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27, 2021

한국의 복지국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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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28Sp 9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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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복지국가론] 한국의 복지국가론에는 착취와 불로소득에 관한 정치경제학이 빠져 있다
정승일(사회민주주의센터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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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주의의 원류는 사회민주주의

오늘날 우리나라 진보 진영에서 보편적 복지와 함께 가장 많이 논의되는 화두가 경제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이다. 그리고 경제민주주의란 재벌그룹 개혁과 함께 대-중소영세기업간의 갑을관계 개선 + 동반성장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경제민주주의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것은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의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그것은 레닌과 로자 룩셈부르크가 추구하던 소비에트 공화국식의 국가 사회주의화를 반대한다는 맥락에서 제시된 개념이었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대표가 자본가들의 대표에 맞서, 미시경제(기업)와 거시경제(국민경제), 그리고 메소경제(산업별) 차원에서 노-자간에 일종의 공동 통치(협치)의 지배구조(governance structure)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 이래 유럽과 미국에서 활발하게 논의된 경제민주주의 역시 자본+부르주아 측에 맞서는 노동+무산자들의 복지권·시민권과 노동권, 노동조합권의 강화, 그리고 산업별 지배구조 및 국민경제 전체의 지배구조 있어 공동통치의 지배구조를 의미했다. 즉 그것은 총노동 대 총자본간의 대립 전선을 전제하면서 양자간의 공동 통치 지배구조 구축을 통해 자본과 유산자들을 압박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개념이 우리나라에 수입되어서는 총노동 대 총자본간의 대립전선 개념은 쏙 빠져버리고, 그 대신 대자본 대 중소자본+영세자본간의 대립 전선 개념으로 전환되어 버렸다.
경제민주주의를 그 본래의 의미로 되돌려야 한다. 경제민주주의의 핵심은 노동해방과 복지국가이다. 5천만 국민의 대다수인 직장인들, 종업원들, 그리고 영세자영업자들이 꿈꾸는 것은 장시간 근무·노동과 산업재해로부터의 해방, 안정적인 일자리, 동일노동-동일임금의 원칙 구현, 산별 단체교섭의 법적 의무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저녁과 주말이 있는 삶을 보장하는 공화국이다. 이렇듯 초보적 단계의 노동해방을 이룩한 그런 민주공화국이 바로 경제민주화 공화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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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적 설득력의 한계에 직면한 복지국가 운동

4년 전 무상급식 열풍과 함께 호기 있게 출발한 요즘 복지국가 운동은 침체와 전망 부재의 상태에 빠져있다. 왜 그럴까?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복지재정 즉 증세의 실패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그런데, 더 깊게 질문해보자. 왜 부자증세를 비롯한 증세 담론은 대중적 열풍은커녕 대중적 설득력을 획득하는데 실패했을까? 그 이유는 사회복지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조세 엔지니어링적 증세의 관점에는 착취 또는 불로소득에 관한 정치경제학적 관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조세 전문가들은 흔히 부자 증세의 논거로 지불능력론을 제시한다. 부자들은 부유해서, 즉 세금 지불능력이 더 많기 때문에 그들에게 증세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문가적 논법은 즉각적인 반박에 직면하는데, 부자들의 소득 역시 그들이 ‘땀흘려’ 획득한 학위와 재산 그리고 직위 및 자격증으로부터 얻는 ‘근로 소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듯 피땀을 다해 획득한 소득과 재산에 대하여 증세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짓, 남의 것을 강탈하는 사악한 행위라는 반박이 동네 아저씨와 아줌마들에게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과연 이러한 반박에 대해 뭐라고 비판하며 설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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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론에는 착취와 불로소득에 관한 정치경제학이 빠져 있다

1970년대 영국 노동당은 연간 10억이 넘어가는 개인소득부터는 89%의 세율로 과세했다. 뿐만 아니라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든 선진국(미국, 스웨덴, 독일, 일본 등 모두 포함)에서 소득세 최고 세율은 75~90%였다. 러한 고율 소득 과세의 논거는 ‘불로소득=착취론“이었다. ‘정당한 소득’이란 “자신의 노동과 노력의 댓가”로 얻은 것이어야 하며, 그것을 초과하는 소득은 모두 불로소득인 바, 불로소득이란 결국 타인의 노동과 노력의 성과를 가져가는 것 즉 착취 또는 요행(행운)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당시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제아무리 능력과 재능이 뛰어난 개인이라도 타인의 수배 이상의 소득을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으며, 그것을 넘어서는 소득은 명백한 착취 또는 불로소득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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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로소득이 발생하는가?

불로소득론은 ‘착취론=수탈론’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왜 “불로소득의 획득 = 착취”가 발생하는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대립한다.
첫째는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입장이다. 그것은 완전 경쟁 시장을 가장 바람직하게 여기며, 완전 경쟁시장(그것을 그들은 ‘공정한 시장질서’라고 부르는데)에서는 모든 생산요소(자본, 노동, 토지)가 자신의 가격을 획득하므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소득분배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다만 시장이 왜곡되어(market distortion) 완전한 경쟁적 시장질서가 형성되지 않을 경우 지대(rent)가 발생하는 바, 지대가 바로 불로소득이라고 본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은 (우리나라의 경우 개혁적,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경쟁적 시장질서를 만드는 것이 바로 ‘진보적 과제’이며, 그것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재벌그룹 개혁을 통해 경제력 집중(그리고 독과점)을 축소 또는 해체시키고, 중소영세기업 지원 및 시장 개방(진입 장벽 허물기)이라고 본다. (불로소득에 관한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의에는 헨리 조지 지지자들의 논의가 포함된다).

하지만 현재 복지국가 운동의 한계는 복지국가 담론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자유주의적 담론(철학과 정치경제학)의 한계이다. 완전경쟁 시장(재벌그룹 개혁,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중소벤처기업 지원 등)을 가장 중요한 경제민주주의 담론으로 내세우는 정치경제학으로 과연 제대로 된 복지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겠는가?

자유주의적 진보 논객들은 또한 미국의 리버럴(liberal)의 지적 전통 속에 있는 존 롤슨의 정의론을 가지고 복지국가의 철학을 만들고자 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그 자체에 대한 비판도,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비판의 정치경제학도 없는 롤스의 정의론으로 과연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 가능하겠는가? 과연 자본주의적 착취를 넘어서는 보편적 소득재분배의 철학과 정치경제학이 가능하겠는가?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적 착취에 대한 비판의 논리 없이, 그리고 그 불로소득의 부당성에 대한 논거의 제시도 없이, 과연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부자 증세 + 대기업 증세’가 가능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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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복지국가, 과연 사회민주주의 담론 없이 가능했던가?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전공 학자들은 압도적으로 “스웨덴 복지국가는 ‘실용주의’(즉 탈이데올로기)의 산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스웨덴 복지국가가 탈이데올로기적 실용주의의 산물이었을까? 예컨대 1930~50년대 사이에 스웨덴 복지국가의 설계자였던 복지장관 구스타프 묄러의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보자. 묄러는 시종일관 자본주의적 경제질서 그 자체를 ‘착취’ 체제로 파악했으며, 그 착취를 어떻게 하면 ‘점진적으로 폐기’해나갈 것인지를 늘 고민했다. 비그포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묄러가 전개한 보편적 복지론(시민권에 기초한 사회복지론)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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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정적 유토피아에 관한 사회계약”이 필요하다

자본주의는 분명 반인간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반생태적인 체제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비판의 정신이 없이 보편적 복지와 경제민주주의·노동해방을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지양은 단지 소유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소득과 투자, 경제민주주의와 노동해방 등 다차원적인 영역에서 진행될 수 있다. 생산수단(즉 기업) 소유의 사회화가 아니라 하더라도, 소득과 투자의 사회화와 노동시장(노동력 상품시장)의 사회화는 상당 부분 가능하다. 지난 1백년간의 세계역사의 경험은, 그리고 특히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경험은, 자본에 대한 사회화가 다차원의 세계에서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냐 반자본주의냐’라는 흑백논리의 이분법을 거부한다. 보편적 복지와 노동해방-경제민주주의, 생태환경 보존과 남북한 평화공존-평화통일이라는 4대 비전이 실현되는 민주공화국은 100% 반자본주의가 아니며 그렇다고 100% 순수 자본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천국이 아니지만 지옥도 아니다. 적어도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지옥 같은 악질적 자본주의(시장 자유주의)보다는 훨씬 인간적이고 민주적이며 생태적이고 평화적인 세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궁극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잠정적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리고 앞서 말한 4대 비전을 잠정적 유토피아라고 부르고자 한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좌파 세력은 궁극적 유토피아가 무엇인지를 놓고 논쟁하고 토론해왔다. 하지만 그것은 수천만 국민들이 당장 힘들어하는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공허한 토론이 되기 일쑤였다. “우리는 몇십 년, 몇백 년 뒤에나 찾아올 유토피아를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는 말을 되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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