사 등의 전략을 써서 총선에서의 선전을 이끌어냈고,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및 2006년 재보궐선거의 연전연승를 이끈 주역으로 평가받아 영남권 보수층 및 '박사모'로 일컫는 극렬지지자의 열렬한 성원을 받았다.[58] 2016년 1~2월까지도 진보성향인 한겨레 등의 언론 보도를 보면 새누리당이 180석 이상 차지해 일본의 자민당처럼 1.5당 체제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냐면서 불길해하던 기사가 다수 나오고는 했다.[59] 2015년 말까지 새정치민주연합의 내분과 그에 대한 대중들의 외면 양상, 그 이후 새정치민주연합의 분열로 민주당계가 다수가 되리라는 입장은 아무도 없었으나, 더불어민주당의 문재인 당시 대표의 인재 영입과 이후 김종인 비대위 체제 출범, 그리고 국민의당의 안철수발 제3정당에 대한 기대감과 안철수에 대한 새로움이 여권인 새누리당 공천 파동과 극명히 대조되었고, 선거 결과가 나오고 범야권에 재도약의 기회를 대중에게 얻었다는 분석이 나왔다.[60] 표차는 역대 최다이기는 하지만, 야권 후보의 분열로 득표율만 봤을때는 41%로 김영삼 - 김대중 前 대통령과 비슷한 수준이다.[61] 보수 계열 무소속 당선자 포함 시.[62] 탈당 후 민주당 입당[63] 정근모 후보는 대선 하루 전에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으나 후보 사퇴는 하지 않고 0.06%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64] 합당에 참여하지 않고 정통민주당경제민주당 등으로 건너간 이들도 많다.[65] 중도보수정당으로 보는 시각에서는 자유보수주의 정당으로 본다.[66] 2018년 6월 14일 사퇴[67] 3월 24일 사퇴[68] 4월 20일 사퇴[69] 탄핵, 사임, 사망 등의 변수가 없어야 이날 퇴임하게 된다.[70] 지방선거 당선 당시[71] 임기만료로 퇴임 직후 바로 대선에 뛰어들어 당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민선 서울특별시장 출신 첫 대통령. 임명직 서울시장 출신 대통령으로는 2대 시장인 윤보선이 있다.[72] 최초의 민선 재선 시장[73] 무상급식 전면확대 논란 당시 투표율이 33.3%에 못 미치자 사퇴했다.[74] 선거당시 당적[75] 1995년 신한국당으로 당명 변경. 1997년 한나라당으로 당명 변경.[76] 뇌물수수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다가 2004년 초 자살하였다.[77] 2012년 2월 새누리당으로 당명 변경[78] 2017년 2월 자유한국당으로 당명 변경[79] 선거당시 당적[80] 선거당시 당적[81] 2017년 2월 자유한국당으로 당명 변경[82] 선거당시 당적[83] 2005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84] 2012년 새누리당에 흡수[85] 선거당시 당적[86] 승격 당시 경상남도 울산시장으로 원래는 광역시 신설 때 새로 선출해야 하지만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에서 설치되는 관계로 울산광역시설치등에관한법률 부칙 제4조 제3항에 의해 울산광역시장이 되었다. 부칙 제4조 (최초의 지방자치단체의 장등에 관한 경과조치) ③이 법 시행당시의 울산시장은 공직선거 및선거부정방지법 제30조제1항제1호의 규정에 불구하고 이 법 시행후 최초의 울산광역시장이 되고, 그 임기는 1998년 6월 30일까지로 한다[87]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 입당[88]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서 울산 남구 을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사퇴.[89] 2017년 2월 자유한국당으로 당명 변경[90] 선거당시 당적[91] 선거당시 당적[92] 대통령 선거에 나가기 위해 사퇴.[93] 2012년 2월 새누리당으로 당명 변경[94]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에서는 김문수 지사가 선거에 나가주기를 바라며 짜장면 중에 가장 맛있는 것이 삼선짜장면인 것처럼 도지사는 3선 도지사가 최고라고 권유했으나, "경기지사를 8년째 하는데 조선시대(관찰사)부터 계산하면 제일 오래 하고 있다."며 고사했다. 출처[95] 2016년 11월 새누리당 탈당 → 2017년 1월 바른정당 합류 → 2018년 1월 바른정당 탈당 → 2018년 1월 자유한국당 복당[96] 선거당시 당적[97] 선거당시 당적[98] 선거당시 당적[99] 결과적으로 관선, 민선 합해 14년 반을 재임한 셈이다.[100] 이명박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에 반발하여 사퇴[101] 선거당시 당적[102] 한나라당으로 당명 변경.[103] 새누리당으로 당명 변경.[104] 자유한국당으로 당명 변경.[105] 선거당시 당적[106] 신한국당으로 당명 변경 후, 한나라당으로 재변경.[107]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의원 출마를 위해서 자진사퇴.[108] 사퇴 직후 열린우리당 입당.[109] 제19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해 자진사퇴.[110] 새누리당에서 2017년 2월 자유한국당으로 당명 변경[111] 구 제주도지사 포함[112] 선거당시 당적[113] 4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우리당 입당 번복 등의 혼란이 생기자, 결국 "도지사직을 가지고 이번 선거를 치를 수도 있지만 공무원 선거개입 의혹이 있는 상황에서 원칙만을 따질 수는 없었다"며 "오늘 저의 사퇴가 최근 불거진 공무원선거개입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며 지사직을 사퇴하고 무소속 출마했다.[114] →새누리당[115] 새누리당→무소속→바른정당바른미래당→무소속[116] →미래통합당[117] 보수 성향 무소속 후보{예: 이회창(2007년) 등}는 제외하였다.[118] 오영국 후보 이전까지 역대 선거 최저 득표.[119] 민주화 이후 역대 제1 보수정당 후보 중 최저 득표[120] 미래한국당과 합산시 103석[121]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122] 기초자치단체의회가 없음[123] 민주당계 정당으로도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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