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30년 걸린 일, 2년 만에 따라 만들더니 - 오마이뉴스
우리 도시 에세이 | 5화
프랑스가 30년 걸린 일, 2년 만에 따라 만들더니도시의 차단벽, 왜곡된 도시화가 낳은 세운상가의 운명은
22.09.12 14:19l최종 업데이트 22.09.12 14:19l
이영천(shrenrhw)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기자말]
서울 도심 한가운데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거대한 차단벽이 있다. 8개 건물군을 통칭하는 '세운상가'다. 이중 현대상가는 녹지 축 조성계획에 따라 2009년 헐렸다.
늙고 쇠락해 이제 노년으로 접어드는 이 집을 희롱하듯, 세운상가 주변은 온통 공사판이다. 쿵쾅거리는 공사소음에 '역시 서울!'이라는 자조적 현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곳 역시 아득한 시공간으로 파묻혀 사라지는 중임을 실감한다.
그러함에도 이곳엔 아직 소리가 살아있다. 상인들의 외침과 오밀조밀한 작업장이 만들어 내는 소리다. 소리가 살아있다 함은, 공간의 고유 생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다. 나에게 이 소리는 이곳을 되살리려는 의지나,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몸부림으로 들렸다.
▲ 세운광장과 상가 2009년 철거된 현대상가 자리에 생겨난 광장과 세운상가 종로측 모습.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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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협받는 공간
세운상가와 그 주변은 무척 독특하게 형성된 공간이다. 고도로 숙련된 기술자들이 소규모 제조업체를 꾸리고 있다. 서로 계열을 이뤄 '맘만 먹으면 미사일도 만든다'는 우스갯소리가 회자할 만큼 도심 제조업의 메카를 이룬 곳이다.
업종 간 관계망이 촘촘하게 작동하는 하나의 '생태계'다. 이런 기능 간 친연성이 이곳의 사회·경제 및 물리적 토대다. 세운상가가 드리운 품에 들어 활기 넘치는 경이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그러나 고도로 숙련된 기술자들이 나이 들어가고 있다. 이를 이으려는 젊은 세대는 드물어 보인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 상가하부 좌측 세운상가 1층 상업 및 생산시설과 그 옆 도로 및 주차장, 맞은편 도심 생산기능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점포와 소규모 생산시설. 특이한 공간구조를 보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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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누군가는 세운상가라는 토양이 오염되었다 여기는 듯하다. 더럽고 비좁으며, 낡고 비전 없어 보이는 작업장이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며, 늙은 노동자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이곳을 방문해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 토로한 오세훈 시장도 그런 게 아닐까.
아니길 바라지만, 현실이 되어가는 느낌이다. 2006년 그는 세운상가를 포함한 지역 일대를 '세운재정비촉진지구'로 지정하면서, 2015년까지 세운상가를 철거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물론 생존권에 위협을 느낀 상인들 반대가 극심했다.
종묘∼남산을 잇는 녹지 축 조성을 앞세웠으나, 실제는 주변 지역을 전부 철거하고 초고층빌딩을 건립하는 게 주목적이었다. 격한 심정을 토로하는 걸 보면 그의 생각은 지금도 확고해 보인다. 긴 안목으로, 정녕 뒷세대의 지혜와 기술력에 이 땅과 공간을 맡겨둘 순 없는 건지.
[관련기사 : 세운상가 주변 재개발에 가려진 사람들]
그저 빨리빨리
파리 외곽에 라데팡스라는 복합개발지구가 있다. 1958년 구상하여 30여 년 동안 순차적으로 개발을 완료한 지구다. 철저한 보차분리(보행자의 보행 공간과 차량의 주행 공간이 물리적으로 구분된 상태) 원칙에 따라 조성된 20세기 도시계획의 모범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 세운상가 1968년 준공 이후 모습으로, 도시에 거대한 차단벽처럼 군림하던 초기 모습임.
ⓒ 서울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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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데팡스가 구상되어 실행된 지 10년 후, 서울에 세운상가 건물군이 생겨난다. 뭐든 군대식으로 밀어붙인 불도저 시장 작품이다. 종묘∼대한극장 앞까지 폭 50m의 약 1km 구간에 거대 건물군이 잇닿아 들어선 것이다. 준공까지 2년이면 족했다. 역사 도시 서울의 시간으론 찰나에 불과했다. 라데팡스의 1/10도 아니었다.
이 땅은 미군 공습을 두려워한 일제가 1945년 6월 조성한 소개공지(疏開空地)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 땅을 무허가 판자촌이 점령한다. 슬럼화한 사창가와 전쟁 이재민, 농촌에서 상경한 사람이다. 이승만 정권 당시 지금 종묘공원에 국회의사당을 짓자는 논의가 일어, 상징 가로로 예정된 이 땅은 존치되는 행운을 얻는다.
▲ 세운상가지구 철거(1966) 지금의 인현(신성)상가 자리에서 진행되고 있는, 도시 빈민이 이룬 판자촌 철거 모습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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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쿠데타 후 당시 재무부는 이 땅을 무단점유자에게 불하하고, 서울시는 도시계획도로로 지정한다. 1966년 시장이 된 김현옥은 박정희에게, 이 땅을 개발해 보라는 내락을 얻어 즉각 착수한다. 설계는 번갯불에 콩을 볶고 철거는 회유와 반협박으로 전광석화다.
독재정권에 복무하며 '개발독재' 시대를 열어젖히는데 일조한 건축가 김수근 사단이 설계를 맡는다. 프랑스 마르세유에 '수직 도시' 개념을 적용한 르 꼬르뷔제의 집합주택 위니떼 다비따시옹에서 층별 기능 분리와 근린주구를 참고하고, 1952년 영국 스미스 부부가 주창한 다층도시의 '공중 가로'에서 보차분리를 빌어온다.
▲ 보도육교 대림상가에서 남산쪽으로 향하는 보도육교. 우측에 새로 만들어진 청년을 위한 창업 및 벤쳐공간이 보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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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을 혼용해 세운상가 설계가 마련된다. 스케치 수준으로 완료된 이 설계가 걸작인지를 떠나, 부지 형상에 맞는 깊은 고려가 없었다는 점과 짧은 시간에 설계하다 보니 모방에 가까웠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아울러 벽을 방불하는 이 집합건축물이 향후 주변 지역은 물론 도시공간구조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란 예측 역시 부족했다는 점도 명확하다. 그저 모든 게 속전속결이었다. 차단벽처럼 들어선 긴 건축군에 우리 조급성이 그대로 투영되어 보인다.
60년대 기형적으로 시작된 도시화는 이렇듯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었다. 시민의 삶과 안전보다 눈에 거슬리는 불결함과 슬럼을 쓸어내기 바빴다. 장기적 안목에서 긴 시간을 두고 변화하는 도시공간구조를 파악할 여유와 마음가짐은 물론 생각조차 없었다.
최고 권력자의 시선이 두려웠고, 외국인이 바라보는 풍경이 부끄러웠을 뿐이다. 이후 서울은 '빨리빨리'로 점철된 속도로 전광석화처럼 확산하고 재구조화되었다. 야만의 세월이었다. 굴곡진 삶들이 왜곡된 근대화 깃발에 속절없이 매몰되었다. 과연 지금은 어떤가?
▲ 시공중인 세운상가(1967) 지금의 세운상가와 그옆 종로쪽으로 현대상가를 시공하는 모습.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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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를 마쳤으나, 공사가 문제였다. 당시로선 신개념인 개발사업이다. 단순 도급이 아니라, 사업시행자가 투자한 비용을 분양 등으로 회수하는 방식이다. 불확실한 사업성에 건물을 짓겠다는 업체가 없었다. 반강요로 8개 사업시행자가 선정된다. 불확실한 사업성은 당연히 용적률 상향으로 이어졌다.
구상설계에 적용된 개념마저 파괴되어 모호하게 변질한다. 수익성이라는 민간 논리에 매몰되어 버린 탓이다. 보차분리와 중정, 인공대지를 두어 각 건물군에 동사무소, 파출소, 학교 및 근린생활시설을 설치해 완벽한 정주체계를 갖추겠다는 수직 도시 구상이 사라진다. 이상적 설계라 제시된 내용마저 무참히 깨지고 만다.
▲ 세운상가 건물군 새로 단장한 삼풍상가에서 종로쪽으로 본 세운상가 건물군. 보존형 개발로 공중 보행로가 모두 연결되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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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과 압력
세운상가는 특이한 변이과정을 거쳤다. 한때 최고급이었던 아파트는 강남개발과 고급맨션 등장으로, 상류층이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면 아래 계층이 그 집을 점유하는 하향여과 과정을 거쳤다. 이젠 기능마저 바뀌어 상가 사무실이나 창고로 사용 중이다.
60년대 말 이곳 소매상가는 서울 시내 백화점을 능가하는 경쟁력이 있었다. 70∼80년대에는 발전하는 전기·전자 업종의 호황으로 전국을 호령하는 곳이기도 했다. 1987년 들어선 용산전자상가에 1차 타격을 입고, 2008년 청계천 복원에 따라 주변 제조업 생태계가 붕괴하면서 문정동 가든 파이브로 썰물처럼 빠져나가 결정적 타격을 입는다. 둘 다 정부가 세운상가에 입힌 타격이었다.
이후 영세한 가내수공업형 제조업과 상점들로 세운상가가 채워진다. 이런 측면에서 세운상가는 한마디로 '정부 주도의 산업·상업형 젠트리피케이션에 철퇴를 맞은 곳'이라 할 만하다.
▲ 세운상가 중정 최초 스케치 수준의 구상설계 일부가 구현된 세운상가 5~8층에 설치된 중정. 빛이 들어와 환하다.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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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공 10년이 지날 무렵부터 세운상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건설 당시 환호성을 울리며 찬양하던 것과는 정반대 현상이다. 심미안이 높아졌을까? 의식 수준에 혁명적인 변화라도 생긴 것일까? 건물이 아름답지 못하고, 일제가 인위적으로 만들었음에도 궁궐과 남산을 잇는 녹지 축을 단절하였으며, 보차분리가 파괴되었다는 비판이었다.
세운상가를 포함한 주변이 1979∼88년 사이 재개발지구로 지정된다. 세운상가 건물군이 자리한 폭 50m, 길이 1km 국공유지를, 1995년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공원·녹지'로 지정한다. 세운상가 철거가 전제된 종묘∼남산을 잇는 녹지 축으로, 그 실현 가능성을 떠나 확고한 법·제도적 지위를 확보한 셈이다.
이후 세운상가를 포함한 주변 재개발이 여러 차례 시도되었으나 성사되진 못했다. 넓은 지역에 분포한 소규모 필지와 수많은 소유권자로 합의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4년 박원순 시장은 세운상가와 주변 상인의 의견수렴 및 국내외 연구 결과 등을 종합해, 철거보다는 재사용이라는 '보존형 개발'로 선회한다. 이에 따라 세운상가 리모델링이 2017년 완료되어, 빌 게이츠를 꿈꾸는 청년 창업·벤처기업이 입주하였다. 그러함에도 주변 지역은 중소규모 재개발로 몸살을 앓는 중이다.
▲ 청계천 보도교 청계천 구간 끊긴 보도교를 보존형 개발로 연결한 모습. 사진 우측으로 철거재개발 후 높이 100m에 달하는, 공사 중인 아파트가 보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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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생산생태계와 초고층 빌딩군의 가치를 판명할 능력이 내겐 없다. 다만 뒷세대로 이어질 생산생태계의 가치와 끼칠 영향력은 가늠할 수는 있다. 한번 지워지면 영영 회생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생산생태계를 지워버린 왕십리 뉴타운 사례에서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아파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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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세운상가, #라데팡스, #김수근, #도심_제조업, #소개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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